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으로 들어온 ‘그놈’ 예술적으로 몰아내다
  • 임지영 기자
  • 호수 613
  • 승인 2019.06.20 16: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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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독·공연가·화가로 활동하는 오재형씨(사진)는 극심한 공황장애를 앓았다. 그는 공황장애를 주제로 전시회를 열고 영화를 만들고 책을 냈다. ‘예술잡상인’의 공황장애 분투기.
북한산이 한눈에 들어왔다. 모니터에는 유튜브 채널 ‘겨울서점’이 일시 정지 상태였고 ‘그날이 오면’의 악보가 피아노 위에 펼쳐져 있었다. 수십 장의 아크릴 그림이 붙어 있는 천장에 눈길이 갔다. 미켈란젤로를 따라 했다는 오재형 작가(34)의 말에 웃음기가 섞였다. 그림으로 시작해 피아노, 영상을 넘나들며 다양한 창작 활동을 벌여온 ‘예술잡상인’의 작업실 풍경이다. 그중엔 공황장애를 다룬 그림도 있다. 작가의 경험을 반영한 작품이다. 한때 그는 창밖으로 그림같이 펼쳐진 북한산에 올라가 막걸리를 따라 놓고 산신령에게 절을 하기도 했다. 공황장애 때문이었다.

2015년 봄, 경인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였다. 1~2주 전부터 숨 쉬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졌고 곧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순간 ‘몸으로 뭔가가 통째로 들어왔다’. 발작이었다. 간신히 차를 세우고 119를 눌렀다. 응급실에 갔더니 이상이 없다고 했다. “저 왜 이래요?” 누군가가 공황장애일 수도 있다고 답했다. 그렇게 ‘그놈이 왔다’.

공황장애의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오 작가의 경우 호흡곤란, 뒷골 당김, 마비 증상과 함께 심장이 자주 철렁거렸다. 증상은 다 다르지만 원인은 스트레스로 모였다. 작가에겐 딱히 괴로운 일이 없던 시기였다. “심각한 질병이 다가오면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잘못 살아왔고 그래서 병이 왔다는 생각에 퇴사를 하거나 세계 일주를 떠나는 등 삶의 전환기를 갖는다. 내 경우는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지분을 차지할 수는 있지만 결정적 원인 같진 않았다.” 증상은 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시사IN 이명익
공황장애 진단을 내리고 약을 처방해준 신경정신과 의사는 ‘환자들에게 무관심한 약 자판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니던 동네 한의원에 들렀다. 한의사는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지 않다고 말한 뒤 그가 처방받은 약 하나하나를 검색해 설명해주었다. 그 편이 훨씬 도움이 되었다. 공황장애와 관련된 인터넷 카페를 통해 비로소 ‘그놈’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증상이 완화되었다. 비슷한 사람이 정말 많았다. 신경정신과에 다녀온 사람 대부분이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했다는 사실도 거기서 알았다.

오재형 작가는 예술가라는 직업을 치유의 수단으로 삼았다. 글과 그림을 활용했다. 10년간 작업 노트를 써왔듯 모든 증상을 기록하기로 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과 비슷했다. 증상과 거리를 두는 작업이었다.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면 좀 더 정확하게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업이 될 것 같다’는 예술가로서의 촉도 왔다. 글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면
그림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글과 그림에는 일정한 문법이 있다. 외부의 문법으로 고통을 표출하고 그 안에 가두기도 하면서 내 상태를 정확히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암 같은 질병과 달리 공황장애는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치료의 일환인 것 같다.” 누군가 ‘그놈’이 올 때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봤더니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했을 때 뿌듯했다.

‘영혼이 털리는 느낌’ 받는 공황장애 증상

증상이 한창 진행 중일 때는 ‘영혼이 털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제는 뺨이 마비되는 것 같다가, 오늘은 뒷골이 당겼다. 다음에는 뭐가 올지 몰랐다. 숨을 못 쉬는 게 가장 괴로웠다. 몸으로 느껴지는 반응이 너무 생생해 실제라고 믿게 되었다. 한번 오면 속수무책이지만 두려움을 가지면 ‘그놈’이 더 커질까 봐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증상 중에 ‘비현실성’이 있다. 어지럽고 세상이 흔들려 보이는 현상이다. 마침 탄핵 정국이었다. 오 작가는 “세상 자체가 비현실적인데 이렇게 증상으로 발현되는 비현실감이 실은 장애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정확한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휘몰아치는 4개월을 보낸 후 증상이 잦아들었다. 극심한 공황장애를 비교적 짧게 겪은 이유는 환경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일단 규칙적으로 직장이나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병을 치유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공황장애를 겪는 이들 중에는 부모나 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정신병을 사회에서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예술가라고 하면 예민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오재형 제공오재형 작가가 공황장애를 겪으면서 그린 작품 <전철역에서>.
뇌출혈을 겪고 재활 치료를 받은 오 작가의 어머니는 본인의 간병 때문에 아들이 이렇게 된 게 아닌지 걱정했다. 처음엔 작가와 마찬가지로 당황했지만 지켜봐주었다. 그는 공황장애를 가진 사람의 주변인에게 조언한다. 경솔하게 본인의 경험을 불러내 동일시하는 태도를 경계하라고. 정신이 허해서 그렇다며, 다 안다는 듯 말했던 친한 친구도 그렇게 말한 지 3개월 뒤 공황장애를 겪었다. 친구도 결국 사표를 썼다. 두 사람은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로 국토 종주를 했다. 육체를 괴롭히면 나아질 것 같아서였다. 실제로 자전거를 타는 동안엔 증상도 없었다. 극복했나 자만하는 순간, ‘그놈’이 또 왔다. 신체를 괴롭히는 것도 익숙해지면 마찬가지였다.

친구의 어머니는 전직 무속인 이었는데 공황장애 원인으로 작업실 근처 북한산을 지목했다. 보름날 막걸리를 따라 놓고 절을 해보라고 권했다. 오 작가는 공황장애가 최근에야 부쩍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명명해서 그럴 뿐 이전부터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로 치면 귀신이 씐 거나 마찬가지 증상이다. 위급할 때 미신을 믿고 싶은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창작 활동에 많은 영감을 준 ‘그놈’

공황장애를 소재로 <덩어리>라는 단편영화도 만들었다. ‘국내 최초 SF 질병 다큐멘터리’다. 시작은 UFO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UFO이고 이 메커니즘이 공황장애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몸에 가해지는 허상의 병’이기 때문이다. 글과 그림 이외의 표현 양식을 담았다. 영화는 코믹하게 흘러간다. 공황장애를 얕보고 희화화했다. 병을 가볍게 다루고 ‘컨트롤’해본 경험이 증상 완화에도 도움을 주었다.

극심한 공황장애 상태는 최근 3년 동안 오지 않았다. 그래도 1%가 남았다. 최초의 발작 때처럼 앞이 뻥 뚫린 도로를 운전할 때, 극장같이 밀폐된 공간에 있을 때, 커피를 마셨을 때 간혹 어지럽고 시야가 흐려진다. 혼자 넘길 수 있는 정도다. 지병처럼 데리고 살아가기로 했다. 재발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처음처럼 ‘KO패’ 당하지 않고 넘어설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공황장애를 겪은 뒤 달라진 점이 있다. 평소 발랄해 보이는데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많았다. ‘왜 저러지’ 생각했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정신 질병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되었다. 창작 활동에는 특히 많은 영감을 주었다. 공황장애를 주제로 전시회도 열고 영화도 만들었으며 그간의 글을 묶어 독립출판 형태로 책도 냈다. 출판사와 연이 닿아 최근 <넌, 생생한 거짓말이야>라는 책을 정식 출간했다.

그는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난을 못 친다’. 골방에서 그림만 그리던 화가들을 동경했으나 졸업 후 우연히 강정마을에 대한 영상을 보고 제주도에 내려간 뒤 예술관이 바뀌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집합되어 있었다. 거기서 활동하는 예술가를 보면서 내가 아는 예술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갤러리에 입성하려는 노력보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었다.” 단편영화 <강정 오이군>을 찍었다.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애니메이션 <블라인드 필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단편영화 <봄날>을 연출했다. 최근에는 영상과 피아노 연주를 결합한 퍼포먼스에 집중하고 있다. 언젠가 그는 ‘공황장애 페스티벌’을 열고 싶다. 혼자만 끙끙 앓던 사람들이 시청 광장에 모이면 좋겠다. 고통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7월에는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이처럼 적극적으로, 심지어 예술적으로 받아들였다. ‘생생한 거짓말’이 불러온 우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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