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도 모른 채 좋아하는 친구와 멀어진다. 둘의 관계는 교실 내 권력구도 때문에 한층 뒤틀린다. 윤가은 감독(34)은 오랜 숙제처럼 남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경험을 바탕으로 각본을 쓰고 이를 스크린에 담았다. 그녀의 첫 장편영화 〈우리들〉은 초등학교 4학년 여자아이 선(최수인), 지아(설혜인), 보라(이서연)가 멀어지고 가까워지며 서로 상처를 주고받는 이야기다.

제작비 1억5000만원, 연기 경험 없는 아역 배우가 주연인 이 신인 감독의 장편 데뷔작은 개봉 2주째에 관객 2만명을 모았다. 입소문을 타면서 저예산 독립영화로서는 흥행 성적표가 나쁘지 않다. 올해 초 열린 제66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경쟁 부문과 최우수 장편 데뷔작 부문에 초청되었다. 체코에서 열린 제56회 즐린 국제어린이청소년영화제 국제경쟁 부문 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어른 관점에서 재단하지 않고 아이들 시선으로 모두의 ‘그때’를 되살려낸 윤가은 감독을 6월29일 만났다(기사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시사IN 조남진

〈밀양〉 〈시〉의 이창동 감독이 시나리오 개발 단계에서 조언을 했다고 들었다.
원래 써간 트리트먼트(시놉시스에서 시나리오로 가기 전 중간 단계)는 여고생이 초등학생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는 과정이었다. 학교폭력 소재에 미스터리 장르라는 외피를 입혔다. 이창동 선생님이 “이거 너무 가짜 같지 않니”라는 한마디를 던졌다. 큰 충격을 받았다. 한 3개월은 매번 새로 써가고 뒤엎는 과정을 반복했다.

그래서 찾은 ‘진짜’ 이야기가 〈우리들〉인가?
지금도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다. 상업적으로 보이는 요소를 제거하고 나니 너무 일상적이고 밋밋한가 싶기도 했다. 그런데 하다 보니 내가 재밌더라. 이야기를 쓰는 동력이 생겼다.

〈우리들〉에 나오는 아이들은 어른에게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당신의 전작(아빠와 바람피우는 여성의 집에 찾아간 소녀가 어린 남매를 맞닥뜨리는 〈손님〉, 일곱 살 소녀 보리가 콩나물 심부름을 위해 생애 처음 홀로 집 밖을 나서는 〈콩나물〉)은 모두 나름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이 주인공이다.
그렇게 사니까 그런 영화를 만드는 것 같다. 우리가 삶의 주체가 아니었던 적이 없잖나. 어려도 삶의 모든 문제를 부모나 선생님과 의논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해결하려고 한다.

‘아이들만 써야지’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고 했다. 그럼에도 왜 아이들인가.
역으로 왜 어른들만 주인공인 영화를 만들어야 하나? 어른들이 주인공인 영화를 만든 감독한테는 왜 개는 안 하세요, 외계인은 안 하세요 질문하지 않잖나. 나는 내가 어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실수로 얻은 경험은 더 있지만 열 살, 열한 살 때의 감정을 지금도 느낀다. 어른과 아이가 실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게 아닐까.

<우리들>은 올해 베를린 국제영화제 제너레이션 경쟁 부문과 최우수 장편 데뷔작 부문에 초청되었다.

아이들이 등장하는 영화는 많다.
주체로서의 아이가 삶의 고난과 역경을 헤쳐 나가는 소설은 많이 있다. 영화에서는 종종 대상화된다. 이를테면 부모님이 싸우는데 아이가 눈치 없이 ‘엄마 아빠 동물원 가자’ 하는 식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잖나. 밤에 부모님이 둘이 소곤소곤만 해도 아이들은 다 알지 않나. 그런 감정들이 여전히 나에게 남아 있다. 내가 아직 그 마음이라서 ‘저거 아닌데’ 생각이 막 든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줘, 왜 모른다고 생각해, 왜 수동적일 거라고 생각해? 묻고 싶어진다. 그런 내 어린 마음이 영화에 투영되는 것 같다.

〈우리들〉에선 상황만 주고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하도록 했다던데.
시나리오는 있었지만 배우들에게 주지 않았다. 꼭 해야 할 대사가 있는 경우에는 쪽대본을 줬다. 리허설을 길게 하면서 배우, 스태프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현장에서 시나리오를 많이 수정했다. 촬영 직전에 바꾼 적도 있다.

자전적 경험에서 출발한 이야기라고 했다. 영화에서 외톨이 선이가 전학생 지아와 여름방학 때 친구가 된다. 개학 뒤 지아가 따돌림을 주도하는 보라와 어울리면서 갈등을 겪는다.
전학을 간 학교에서 사귄 단짝친구와 초등학교 6학년 때 멀어졌다. 지금도 이유를 모르겠다. 그 친구도 나한테 섭섭한 게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사실 〈우리들〉 속 인물이 다 나다. 선이와 가장 공통점이 많지만, 내가 처한 환경은

지아와 가까웠다. 내가 전학생이었기 때문에 지아의 결심과 선택에 대한 나름의 이해가 더 있지 않았나 싶다. 보라의 경우 전사가 있었는데 제작 과정에서 많이 빠졌다. 보라의 엄마는 치맛바람이 세다. 보라는 애지중지 자랐지만 그만큼 압박을 많이 받았다.

극중에서 선이만 휴대전화가 없다. 지아·보라와는 계급이 다르다. 이것도 자전적 경험인가?
경험한 것도 분명 있다. 어렸을 때 좀 멀리, 잘사는 집 애들이 다니는 교회를 다녔다. 되게 친했던 친구들이 있었는데, 그 친구들이 어느 날 내 메이커 없는 청바지를 비웃는 게 느껴졌다. 요새는 아이들 사이에 계급화가 더 도드라진다. 강남 한복판에 있는 논술학원에서 강사로 일한 적이 있다. 엄청 부잣집 아이들이 다녔는데, 초등학교 3학년 학생들이 자기 집 재산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더라. 쉬는 시간에 하는 얘기가 너는 어디 살고, 너네 아빠 차가 뭐고, 여기 학원비가 얼마고…. 심지어 나한테도 월급을 물어봤다. 얼마 안 했는데 비슷하게 맞히더라(웃음). 다 잘사는데 자기들끼리 또 서열이 있다. 몇 평짜리 집에 사는 친구, 몇 평에 사는 친구…. 그런 인상이 남아 있었는데, 영화를 위해 조사하다가 실제로 교실 내 소외에 계급 문제가 많이 작용한다는 연구 결과를 봤다. 그래서 선이가 가난하다는 설정이나 계급 차이가 나는 장치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끌어왔다.

지아와 선이의 갈등이 극으로 치닫다가, 선이 동생 윤이의 “그럼 언제 놀아?”라는 대사가 나온다.
반전 영화다(웃음). 20대 때 아는 분이 ‘우리 아들이 유치원에서 이런 일이 있었어’ 하면서 해준 얘기다. 일곱 살 남자아이였는데 되게 착해서 자기주장을 못하고 늘 맞고 왔다고 한다. 어느 날 유치원에 갔다 와서 자기도 때리고 친구도 자길 때렸다고 신나게 얘기하더란다. 그래서 어떻게 했냐고 물으니까 ‘놀았다’고. 엄마가 황당해하니 ‘그럼 언제 놀아?’ 그랬다는 거다. 그분은 웃긴다고 한 얘긴데 충격을 받았다. 잠깐만요 하고 메모에 적어놨다. 인생의 좌우명으로 삼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원래 시나리오 쓸 때는 그걸 가져올 생각이 전혀 없었다. 클라이맥스에서 잘 안 풀리기에 메모해둔 수첩을 뒤져보다가 발견했다. 연관이 될까 싶어서 자연스럽게 가져왔다. 그 친구 이제 컸을 텐데, 그 친구가 쓴 대사다(웃음).

이 대사가 울림을 준다는 이들이 많았다.
아이가 뭔가를 깨달아서 말하진 않았을 것이다. 정말로 단순한, 순수하다고 표현해야 하나, 아주 진실한 어떤 마음인 것 같다. 아이들은 노는 게 항상 우선이니까. 우리는 때리면 꿍해 있고, 심지어는 복수하려고 하잖나. 그것조차 사실은 애쓰는 건데 말이다. 이 대사가 감동을 준다면 어른이 할 수 없는 본능적인 대사이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구나 다 아이 때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잖나. 치열했던 시기 말고 그 이전의 아주 단순했던 시기, 맛있는 것 먹으면 행복한 그런 시기로. 그 마음이 누구한테나 있어서 그 대사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다들 못 놀고 있어서.

오프닝인 피구 장면에서 선이는 금을 밟지 않았는데도 아이들에게 밀려 밖으로 나간다. 같은 상황에 놓인 지아를 본 선이가 “한지아 금 안 밟았어, 내가 봤어”라고 말하고 영화가 끝난다.
엔딩이 열두 번도 더 바뀌었다. 촬영 중간까지 고민했다. 그 직전에 찍을 뻔한 엔딩이 있다. 똑같이 운동장인데 좀 더 극적이다. 지아가 애들한테 속아서 체육시간인 줄 알고 혼자 있는데 수업 중에 뛰쳐나가서 옆에 있어주는 엔딩이었다. 찍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가짜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선이가 용기 있는 행동을 했으면 좋겠는데,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모두가 있을 때 지아 편을 들어주는 게 진짜 용기 아닐까? 그런 엄청난 용기를 내는 게 일상 속의 기적에 더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 엔딩으로 말하고 싶었던 게 뭐였나?
영화를 만들 때의 버릇이기도 한데, 주인공이 일상으로 돌아오기를 바랐다. 수난사이기도 하고 모험담이기도 한 이 일들을 선이는 커서도 기억할 거다. 선이 인생의 중요한 경험이다. 그렇다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 선이는 달라져야 하는데, 그 모습은 내가 어렸을 때 성취하지 못했던 일종의 판타지, 마음은 먹었지만 내지 못했던 용기를 내어 한 발짝 나아가는 선택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 시나리오를 쓸 때는 선이가 첫 장면에 겪는 사건을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피구를 못하는 선이 정도의 느낌? 나중에 시나리오를 고치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이 순간에 누군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았던 게 얘한테는 굉장히 큰 순간일 수도 있겠구나. 그 마음을 얘는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순간에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지아랑 서로 회복할 수 없을 만큼 상처를 냈지만, 선이가 그런 용기를 낸다면 지아도 선이의 마음을 봐줄 수 있지 않을까.

본인은 용기를 내지 못했나?
그렇게는 못했던 것 같다. 어떤 순간이 되면 포기하게 된다. 상처를 겪으면서 어른이 된다는 이야기를 의심하는 편이다. 상처는 상처로 남는다. 그걸 가지고 어떻게 살 것인가가 문제다. 선이는 상처가 있지만 그 상처를 딛고 뭔가 새로운 행동을 하길 바랐다. 이때 선이의 마음은 단순히 ‘지아를 도와줘야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그보다는 ‘저 마음을 내가 알고 있다’는 그런 거 있잖나. 금 밟았는지 어떤지는 사실 보지도 않았지만, ‘그 혼자인 마음을 아는 내가 여기에 있어’라고 말해주는 것. 그런, 좀 더 직관적이고 본능적인 마음이 아니었을까.

삶의 태도를 제시한 느낌이다.
정말인가. 당장 그렇게 살아야겠다(웃음). 그렇게 살고 싶어서 이런 영화를 만든 것 같다.

언제부터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나?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했다. 부모님이 맞벌이여서 집에서 동생을 돌보며 텔레비전으로 영화와 친숙해졌다. 방학 때 하루에 서너 편씩 비디오를 빌려봤다. 저런 삶도 있구나, 나도 괜찮구나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다. 장래희망에 써서 낸 건 중학교 3학년부터였다.

영향을 받은 감독이나 작품이 있나?
너무 많다(웃음). 제일 많이 언급하는 건 일본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다. 그분의 영화 〈아무도 모른다〉를 보고 용기를 얻었다. 너도 너만의 방법과 호흡과 리듬으로 영화를 만들어봐. 이렇게 응원해주는 느낌이었다. 그분 영화에서는 아이들이 무리하지 않는다. 그냥 살아 있는 사람처럼 움직인다. 사람들에 대해서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시선도 너무 좋다. 어떻게 하면 삶에 대해, 인간에 대해 저런 통찰을 담아낼 수 있을지 자극을 많이 받는다.

‘한국의 고레에다 히로카즈’라고 불린다.
그분께 민폐라 부끄럽다. 나 자신이 그분의 빅 팬이다. 그런 카피는 결코 나의 뜻이 아니라고 매번 변명한다(웃음). 정말 존경하는 감독이고, 방식이나 태도를 닮고 싶어 하는 건 사실이다.

스태프 성비가 비슷하다고 들었다.
균등하게 맞추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상업 현장에 남자들이 많긴 하다. 연출부 생활을 할 때도 나 빼고 다 남자였다. 나는 어떤 쪽으로든 치우치면 불안하더라. 작업할 때 스태프의 의견을 많이 묻는 편이어서 남자·여자의 생각을 고루 듣는 편이 유리하다. 관객들은 섞여 있지 않나.

어떤 영화를 만들고 싶나?
이 사회를 다시 살아볼 만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이야기, 자기 안에서 기적을 만드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내가 여자니까 여성적인 관점에서 생각하게 된다. 왜 자꾸 여자를 주인공으로 하느냐고 묻는 분들도 있는데 내가 여자라서 아는 감정이라 그렇다.

앞으로 계획은?
다음 작품은 잘 모르겠다. 자꾸 생각이 바뀐다. 소녀들 이야기는 멈추고 싶지 않다. 10대든 20대든 소녀들, 아가씨들, 여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들이 자기 삶에서 주체가 되고 용기를 얻는, ‘괜찮아, 살아볼 만해’라고 생각하게 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 〈매드 맥스〉를 보면서 그 생각을 많이 했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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