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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불쑥, 시가 찾아왔다

각양각색의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다. ‘누가 시를 읽는가.’ 대화의 주제였다. ‘시 덕후’인 이들은 누군가의 말에 금세 눈물이 고였으며 고개를 잘 끄덕였다. 시를 읽는 스무 명의 이야기.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2019년 05월 02일 목요일 제60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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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복희 시인의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었다. 추운 날씨, 버스 정류장에서 20분을 기다려야 했던 시인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이제 희망에 대해 말해버릴 거야.” 이 이야기를 듣던 스무 명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시가 언어 습관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말을 하던 중이었다. 웃지 못한 건 ‘시알못(시를 알지 못하는 사람)’인 기자 한 명뿐인 것 같았다. 그 말을 이해하기까지 이후로도 몇 번의 질문을 던져야 했다. 기형도 시인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 첫 구절(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을 인용한 문자였다. 역시 시를 공부하는 시인의 친구는, 그런 개그를 하다간 사람들이 놀아주지 않을 거라고 응수했다. 4월14일 일요일 저녁, ‘농담이 통하는’ 사람들이 서울 혜화동 동양서림 1층에 모였다.

‘누가 시를 읽는가.’ 이날 대화의 주제였다. 스무 명가량의 사람들이 시를 왜 읽고, 어떤 시를 읽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모두 초면이지만 ‘시덕(시 덕후)’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동명의 책 출간이 계기였다. 미국의 시 전문 잡지 <시(Poetry)>의 기고란에 실린 글을 추려 만든 책이다. 의사·경제학자·목사·음악가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독자들이 왜 시를 읽게 되었는지, 어떤 점에 끌렸는지 고백했다. 책의 출간을 검토하던 박지홍 봄날의책 대표는 작가가 아니라 독자가 쓴 글이라는 점이 신선하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웨스트포인트(육군사관학교)에서 시 수업은 필수과목이다. 소통하는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서다. 한 생물인류학자는 사랑과 관련된 심리적 증상을 찾아보느라 전 세계의 시를 찾아 읽었다. 인간의 사고를 이해하는 단서였고 논문보다 유용했다.

ⓒ시사IN 이명익
4월14일 시를 읽는 사람들이 동양서림 1층에 모여 ‘시를 읽는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봄날의책과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이 한국 독자에게 같은 질문을 던졌다. SNS로 한 번 홍보했을 뿐인데 5일 동안 108명이 선뜻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신청자 가운데 20대가 56.5%로 압도적이었고 여성이 80%였다. 브랜드 마케터, 카피라이터, 학생, 편집자, 유튜버, 고양이 모래 생산자, 피아노 강사, 정책연구원 등 직업이 다양했다. 직업, 연령, 선호하는 시인, 성별 등을 고려해 스무 명을 초대했다. 모두 좋아하는 시집을 한 권씩 들고 왔다. 진행을 맡은 김복희 시인이 말했다. “저도 시를 쓰지만 시 좋아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아 이 자리가 소중하고, 미소가 떠나지 않네요.”

최연소 참석자인 소지환군은 서점 근처에 있는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다. 시를 접한 이력도 모인 사람 중 가장 짧았다. 지난 3월, 학교와 가까운 동양서림에 학습지를 사러 왔는데 시집 전문 서점 위트앤시니컬을 발견했다. 이전까지는 교과서에서 접하는 시가 전부였다. 시 자체도 재미가 없는데, 시집만 따로 파는 서점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야간 자율학습을 앞두고 친구와 서점을 둘러보러 왔다가 학교 교사를 만났다. 시집 한 권을 선물받았다. 읽어보니 재미있었다. 그 뒤로 종종 왔다. 화자랑 마음이 일치하는 시를 만나면 크게 와닿았다. 같은 시도 다르게 읽혔다. 최초로 산 시집은 이제니 시인의 <있지도 않은 문장은 아름답고>였다. 그중 한 편을 이날 낭독했다.

생애 최초의 시는 대개 교과서였다. ‘시적 화자의 의도를 파악하라’는 시험 문제로도 친근하다. <누가 시를 읽는가>에서 <시> 잡지의 편집자 돈 셰어는 말한다. “다른 이들과 시 얘기를 하다 보면 곧잘 이런 말을 듣는다. ‘아 학교 다닐 때는 좀 읽었지요. 끄적거리기도 하고요. 하지만 요즘에는 그럴 시간이 없네요.’” 우리도 다르지 않다. 글을 쓰고 커피를 만드는 김희은씨는 학교를 일찍 벗어난 덕에 편견 없이 시를 읽기 시작했다. 좋아하던 사람이 시를 썼다. 더 알고 싶어서 시를 읽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를 빼놓고 자신에 대해 말할 수 없게 되었다. 화자의 의도나 시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찾은 적은 없다. 읽었을 때 문장이 와닿으면 좋은 시, 잘 모르겠으면 나중에 다시 읽을 시, 이해가 안 되면 어려운 시다. 그에게 나쁜 시는 없다.

나이와 상관없이 어느 날 불쑥, 시가 찾아오기도 한다. 30대인 신영섭씨도 사회생활을 하다 보니 감정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서른 살 즈음 머리를 한 대 맞은 것처럼 시를 접했다. 윤동주 시집을 읽고 난 뒤였다. 곧이어 박준 시인을 만났다. “라면 국물의 간이 비슷하게 맞는다는 것은 서로 핏속의 염분이 비슷하다는 뜻이야(‘동지’ 중)” 같은 표현이 좋았다. 이후부터 시집을 찾아 읽었다. 해석의 여지가 다양하다는 게 그에겐 중요했다. 평소 힙합을 좋아하고 라임에 관심이 있기도 했다.

시 읽는 독자 1만5000~2만명으로 추정


책을 좋아하지만 시는 읽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가운데 외롭게 고군분투 중인 ‘시덕’들이 있다. 브랜드 마케터 송새나씨는 4년간 독서모임을 하며 그것을 실감했다. 일주일 동안 읽은 책을 가져가 소개하는 형태로 모임을 하는데, 시집을 가져가면 반응이 좋지 않다. 왜 그런지 궁금했다. 시를 해석하는 데 정답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어려워하기도 했다. 시에 관심이 있어도 읽기보다는 쓰는 쪽이었다. 시 모임을 운영하며 다양한 시도를 했다. 윤동주 시인의 시구절 뒤를 이어 적어본다든지, 기형도 시인의 기일에 모여 책을 읽으며 술을 마신다든지 하는 식이다. 남미리씨 역시 독서모임에서 시집을 다루기 위해 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심보선 시인의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빠져 있을 때였다. 그의 시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읽어주기도 했다.

ⓒ시사IN 이명익
필사는 시에 다가가는 좋은 방법이다. 위는 위트앤시니컬의 필사 공간인 ‘시인의 책상’.
시 읽는 독자는 얼마나 될까. 유희경 시인은 시집의 증쇄 정도를 고려해 대략 1만5000~2만명으로 추정한다. 위트앤시니컬에서는 한 달에 1000권 이상 시집이 팔린다. 유 시인은 매출전표로 시 읽는 사람들의 존재를 확인한다. ‘놀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시를 찾고 읽는 모습’을 본다. 서점을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운영하되, 시가 갖는 가치를 증명하고 싶다. 봄날의책 출판사는 세계 시인선을 낸다. 첫 번째로 나온 노르웨이 시인 울라부 하우게의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가 4쇄를 찍었다. 번역시는 잘 안 된다는 편견을 깬 셈이다. 지금껏 네 권을 출간했다.

김복희 시인은 “일단 시를 읽기 시작하면 잘 그만두지 않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시 읽는 이의 수는 많지 않지만 충성도가 높다는 의미다. 그의 말대로 잠시 쉬었다 가긴 해도, 관심의 끈은 이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박미영씨는 특성화고 교사다. 현재 고등학교 2학년 담임을 맡고 있고 최근에는 시를 많이 못 읽었다. 고등학교·대학교 때 문예반을 거쳤다. 이날 참석자들이 언급한 젊은 시인들의 이름을 들으며 세대 차이를 실감했다. 그는 마종기 시인을 좋아한다. 미국에 사는 마종기 시인의 아들들이 한국어를 못하지만 아버지를 응원한다는 글을 본 뒤로 모국어로 쓰는 시의 간절함이 더 와닿았다.

시를 전공했던 이유진씨는 현재 고양이 모래를 생산·판매한다. 문득 시가 그리워질 때가 있다. 잊지 않기 위해 숙제처럼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읽자는 다짐을 했다. 언제부터 어떻게 시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로 시가 인생에서 큰 부분이었다. 학창 시절, 백일장 나가는 게 좋았고 시를 꾸준히 쓰면 좋겠다고 말해준 은사가 있었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했다. 시는 사람 몸에 새겨진다고 했다. 왼손을 오므리면 손금에 ‘시’라는 글자가 새겨진다고. 따라해보니 정말이었다.

직업 때문에 시를 찾은 카피라이터의 고백

직업 때문에 시를 찾게 되기도 한다. 카피라이터인 송정원씨가 그랬다. 시집을 읽으면 일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시는 볼수록 광고와는 정반대의 글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직선으로 나아가는 카피와 많은 게 달랐다. 송씨는 오히려 거기서 해방감을 느꼈다. 그는 이수명 시인을 좋아한다. 그의 시집을 읽었을 때 감동을 넘어 충격을 받았다. 시인이 만든 세계에 미끄러져 들어가며, 마치 늪에 빠지는 기분이었다.

시 번역은 직업 번역가들에게도 녹록지 않은 작업이다. 이날 참석한 <누가 시를 읽는가>의 신해경 번역가가 말했다. “시는 잘해도 욕먹고 못해도 욕을 먹는다는 인식이 있어요. 영어와 우리말이 달라 앞뒤로 잘려버리면 의미가 안 들어오는 경우도 많아 번역하기가 어려워요.” 그럼에도 번역을 수락한 건 그도 시를 읽는 독자이기 때문이다. 귀촌한 전남 해남에서 시모임을 하고 있다. 혼자서는 시를 잘 읽게 되지 않아서다. 그는 ‘옮긴이의 말’을 빌려 시를 읽는 일에 대해 말했다. “사람마다 인식과 지각의 형태가 얼마나 다른지 더듬어보는 일이고, 합의된 공동의 도구인 언어의 한계와 보편성의 허상을 실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참가를 신청한 108명에게 좋아하는 시인을 물었다. 이제니, 기형도, 김소연, 허수경, 오은, 윤동주, 이수명, 강성은, 나태주, 류시화, 박준, 심보선, 황인찬 등의 이름이 나왔다. 이들에 얽힌 기억들을 공유했다. 이날 모임에 참가한 이경호씨는 박준 시인의 ‘환절기’를 읽어주는 것으로 프러포즈를 했다. 지금의 아내가 감동을 많이 받았다. 최한나씨의 사춘기는 좀 늦은, 대학 시절에 찾아왔다. 그 시기를 함께 견뎌준 건 시인이었다. 대학원생 황지영씨는 작년 이맘때 같이 제주도에 다녀왔던 친구의 추모식을 다녀온 길이었다. ‘세상의 작고 약하고 아픈 것들’을 대변하고 싶어 하던 친구에게 강성은 시인의 <Lo-fi>를 주고 왔다. 꼭 읽고 싶어 했던 게 기억났다. 중간 중간 진은영의 ‘청혼’, 이문재의 ‘문자 메시지’, 이제니의 ‘무화과나무 열매의 계절’ 등의 낭독이 이어졌다.

모임 초반에 입 떼는 걸 주저하던 사람들이 점차 자신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기 시작했다. 초면인데도 금세 친밀감이 생겼다. 김복희 시인은 “사람들이 기꺼이 자기 얘기를 해줄까 걱정했는데 열린 마음으로 이야기하고 무슨 시를 좋아하는지 ‘플레이 리스트’처럼 공유했다. 아픈 이야기를 꺼내놓을 때도 조용히 위로하는 분위기였던 게 인상적이다”라고 말했다.

‘누가 시를 읽는가?’ 이날로 한정하자면 ‘시 읽는 사람들’은 주로 백팩을 즐기는 것 같았고 누군가의 말에 금세 눈물이 고였으며 고개를 굉장히 잘 끄덕이는 이들이었다. 누군가 자발적으로 낭독을 청했다. 세월호 참사 5주기를 앞두고 있어 나누고 싶은 시라고 했다. 서윤후 시인의 ‘무사히’였다. “청동으로 만든 종이 울린다 끝나는지 시작하는지 알 수 없는 일정한 간격, 소리가 들리는데 움직이는 사람 없다 가만히 있어야 한다고 그래서, 태어난 적 없는 것처럼 투명하게 사라지라고 해서….” 낭독이 끝나고도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이어졌다. 등 뒤로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밖을 지나는 사람들이 가끔 안을 들여다보았다. 혜화동 로터리에서 회전하는 버스의 불빛이 창에 아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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