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영주 감독이 ‘미미 여사’를 만난 건 2005년, 경주에 가는 차 안에서였다.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두 번째 장편영화 〈발레 교습소〉가 ‘망한’ 뒤였다. 개봉 직후 입대한 배우 윤계상이 GP에 근무할 당시 틈틈이 쓴 편지 스무 장을 보내왔다.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영화를 제작한 신혜은 PD와 반성의 여행을 했다. 그 길에 동행한 책이 미미 여사의 〈이유〉였다. 경주에 내린 뒤 〈모방범〉 〈화차〉를 마저 사서 단숨에 읽어내려 갔다.

그리고 7년 뒤인 지난 2월21일. 변 감독은 도쿄에서 미미 여사, 미야베 미유키를 직접 만났다. 이번에는 역으로 자신의 작품을 건넸다. 일본어 자막을 넣은 DVD엔 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화차〉가 담겨 있었다. 변 감독의 어깨에 닿을 듯 말 듯 작은 키의 작가는 ‘DVD를 빨리 보려면 오늘은 택시를 타야겠다’고 했다. 전철을 타는 ‘보통 사람’에게서 작품의 영감을 얻는 미미 여사는 일본의 유명 작가 미야베 미유키의 한국식 별명이다.

ⓒ시사IN 윤무영변영주 감독(위)은 〈화차〉에 대해 “괴물 같은 세계에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을 재미있게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화차〉는 갑자기 사라진 약혼녀에 대한 얘기다. 알고 보니 신분이 가짜였던 여자, 신분을 위조하기 위해 벌인 그녀의 과거 행적을 추적해가는 내용이다. 카드빚과 사채 등으로 얼룩진 당시 일본 사회의 풍경을 생생한 캐릭터를 통해 구현했다. 원작이 혼마 형사가 먼 친척인 한 남성의 약혼녀를 뒤쫓는 내용이었다면, 영화 〈화차〉는 전직 형사(조성하)에 더해 약혼자(김민희)를 찾아나서는 남자(이선균)를 전면에 내세웠다. 결말도, 시대도 다르다. 7년 만에 영화 개봉을 앞둔 〈화차〉의 변영주 감독을 2월23일 서울 통인동 카페에서 만났다.

첫 시사회 전날, 미야베 미유키를 만났다고 하던데, 원작자의 반응은 어땠나? 처음에는 거의 팬미팅 수준이었다. “나는 당신의 소설을 다 봤다” 이러면서(웃음). 한국에서 미미 여사라고 불린다는 걸 말해주고, 콘티북에 ‘미미 언니’라고 써서 사인을 해줬다. 한국에 오기 직전 이메일을 한 통 받았다. “미미는 감독님에게 감격했다”라고 하더라. 극찬이었다. 행복한 마음으로 기자회견장에 갔다. 이거, 절반은 해낸 거 아냐? 이런 생각이었다. 원작하고 엔딩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책이랑 영화랑 보고 난 뒤의 감성이 일치한다면. 작가도 약혼자 처지에서 쫓는 버전으로 해볼까 하는 생각을 해봤다고 하더라.

그래서 시사회 반응으로 자신감을 가졌나? 영화를 찍은 뒤 반응이 좋은 게 처음이었다(웃음). 고마웠다. 제작비는 16억원밖에 안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안 보이지 않나?

왜 이렇게 오래 걸렸나? 재작년에 탈고하고 (이)선균이가 제일 먼저 하겠다고 했다. 영화를 찍은 지 오래되어서 그런지 투자자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변영주가 이걸 어떻게 찍어? 이런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선균이는 계속 남아 있었다. 그러는 동안 선균이가 거절한 영화가 한두 개 된다. 무슨 생각으로 기다렸나 했더니 자기마저 안 한다고 하면 이 영화 진짜 엎어질 거 같더란다. 배우들이 개런티를 깎아줬고, 나도 신인 감독급으로 받았다. 지난여름에 70일 동안 54회를 찍었다. 지방 이동을 빼곤 매일 촬영을 했다는 말. 영화가 성공한다면 원작의 정서와 스태프와 배우들이 으랏차차했던 분위기 덕분일 거다.

〈화차〉의 어떤 점에 끌렸나? 꼭 일본 소설만 그런 건 아닌데, 이를테면 미국의 척 팰라닉도 그렇고. 괴물 같은 자본주의 시대의 풍경을 장르 문학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게 대단했다. 괴물 같은 세계 안에서 사는 우리의 모습을 재밌게 보여주고 있다. 이건 한국 문학에서 없었던 것 같다. 일본 문학이 가볍다고들 얘기하는데 하나도 가볍지 않다. ‘공산당 선언’처럼 묵직한 문학이 단지 장르의 힘을 빌렸다는 이유로 하찮게 취급받는 느낌이 있다. 어느 날 아는 선배가 〈화차〉의 판권을 사려 한다는 얘기를 듣고 그 사람 주위를 돌기 시작했다.

영화 〈화차〉는 갑자기 사라진 약혼녀를 쫓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1990년대 거품경제 당시 일본 상황을 우리 식으로 표현하기가 어려웠을 텐데. 외환위기가 중산층이 붕괴된 거라면, 거품경제는 ‘소비가 자본주의의 미덕’이라고 여기던 가치가 변한 거다. 우리는 삶의 거세, 저쪽은 욕망의 거세였다. 원작에서 중심이 되는 신용카드 문제 이런 것들도 사실 우리는 다 알지 않나. 전면에 내세우기보다는 지옥도 같은 세상을 사는 이 여자를 관객에게 체험시켜보자, 열심히 살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남자에게 어느 날 닥친 재앙을 보여주자고 맘먹었다.

김민희가 분한 차경선은 원작에서 좀 더 동정적이다. 내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상세하게 그렸다. 너무 불쌍한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려고 했다. 영화가 관객과 통하게 되면, 자연스레 연민을 갖게 되는데, 우리가 그 연민을 더 강조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경선에게 신분을 내주는 선영 캐릭터를 새롭게 살렸다.

배우 김민희의 발견이랄까. 온몸에 피를 뒤집어쓰고 연기하는 장면이 강렬했다.

속옷만 입고 찍는 게 리얼할 것 같았는데 예뻐 보이거나 야해 보이면 어떡하지 하는 우려가 있었다. 그런데 민희씨 본인이 걱정 말라고, 자신은 말라서 기괴해 보일 거라고 했다. 등뼈가 튀어나와 있어서. 사이드 클로즈업 같은 건 내가 찍은 건데, 피에 엉킨 머리카락 사이로 번득이는 눈빛이 좋더라. 원작과도 결말이 다르고, 두 사람이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 공을 많이 들였을 것 같다. 서울 용산역에서 찍었는데, 백화점과 역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곳이라 비용과 환경 측면에서 애를 먹었다. 촬영 당시 두 사람이 마침내 재회하는 장면에서 두 배우에게 정답을 안 줬다. 문호(이선균)가 “잘 지냈냐”라고 애드리브를 하는데 모니터 보다가 감탄했다. 경선(김민희)이 “행복하고 싶었다. 행복할 줄 알았다”라고 말하며 사랑했냐는 말에 울면서 고개를 젓는데, ‘얘네 미쳤구나’ 했다. 경선의 마지막 신, 용산이 배경이다. 그곳이 얼마나 비정한 곳인지 사람들은 알 거다.

흥행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겠다. 왜 없겠나. 베갯잇을 눈물로 지새운 밤이 셀 수 없다(웃음). 고생한 배우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이 영화를 통해서 나보다 더 좋은 감독을 만나게 하는 것. 나름 괜찮은 뚜쟁이다. 임권택 감독이 시사회를 보고 ‘이선균이 누구냐’고 묻더라. 최근 본 남자 배우 중 최고라고.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게 두 번째다. 보통 소설 쪽에서 아이디어를 얻나? 언제나 문학은 당대의 메인 플롯을 잘 만드는 것 같다. 〈화차〉를 약혼자 버전으로 바꾸니까 주위에서 이렇게 갈 건데 판권을 꼭 사야 돼? 이러더라. 그래서 내가 웃기지 말라고 했다. 메인 플롯이야말로 진정한 판권의 의미다.

변 감독을 임순례 감독이랑 헷갈려하는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그렇다. 옛날에는 왜 그럴까 했는데, 요즘은 누가 나더러 우생순(〈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좋았다고 하면, 내가 그거 만들었지만 별로라고 답한다(웃음). 작품 활동 안 하는 동안 재능교육 노조나 쌍용차 노조, 영화인 희망버스 등에서 이름을 봤다. 촬영 때 (송)경동이 때문에 너무너무 죄송스러웠다. 희망버스를 막 할 때 촬영 중이라 연락이 와도 못 가봤다. 감독은 촬영할 때가 제일 호화롭게 사는데 침대에서 못 자겠더라. 죄책감이 들어 바닥에서 잤다. 부산영화제 때 보러 가서 행복했다. 3월에는 부산에서 시사회 열어 (김)진숙 언니도 보여주려고 한다. 문재인이건 안철수건 누구건 쌍용차와 재능교육을 비롯한 비정규직 문제에 관심을 갖고 텐트에 오는 사람을 지지할 거다. 우리 세대가 지금의 20대들에게 해줄 수 있는 첫 번째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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