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마전, 복마전 말만 했지 사실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손수조 나오고 문대성 나오고, 박근혜는 개혁 공천 이슈 파이팅에 이제 와서 뜬금없이 색깔론 드립 중이고. 무엇보다 나는 ‘경기동부’ 이야기가 이정희를 경유해 무려 관악을에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경기동부라는 말이 공중파 뉴스에 등장하는 걸 보니 정말 괴상한 세월이긴 하다는 생각이 든다. 원래 술자리에서나 언급되는 말이었지 이렇게까지 스캔들처럼 오르내릴 건 아니었다. NL에서 주사파와 자주파를 거쳐 경기동부에 이르기까지. 그 명맥과 실체는 분명 존재한다. 다만 그것을 두고 고정간첩이라도 색출한 양 열을 올릴 문제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어느 정당에나 크고 작은 당내 조직이 존재한다. 경기동부도 그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보수 언론은 이 와중에 통합진보당을 끊임없이 ‘진보당’으로 호출하는 중이다. 보수 매체에서 경기동부와 관련해 통합진보당을 진보당으로 표기하는 이유를 읽는 데는 별다른 통찰이 필요하지 않다. 이 마당에 진보신당까지 싸잡아 프레임 메이킹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닌가.


그들은 종북과 진보를 같은 맥락으로 언급해야 자기 정체성을 보장받는다. 진보신당이 애초 왜 민주노동당에서 빠져나왔나. 본분과 본령을 잃지 않는 한 진보는 어떤 맥락을 가져오더라도 세습과 독재를 인정할 수 없다. 진보신당은 그래서 갈라져 나왔다.

진영을 가리지 않는 포퓰리즘과 뻥카드, 지사 코스프레의 소용돌이 안에서 나는 문득 대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고심 중이다. 그 한계를 명백히 알면서도 절충된 구호에 만족해야 하나, 혹은 당선 가능성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실제 내 의견과 계급 정체성을 대변하는 정당을 지지해야 하나. 혹시라도 내 의견이 죽은 표가 되지는 않을까, 전전긍긍 노심초사. 나는 이즈음이면 언제나 회귀하는 ‘닥치고 연대’의 분위기가 익숙하면서도 또한 이해 불가라 불편하기 짝이 없다.

문득 마이클 니콜스의 〈프라이머리 컬러스〉를 떠올렸다. 대선을 앞둔 민주당 경선이 배경이다. 영화의 중심에는 클린턴 부부를 모티브로 삼은 후보가 있다. 다소 경박한 면이 있지만 개혁 성향의 똑똑한 정치인이다. 주인공은 그 주자의 선거운동에 이제 막 동참한 지식인이다. 그는 애초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에 강박적으로 헌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갑자기 이 유사 클린턴에 탐닉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정도만 고집하지 않는 사람과 일한다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합니다. (중략) 함께 역사의 주인공이 되고 싶습니다.”

기회를 잡아야 권력을 얻는다고?

영화가 진행되면서 주인공은 주군으로 모신 대선 주자의 온갖 성추문과 더러운 실체를 목격한다. 참다못해 급기야 떠나겠다고 선언한다. 그러자 대선 주자가 말한다. “여태 겪어봤으니 알 거 아니야. 야, 링컨이 대통령 되기 전에도 훌륭했겠니? 아마 자기를 알리기 위해 촌스러운 미소를 날리며 다녔을걸? 기회를 잡아야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거잖아. 생각해봐. 정치인들 대다수가 영혼을 팔고 국민을 분열시키고 이용해. 그 가운데 당선 확률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 생각해보라고. 누가 나만큼 서민들을 염려하지?”

이상을 이루기 위해 절충된 현실을 선택하는 행동은 언뜻 실용적으로 보인다. 아니, 실제로 실용적이다. 문제는 그렇게 실현된 성공이 이상으로 이어질 수 있느냐는 것이다. 역사를 돌아볼 때, 절충의 과정에서 반영된 이해관계들에 의해 애초의 숭고한 목적은 번번이 좌절되었다. 우리의 이상은 정권 교체인가, 혹은 더 나은 세상인가. 정권 교체만으로 더 나은 세상은 이룩되는가. 다시 한번, 우리는 무엇을 믿어야 할 것인가. 이 처연한 질문의 두께는 날마다 두꺼워지고, 나는 갈수록 말을 잇기가 조심스럽다.

기자명 허지웅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