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장면. 지난 5월18일 국회 앞에 어버이연합을 비롯한 보수 단체 회원들이 모였다. 그들은 이석기, 김재연, 이상규 등 통합진보당 19대 국회의원 당선자들의 사진이 인쇄된 현수막을 바닥에 넓게 깔았다. 곧 이어 통진당의 부정 경선 의혹과 당권파의 폭력 사태를 규탄하더니 문제의 현수막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이 SNS에 빠르게 전파됐다. 통진당 옛 당권파에 의해 자행된 일련의 패악질에 분노를 느끼던 많은 사람들이, 어버이연합의 퍼포먼스가 담긴 이 한 장의 사진을 보며 복잡한 심정을 공유했다. 우익 테러리즘 동호회 정도로 생각했던 어버이연합의 생각에 일정 부분 동의하게 되는 날이 오다니.
진영 안의 나쁜 것들을 감추는 진영 논리
이 두 가지 장면은 진영 논리가 설명해내지 못하는 현실의 어느 명백한 순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우리는 이 장면들에서 “세월이 하 수상하다보니 진영이 혼탁해졌다”라는 탄식이 아니라, 애초 진영이라는 이름으로 나뉘지 말았어야 할 것들을 편리하게 ‘우리 편’으로 구분지은 진영 논리의 둔탁함을 깨달을 수 있다. 얼마 전 “〈조선일보〉만 반대로 읽으면 길이 있다”라는 말을 들었다. 마찬가지다. 〈조선일보〉가 불온한 의제 설정으로 스스로를 살찌우고 역사를 유린해왔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진영은 그리 쉽게 나뉘지 않고 진실에는 결이 너무 많아 각도마다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게 그것이지 않나. 일관되게 나쁜 것은 없고 일관되게 정의로운 것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진영이 왜 생기는가. 서로 옳다고 믿는 것이 있기에 편이 만들어진다. 그러나 한국의 보수 세력과 달리 진보·민주 세력은 꽤 오랜 세월 국가 차원의 박해를 받아왔고, 그런 외부의 억압 안에서 보수 세력에 비해 훨씬 더 강력한 진영 논리를 생성해냈다. ‘남보다 더 정의로운’ 진영 논리는 쉽게 ‘가치’가 아닌 ‘진영’ 자체를 위해 종사하게 된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이라도 동원될 수 있다. 이를테면 국회에서 최루탄을 터뜨리고도 열사처럼 주장할 수 있다. 그렇게 진영 논리는 진영 안의 너무 많은 나쁜 것들을 호기롭게 감추어버린다.
나는 한국 정치의 후진성이, 보수가 유능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진보의 무능으로부터 기인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진보의 무능을 야기하는 절대적 요인으로 이 진영 논리와 팬덤 정치를 꼽겠다. 당위로 점철된 과도한 진영 논리가 쉽게 아이콘과 결합하고, 끝내 팬덤 정치로 이어진다. 이명박 정권을 통과하는 동안 시민들 사이에 공유된 뜨거움을 기민하게 선점했던 것이 바로 ‘나꼼수’로 대변되는 팬덤의 정의였다. 그 정의가 결국 우리를 어디로 이끌었나. 고작 이명박 정권에 반대하는 것이 전부인, 철학과 원칙이 부재하는 열광이 끝내 가닿은 곳이 어딘가.
앞서 언급한 〈시빌 워〉에서 싸움은 캡틴 아메리카의 항복으로 막을 내린다. 캡틴은 이 진영 다툼이 더 이상 그들이 애초 지키고자 했던 가치들과 관련이 없어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아이언맨에게 투항한다. 한국의 진보 세력은 어떤가. 이제라도 낡은 진영 논리를 폐기하고, 진보적인 가치관의 본령을 회복하는 가운데 거듭나야만 한다.
그간 이 지면에서 오랜 시간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혹시라도 상처받은 분이 있다면 사과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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