저널리즘과 거리가 있어 보이는 이곳에 전 세계 21개국 언론인 1775명이 모였다(이들 중 90% 이상이 미국인이었다). 6월14일부터 17일까지 미국 탐사보도협회(Investigative Reporters & Editors·IRE) 콘퍼런스가 올랜도에서 열렸다. IRE는 1975년 결성되었다. 미국 언론인을 중심으로 매년 탐사보도 경향과 취재 노하우 등을 공유한다. 의미 있는 탐사보도에 대한 시상도 한다. 언론인 역량 강화와 재교육이 자연스레 이뤄지는 현장이다. IRE 콘퍼런스에 여러 차례 참여한 박재영 고려대 교수(미디어학부)는 “미국 기자들이 1년에 한 번 자기 취재수첩, 그러니까 영업 비밀을 공개하는 날이다”라고 설명했다.
콘퍼런스 기간 동안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75분 간격으로 세션이 동시에 열렸다. 발표자로 나선 기자들은 참가자 유치 경쟁도 벌였다. 지난해 미국 언론계를 뜨겁게 달군 ‘미투’ 관련 세션이나 가톨릭 사제의 성추행 탐사보도를 다룬 영화 〈스포트라이트〉의 실제 주인공 마틴 배런 〈워싱턴포스트〉 편집국장 등 스타 언론인이 발제자로 나선 세션에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적은 인원이 참석한 세션도 있었지만, 규모와 상관없이 질문이 쇄도했다. 콘퍼런스가 열리는 홀 가운데 마련된 질문 마이크 앞줄은 늘 붐볐다.
나흘 동안 데이터 툴 활용 노하우, 간단한 온라인 매핑, 프리랜서 기자들을 위한 보조금과 단체 소개, 규모가 작은 뉴스룸에서 특종하는 법, 탐사보도에 유용한 사이트 소개, 뉴스룸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법 등 210여 개의 세션이 펼쳐졌다. IRE 콘퍼런스의 주제는 다양했지만 공통적으로 관통하는 키워드가 있었다. 바로 ‘협력과 공유’였다.
6월14일 열린 ‘트럼프 행정부의 이해상충 추적’ 세션이 대표적이었다. 발표자로 나선 데릭 크래비츠 〈프로퍼블리카〉 기자는 지난 3월부터 시작한 ‘트럼프 타운’ 보도(projects.propublica.org/trump-town)를 소개했다. 트럼프 타운 프로젝트 사이트에 접속해 관료 이름을 검색하면 그가 전직 로비스트 출신인지, 보수 싱크탱크 출신인지, 트럼프 캠프 출신인지 등이 상세하게 나온다.
왜 여러 언론사가 손을 잡게 되었나
이 탐사보도의 아이템 제공자는 트럼프 대통령이다. 그는 오바마 행정부 시절의 로비스트 관련 윤리 조항을 없앴다. 로비스트가 자신이 로비했던 정부기관에 2년 동안 취직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심지어 트럼프 백악관은 로비스트나 기업 간부 등의 백악관 출입 기록을 더 이상 공개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 같은 트럼프 행정부의 역주행에 대응하기 위해 기자들이 움직였다.
하지만 관료들의 정보를 모두 수집해야 했기에 데이터는 방대했고, 몇몇 데이터는 구하기도 어려웠다. 〈프로퍼블리카〉는 ‘단독’ 욕심을 버렸다. 신문 방송 등 레거시 미디어(전통 매체)와 손을 잡았다. 통신사 AP를 비롯해 신문사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와 협업했다. 구글드라이브 등을 이용해 각 뉴스룸 간 정보를 공유했다. 협업 과정도 기사화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 로비스트 출신 트럼프 행정부 관료 186명을 찾아냈다. 그들의 직업 경력과 재산 데이터까지 모아 공개했다. 이 취재는 지금도 업데이트하며 진행 중이다. 크래비츠 기자는 “독자에게 모르는 부분은 모른다고 알리고, 모든 데이터를 다 찾지 못해도 공개하라(Tell the public what you don’t know. When all else fails, free the files)”고 조언했다.
이처럼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기자들이 언론사 울타리를 뛰어넘어 협업하게 만들었다. ‘트럼프발’ 가짜 뉴스와 그의 적대적인 언론관이 매체 연합군을 뭉치게 했다. 크래비츠 기자는 “우리는 굉장히 희한한 시대를 살고 있다. 저널리즘 관점에서 트럼프 행정부는 오바마 행정부보다 더 불투명해 더 많은 감시가 필요하다. 협업을 통해 감시를 강화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트럼프 행정부가 정보공개를 꺼리더라도 미국 기자들은 빈틈을 찾아냈다. 6월15일 ‘탐사보도 서치의 놀라운 세계’ 발표자로 나선 마고 윌리엄스 〈디인터셉트〉 기자와 게리 프라이스 〈인포도켓(info DOCKET)〉 기자는 탐사보도의 ‘무기’가 되어줄 여러 사이트를 소개했다. 두 매체 모두 데이터 저널리즘이 강한 곳이다. 데이터 저널리즘과 관련한 실용적인 팁을 알려주었기에 특정한 매체에 소속되어 있지 않거나 작은 지역 언론사 출신 기자들이 이 세션에 몰렸다.
두 기자는 미국 공공기관 데이터를 수집할 수 있는 사이트뿐 아니라 전 세계 항공기와 선박 등을 추적하는 사이트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들은 “데이터를 찾는 사이트 주소보다 데이터를 찾아가는 방법을 논리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라고 강조했다. ‘그것이 존재하는지’ ‘온라인에 있는지’ ‘자료는 어떤 형태일지’ ‘누가 그 자료에 가장 잘 접근할 수 있을지’ 등 체크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두 기자는 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데이터에 겁먹지 말라고 조언했다.
이처럼 ‘협력하고 공유하라’는 메시지는 IRE 콘퍼런스의 전반적 세션을 꿰는 주제였다. IRE의 기본 정신이도 하다. IRE가 결성된 바로 다음 해인 1976년 6월 미국 애리조나 주 피닉스에서 기자 피살 사건이 일어났다. 돈 볼스 〈애리조나 리퍼블릭〉 기자는 애리조나 주 마피아와 정치인의 유착을 취재하다 차량 테러로 숨졌다.
IRE가 움직였다. 소속이 다른 언론인 38명이 ‘애리조나 프로젝트’를 꾸리고 의기투합했다. 이들은 돈 볼스 기자가 못다 한 취재를 이어받아 마무리 짓겠다고 나섰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언론계에서도 드물던 협업이었다. 이들은 5개월 동안 취재를 한 뒤 기사 40여 건을 쏟아냈다. 실험은 성공적이었고 IRE는 이제 매년 콘퍼런스를 열어 그 가치를 새기고 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KPF 디플로마-탐사보도 교육과정’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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