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시커먼스’ 콤비가 있었다. 코미디언 이봉원과 장두석이 얼굴에 검정 칠을 하고 박자에 맞춰 ‘말장난’ 개그를 선보였다. 올림픽을 앞두고 인종차별을 이유로 코너가 폐지됐다. 그로부터 10여 년 뒤 〈개그콘서트(개콘)〉가 공개 코미디의 시대를 열었다. 간판 코너는 ‘사바나의 아침’. 연기자들은 아프리카 원주민 복장을 하고 의미를 알 수 없는 주문을 외거나 ‘미개함’을 강조하는 소재로 웃음을 만들었다. 그 후로도 비슷한 포맷의 프로그램에서 이주노동자는 자주 어눌한 말투로 등장했고 지적장애인은 ‘바보’로, 비만인 사람은 ‘돼지’로 불렸다. 그러니까, 최근 〈코미디 빅리그〉에서 논란이 된 장면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사고’가 아니다. 다만 ‘문제적 인물’ 장동민의 귀환이라는 점에서 더 주목받았을 뿐이다.

4월7일 방영된 tvN 〈코미디 빅리그〉의 코너 ‘충청도의 힘’이 한부모 가정 비하 논란으로 방영 1회 만에 폐지됐다. ‘애늙은이’ 캐릭터로 등장한 장동민의 발언이 문제가 됐다. 친구가 장난감을 자랑하자 “쟤네 아버지가 양육비 보냈나 보네” “선물을 양쪽에서 받잖여. 재테크여”라고 말한 데 이어, 할머니로 출연한 황제성은 “너는 엄마 집으로 가냐, 아빠 집으로 가냐” “아버지가 서울서 두 집 살림 차렸다는데” 따위의 말을 내뱉었다. 할머니가 손자의 성기를 만지는 내용 역시 아동 성추행을 희화화하는 장면으로 비판받았다. 방송 후 논란이 커지자 제작진은 사과하고 코너를 폐지했다. 한부모 가정 권익단체가 출연진과 제작진을 고소했다가 취하하기도 했다.

ⓒtvN <코미디빅리그> 갈무리장동민(위)의 한부모 가정 비하 발언으로 ‘충청도의 힘’ 코너(왼쪽)가 폐지되고 제작진이 사과했다.

그날 방송에서 문제가 된 건 ‘충청도의 힘’뿐만이 아니다. ‘시그날’에 출연한 김영희는 드라마 〈시그널〉의 김혜수를 흉내 내며 큰 가슴을 강조했다. “차수현 형사, 지금도 가슴에 집착하고 사나요”라고 했는가 하면, 가수 문희준을 지목해서는 “살이 쪄서 인기가 죽고 말았다”는 식의 발언도 이어갔다. 한국여성민우회는 프로그램 방영 후 ‘외모·지역·외국인·노인·여성 등에 대한 비하와 차별은 〈코미디 빅리그〉에 자주 등장하는 개그의 소재’라는 점을 지적하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비하와 희화화를 멈추라’고 비판했다.

혐오 발언(hate speech)은 ‘국적, 인종, 성, 종교, 성 정체성, 정치적 견해, 사회적 위치, 외모 등에 대해 의도적으로 폄하하는 발언’이다. 한국의 개그 프로그램은 혐오 발언을 먹고 산다. 손쉽게 웃음을 양산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17년차 장수 프로그램인 KBS 〈개콘〉도 마찬가지다. 그간 세태 풍자를 통해 시류를 잘 꼬집은 코너도 있었지만 여성·장애인 비하 등으로 끊임없이 논란이 됐다. 지난 2월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이 공개한 ‘2015 대중매체 양성평등 모니터링 사업’ 결과 보고서에서 〈개콘〉은 대표적인 성차별 프로그램으로 꼽혔다.

ⓒ연합뉴스장동민(위)의 한부모 가정 비하 발언으로 ‘충청도의 힘’ 코너가 폐지되고 제작진이 사과했다.

지난해 폐지된 ‘사둥이는 아빠 딸’ 코너(아래 사진)가 대표적이다. 아빠가 아이들에게 새해 목표를 묻자, 한 아이가 “난 김치 먹는 데 성공해서 김치녀가 될 거야”라고 답한 데 이어 “오빠 나 명품백 사줘. 신상으로. 아님 신상 구두”라고 말했다. 최근까지도 ‘모태 솔로’ 여성을 무에다 비교하고(무매력이라서) 강판에 무 가는 행위를 성형수술에 비유하는 등 외모 비하와 관련된 아이템을 지속적으로 내보내고 있다. 대중문화 평론가인 강명석 〈아이즈〉 편집장은 지난해 한 칼럼에서 “(〈개콘〉에) 개그우먼은 많지만 여자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는 코너는 없다. 대신 남자들이 바라보는 여자만 있다”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 밖에도 차별과 관련된 소재는 다양하다. 2012년 〈개콘〉 ‘체포왕’은 지적장애인을 ‘동네 바보’로 호명하고 괴롭히는 장면을 내보내,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가 코너 중단을 요구하기도 했다. 2014년 tvN 〈SNL 코리아〉는 ‘지금 만나러 갑니다. 제이슨 두영 앤더슨’에서 해외 입양아의 서툰 한국어를 강조해 이들을 희화화했다는 비판에 직면했다.

“강자 조롱은 배운 적이 없으니…”

유독 개그 프로그램에서 노골적인 차별 발언이 자주 등장하는 까닭은 뭘까. 코미디의 속성 자체가 무언가를 대상화하고, ‘가지고 놀면서’ 웃음을 만드는 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잘되면 권력이나 다수의 모순을 비판하는 ‘사이다’가 되지만, 더러 약한 대상을 우스꽝스럽게 만드는 ‘쉬운 선택’으로 불편함을 주기도 한다. 시청률을 올릴 수 있다면 뭐든 허락되는 경쟁적인 분위기도 한몫 거든다. 장동민 역시 지난해 논란이 됐던 여성 혐오 발언에 대해 사과할 당시 “웃음만 생각하다 보니 발언이 세졌고 자극적인 소재, 격한 단어를 쓰게 됐다”라고 말했다. SBS 〈웃음을 찾는 사람들〉의 안철호 PD는 한 인터뷰를 통해 제일 쉬운 개그가 외모 비하라고 밝히며 이런 개그가 ‘개운하지 않은 웃음’을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서천석 소아정신과 의사는 이번 논란에 대해, 개그맨들이 이런 방식 외에는 개그를 배워본 적이 없어서가 아닐까 짐작했다. 그는 “강자를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 힘은 세지만 비합리적인 무언가를 드러내 웃음을 유발하는 것은 선배들도 못 해봤으니 배운 적이 없지 않은가 싶다”라고 트위터를 통해 밝혔다.

사회적 약자를 조롱하는 분위기는 방송에서만 목격되는 게 아니다. 지난해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인터넷상의 차별·비하 등 혐오 표현에 대해 시정을 요구한 건수가 총 833건으로, 전년 동기 대비 약 20% 증가했다고 밝혔다. 혐오 발언이 두드러졌던 최근 한국 사회의 풍경을 반영한 수치다. 전규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19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소수자에 대한 감수성이나 문화 다양성이 사회적 통념으로 자리 잡으려는 기조가 있었다. 어느 순간 약자가 조롱의 대상으로 위치하게 됐고 그게 사회적으로 비난받지 않는 구조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세월호 참사 이후 대놓고 유가족을 조롱하던 분위기를 그 기점으로 삼았다. “세월호 사고는 재난이기도 하지만 한국 사회 내 소수자·약자가 존중과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차별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했던 분기점이기도 하다. 소수자가 종북으로 엮이고 비국민으로 치부되는 사회 분위기 등이 제작진들의 심리를 자극하고 제작에도 영향을 미쳐 결과적으로 ‘생각 없음’의 형태로 나타난 것 같다.”

ⓒKBS <개그콘서트> 갈무리개그 프로그램에는 여자 이야기가 없고 남자들이 바라보는 여자만 있다.

이번 논란과 관련해 제작진을 향한 질타가 적지 않다. 〈코미디 빅리그〉 측 역시 ‘모든 건 제작진의 잘못이며 제작진을 믿고 연기에 임한 연기자에게도 사과의 말을 전한다’라고 전했다. 지난해 〈개콘〉의 여성 비하 문제를 지적했던 전병헌 국회의원은 “개그맨들이 개그를 만들어낸다지만 결국 이를 검수하고 채택하는 것은 제작진”이라며 이들의 문제의식을 비판하기도 했다. 방송사별로 비하·차별적 소재를 지양하도록 하는 ‘예능 프로그램 제작 가이드라인’을 마련해두고 있지만 말 그대로 가이드라인에 머물 뿐이다. 제작진의 각성만 요구할 문제가 아니라는 의견도 있다. 전규찬 교수는 “우리 무의식의 문제다. 아프리카계 원주민 분장을 하고 나오는 자체가 인종차별이라는 걸 감수성 있게 보지 못한다. 비하하거나 놀리는 것만 문제라고 본다. 연기자·제작자·심의기구·언론 모두 노골적인 사례만 가지고 말하니까 함정에 빠진다. 저들의 문제지, 내가 문제라고는 생각 못하는 거다. 그걸 드러내려면 고도로 예민한 언어가 나와야 하는데 그런 비평의 문화가 아직 없다”라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시커먼스’와 ‘사바나의 아침’을 보며 웃던 데서 얼마나 멀리 왔는지 시청자인 우리에게 묻고 있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