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한테 참 좋은데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네.’ 히트한 건강보조 식품의 카피처럼, 참 재밌는데 보지 않은 사람에게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자기 객관화에 능한 윤성호 감독의 소감을 빌리자면, ‘제목에 구하라가 들어가지만 구하라는 나오지 않는, 빵빵 터지기보다는 깨알같이 웃기고 감독 전작을 본 처지에선 동어반복에 재주의 바닥을 드러내는 것 같지만 익명의 대중 처지에선 신선한’. MBC에브리원의 버라이어티 연예 시트콤 〈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구하라〉)이다.

프랑스 격언 중 같은 말이 있다지만, 감독이 실제 아이돌 걸그룹 ‘카라’의 멤버 구하라의 팬이라는 게 더 설득력 있다. 〈은하해방전선〉 〈도약선생〉 등 독립영화를 만든 윤성호 감독의 방송 데뷔작이다. 제목은 2010년 인터넷에 방영했던 동명의 인디 시트콤에서 따왔다. 당시에는 5분 정도의 짧은 시트콤 10회 분량이었다. 일도 사랑도 제대로 되지 않는 매니저와 지인들의 이야기다. 독립영화에서는 좀처럼 넘을 수 없는 1만 관객을 목표로 그저 ‘재밌자고’ 만들었다.

그런데 팟캐스트로 뜬 인물을 공중파 개그맨이 패러디하는 세상이 되었다. 케이블 방송사가 인디 시트콤에 노크를 했다. 분량은 회당 30분으로 늘었다. 


ⓒ시사IN 조남진〈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 주역들이 모였다. 왼쪽부터 전영록 역의 혁권, 구 대표 역의 박희본, 연출을 맡은 윤성호 감독.

일단은, 연예기획사의 이야기다. 성남의 한 해병대 컨테이너 건물에 세든 ‘희 엔터테인먼트’의 대표 구희본(33세지만 의상은 50대다), 약수터에서 속옷 차림으로 ‘사자자세’를 가르치며 연기의 도를 깨우치려는 연기 코치 전영록, 회사 비품 빼돌리는 걸로 적은 급여를 메우는 인턴 직원과 별 볼일 없는 배우들. 유망주였던 신인까지 소속사를 떠나고 망하기 직전, 가까스로 중견 배우 김성령이 합류해 ‘이기광 같은 아이돌’을 상대 배역으로 요구하며 새 국면을 맞는다.

〈구하라〉의 유머는 이런 식이다. 원래 구 대표가 직원으로 있던 기획사 사무실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었다. 기획사 대표와 배우의 연애, 석연찮은 주식 상장, 카지노에 드나드는 임원들…. 이를 지켜보던 그는 투명하게 운영되는 기획사를 직접 차리기로 한다. 그래도 강남을 떠날 수는 없었다. 기획사에게 강남은 축구 선수들의 프리미어 같은 곳. 그렇다면 분데스리가는 어떨까. 차두리도 있고 뛸 만한 곳. 그래서 분당(옆의 성남)을 택했다. iPad(아이패드)를 패러디한 iSad(아이새드), 인생에서 돈은 ‘기껏해야’ 80%라며 위안하는 역설, 카메오로 출연한 변영주 감독에게 임순례 감독님이라고 말하는 오디션 지망생. 우연과 무질서의 유머가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그렇다고 모든 게 우연적인 것은 아니다. 현실의 풍자는 의도된 바다. 대표적인 게 오디션 프로그램이 나오는 2회. 우후죽순 쏟아지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패러디했다. 특별한 인상을 주지 못한 참가자가 멀쩡한 부모의 기구하고 힘든 사연을 쥐어짜려다가 잘 안 되자, 시력이 마이너스인 언니라도 이용해보려는 심산이 웃음을 유발한다.

매니저의 기쁨을 로또에 비유하는 장면도 있다. 안될 것 같은 배우를 안될 것 같은 영화에 출연시켰는데 영화가 대박이라는 예감이 들 때. “로또 맞은 기분. 아니 그건 너무 운이니까 펀드, 그건 또 너무 위험한 것 같기도 하고. 이자율 높은 저축은행? 요즘 저축은행은 또 그러니까 국민연금? 너무 오래 걸리는구나.” 구 대표는 결국 동네 계를 탄 느낌으로 타협을 본다. 이 밖에도 대부업 광고만 전문으로 하는 배우들의 연합체도 등장한다.

〈구하라〉의 중심인물이 되는 구 대표(박희본), 김성령(김성령), 전영록(혁권). 세 인물 중 박희본과 혁권은 뮤즈이자 페르소나다. 각각 10년간 8편, 3년간 5편을 함께 찍었다. 공생 관계지만 혈맹은 아니라는 세 사람. 감독은 언제든 배역 제의를 거절당할 각오로 ‘두근두근’하며 시나리오를 내민다. 두 배우는 다른 작품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안 되더라도 막상 제안이 안 오면 슬며시 궁금해진다. 영화는 거절해도 되지만 놀자는 걸 피하면 정말 상처받을 것 같다는 세 사람을 2월15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만났다. 첫 방영이 있던 2월4일 토요일 밤, 서울 을지로 호프집에서 노가리를 먹으며 스태프와 함께 본 뒤 열흘 만이었다. 첫 반응은 좋았다. 이들을 각각 1인칭으로 재구성했다.


 개그맨 박성광 닮은 윤성호 감독

애초엔 연예 기획사가 아니라 카페를 생각했다. 배우 김성령에게서 착안했다. 나이 든 배우하고만 상대역을 하는 데 지쳐 은퇴하고 가로수길로 유명한 신사동에 카페를 차렸는데 알고 보니 은평구 신사동이었다는 콘셉트. 장사가 안 되고, 폐업 위기에서 자구책으로 생각한 게 ‘한 지붕 세 커피’. 구수한 믹스 커피, 훈남이 제공하는 ‘홍대 앞’스러운 커피, 벤처 재벌의 프랜차이즈, 한 카페에서 세 종류의 커피를 팔며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루려고 했다. 그런데 촬영 장소로 생각해둔 카페가 ‘너무 정직하게 운영을 해서’ 문을 닫았다. 그래서 바꿨다.

독립영화나 인디 시트콤을 만들 때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회당 원고지 매수, 자막 위치, 고유명사 금지 등 경험하지 못한 제약이 있었다. 독립영화는 내 안의 완성도가 중요하다면 이번 작업은 방영되는 ‘채널’을 고민했다. 지난해 봄에 제안을 받고 10월, 11월 두 달간 22회를 촬영했다. 한 편당 3000만원의 제작비가 들었다. 그래도 시청률은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해서 고마웠다.

원래, 시의성 있는 농담을 다른 채널을 통해 소비하고 싶은 욕구가 있다. 영화를 만드는 틈틈이 글을 쓰듯이 앞으로도 병행하고 싶다. 아쉬움은, 사전 제작을 하는 까닭에 요즘 깨알같이 쏟아지는 소재를 활용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후작업인 자막을 통해 해소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새누리당의 ‘비대위’를 자막으로 패러디했다.

〈구하라〉의 ‘아빠는 〈오피스(the office)〉, 엄마는 〈은하해방전선〉, 존경하는 삼촌은 (〈하이킥〉 시리즈의) 김병욱, 친애하는 이모는 (막돼먹은) 영애씨’다. 특히 미국 드라마 〈오피스〉에 대한 오마주가 강해서 배우들이 연기를 펼치는 중간 이 드라마에서처럼 다큐멘터리식 인터뷰를 넣었다.

인디 시트콤을 찍을 때 베테랑 촬영감독과 녹음기사가 배우 박희본을 보고 보석 같다는 말을 했다. 대사가 쏙쏙 들어온다고. 나야 고마웠다. 규모 있는 작품을 해봤을 텐데, 음식으로 치면 궁중 음식 먹어보던 사람이 내 작품을 한다니. 이후 내 장편 〈도약선생〉에도 출연했다. 혁권 형은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서 구상 단계부터 당연히 염두에 두고 썼다.

요즘은 〈K팝스타〉 보아의 이상한 여유가 끌린다. 적요한 느낌. 〈접속〉의 전도연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연기를 제안하고 싶다. 제목은 ‘볼 수 있는 자가 보아라’. 인터뷰가 끝나고 준비 중인 장편영화 시나리오를 쓰러 가야 하지만, 누가 쏜다면 거기로 가겠다.


 배우 허이재와 닮은 박희본

‘Come to me. 모르겠니 너를 향한 내 맘.’ 양 갈래로 머리를 묶고 춤을 추던 아이돌 그룹 ‘밀크’의 박재영으로 활동했다. 앞구르기와 뒤구르기 점수로 전교 1등을 하던 학창시절, 길거리 캐스팅으로 열아홉 살에 데뷔했다. ‘소녀시대’ 티파니·태연과 한방을 썼다. 요즘엔 어릴 때부터 지켜봤던 보아가 나오는 오디션 프로그램을 즐겨 본다.

윤성호 감독과는 스물한 살에 처음 만났다. 단편에 잠깐 출연했던 게 전부였는데 SM을 나오고도 한참이 지난 2010년 인디 시트콤 때문에 다시 연락이 왔다. 당시 폐에 물이 차고 몸이 아파서 힘들었지만 배역에 욕심이 났다. 홍어를 좋아하는 카페 아르바이트생으로 나왔다. 세 사람이 잘 가는 ‘목포집’이라는 홍어집이 있다. 사는 건 감독님이지만 계산은 혁권 선배가 한다.

처음 대본을 받고 어떻게 이런 시트콤이 있나 싶었다. 배우가 아니라 시청자가 되어서도 만족할 만한 작품이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구 대표와 닮은 점이 많다. 대형 기획사에서 산전수전 다 겪고 꿈을 키워왔던 개인사가 있기 때문이다. 구 대표가 자영업의 길을 걷는 것처럼 나도 SM으로부터 자립했으니까.

의상은 정당 정치인을 참고로 했다. 감독님은 처음에 나경원 의원 복장을 주문했는데 고모의 조언으로 좀 더 올드해졌다. 박근혜 대표 머리 모양을 따라 했고 ‘일수 가방’을 손에 들었다. 구 대표도 일단은 대표니까.


ⓒMBC 제공〈할 수 있는 자가 구하라〉의 한 장면. ‘스타 셰프’의 허상을 꼬집는 에피소드다.

주연이 처음은 아니다. 2006년 〈빌리진 날 봐요〉 시트콤에 출연했다. 너무 하고 싶어서 무작정 시켜달라고 작가 집 앞에 진을 쳤다. 막상 시작하니, 당시엔 연기 신인인데 분량이 너무 많았다. 눈치도 많이 보고 위축된 채로 촬영을 마쳤다. 이번 팀은 여러 번 작업한 경험이 있어서 익숙했다. 극중 애드리브로 ‘내가 걸그룹 해봐서 아는데 하지 말라’는 대사가 나온다. 그래서 오해받기도 했는데, 구 대표가 과거 걸그룹 매니저를 했다는 의미다. 개인적으로 그룹 시절의 경험이 큰 자양분이 됐다.

〈돼지의 왕〉 더빙 작업 등을 지난해에 했다. 왜 독립영화만 하냐는 질문도 하는데 이해가 안 간다. 황정민 같은 선배한테는 왜 대중배우 하냐고 안 물어보잖나. 구분이 없고 해서 잘할 수 있는 거, 재밌어 보이는 거 한다. 이번 작품으로 연기자로서 자존감을 찾은 것 같다. ‘밀크’ 출신이라는 꼬리표 떼고 구 대표를 연기했던 사람으로 기회를 더 많이 주지 않을까.


 아무도 안 닮은 혁권

윤성호 감독과의 첫 인연은 2001년, 윤 감독이 단편영화를 찍을 때였다. 얼마 전 엠넷에서 ‘UV 신드롬’을 찍은 박준수 PD와 윤 감독이 대학생이던 시절, 인터넷으로 배우를 모집했다. 연극을 할 때였는데 나는 지원자 중 몇 안 되는 전문 연기자였다. 26년간 여자와 자본 경험이 없는 역이었는데, 나는 안 그래 보인다며 대신 엑스트라로 서달라고 했다. 흔쾌히 오케이했다. 내가 살면서 봐왔던 시나리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기 때문이다. 이후 술친구가 됐다. 〈동북아 정세와 미국의 영향〉 따위 책을 끼고 다니니까 윤성호 감독이 좀 다르게 봤다.

감독치고는 좀 유명한 감독이고 배우치곤 좀 무명한 배우이고 그게 잘 맞았다. 이번 시트콤에서 전영록 역을 할 때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에서 정인지 역도 같이 하고 있었다. 드라마 촬영으로 밤을 꼬박 새우고 다시 〈구하라〉 촬영장에 간 적도 있다. 식욕보다 수면욕이 앞선다는 걸 그때 알았다. 어떤 날은 촬영을 못 나가서 체구가 비슷한 스태프가 내 흉내를 대신 내기도 했다. 캐릭터 자체가 기인이어서 머리끝까지 잠기는 후드 지프업(상의)을 입고 대신 연기했다.

지난해에는 닥치는 대로 일을 했다. 〈드림하이〉에서 수지 아빠 역도 했고, 〈뿌리 깊은 나무〉도 그렇고. 이사를 해야 해서. 광고도 들어왔는데 개인적으로 불매하는 기업 중 하나라서 거절했다. 지금은 후회한다(웃음). 연극에서 시작해 〈시실리 2km〉 등의 영화, 드라마까지 오는 동안 윤성호 감독과는 꾸준히 작업했다.

잘나가는 연기자 중에 보수적인 사람이 많다. 보수적인 건 괜찮지만 비합리적인 기득권이 좀 있다. 연기를 하려면 객관적인 성향이 필요한데 잘 이해가 안 된다. 나이는 비밀이다. 94학번이라는 것만 써달라. JTBC에서 곧 새 드라마가 방영될 예정이다. 궁극적으로 매너 양성기관과, 눈치학교를 세우려는 꿈이 있다. 이 바닥에 있어서 보니까 매너 없고 눈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눈치학교 교장이 되고 싶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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