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봄, 경인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날 때였다. 1~2주 전부터 숨 쉬는 게 불편하다는 생각은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갑자기 호흡이 가빠졌고 곧 쓰러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 순간 ‘몸으로 뭔가가 통째로 들어왔다’. 발작이었다. 간신히 차를 세우고 119를 눌렀다. 응급실에 갔더니 이상이 없다고 했다. “저 왜 이래요?” 누군가가 공황장애일 수도 있다고 답했다. 그렇게 ‘그놈이 왔다’.
공황장애의 증상은 사람마다 다르다. 오 작가의 경우 호흡곤란, 뒷골 당김, 마비 증상과 함께 심장이 자주 철렁거렸다. 증상은 다 다르지만 원인은 스트레스로 모였다. 작가에겐 딱히 괴로운 일이 없던 시기였다. “심각한 질병이 다가오면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잘못 살아왔고 그래서 병이 왔다는 생각에 퇴사를 하거나 세계 일주를 떠나는 등 삶의 전환기를 갖는다. 내 경우는 아니었다. 스트레스가 지분을 차지할 수는 있지만 결정적 원인 같진 않았다.” 증상은 있지만 원인을 알 수 없었다.
오재형 작가는 예술가라는 직업을 치유의 수단으로 삼았다. 글과 그림을 활용했다. 10년간 작업 노트를 써왔듯 모든 증상을 기록하기로 했다. 책을 읽고 리뷰를 쓰는 것과 비슷했다. 증상과 거리를 두는 작업이었다. 한 걸음 떨어져 자신을 바라보면 좀 더 정확하게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업이 될 것 같다’는 예술가로서의 촉도 왔다. 글이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면
그림은 감정을 표현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글과 그림에는 일정한 문법이 있다. 외부의 문법으로 고통을 표출하고 그 안에 가두기도 하면서 내 상태를 정확히 볼 수 있게 되는 것 같다. 암 같은 질병과 달리 공황장애는 표현하는 행위 자체가 치료의 일환인 것 같다.” 누군가 ‘그놈’이 올 때마다 그가 그린 그림을 봤더니 증상이 호전되었다고 했을 때 뿌듯했다.
‘영혼이 털리는 느낌’ 받는 공황장애 증상
증상이 한창 진행 중일 때는 ‘영혼이 털리는 느낌’을 받았다. 어제는 뺨이 마비되는 것 같다가, 오늘은 뒷골이 당겼다. 다음에는 뭐가 올지 몰랐다. 숨을 못 쉬는 게 가장 괴로웠다. 몸으로 느껴지는 반응이 너무 생생해 실제라고 믿게 되었다. 한번 오면 속수무책이지만 두려움을 가지면 ‘그놈’이 더 커질까 봐 통제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증상 중에 ‘비현실성’이 있다. 어지럽고 세상이 흔들려 보이는 현상이다. 마침 탄핵 정국이었다. 오 작가는 “세상 자체가 비현실적인데 이렇게 증상으로 발현되는 비현실감이 실은 장애가 아니라 세상을 보는 정확한 시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휘몰아치는 4개월을 보낸 후 증상이 잦아들었다. 극심한 공황장애를 비교적 짧게 겪은 이유는 환경 때문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일단 규칙적으로 직장이나 학교에 나가지 않아도 되었다. 병을 치유하는 데에도 적극적이었다. 공황장애를 겪는 이들 중에는 부모나 친구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도 많다. 정신병을 사회에서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에 비해 예술가라고 하면 예민하다는 고정관념 때문인지 대체로 수용하는 편이었다.
친구의 어머니는 전직 무속인 이었는데 공황장애 원인으로 작업실 근처 북한산을 지목했다. 보름날 막걸리를 따라 놓고 절을 해보라고 권했다. 오 작가는 공황장애가 최근에야 부쩍 늘어난 것처럼 보이지만 명명해서 그럴 뿐 이전부터 있었던 거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로 치면 귀신이 씐 거나 마찬가지 증상이다. 위급할 때 미신을 믿고 싶은 마음으로 산에 올랐다.
창작 활동에 많은 영감을 준 ‘그놈’
공황장애를 소재로 〈덩어리〉라는 단편영화도 만들었다. ‘국내 최초 SF 질병 다큐멘터리’다. 시작은 UFO에 관한 논쟁으로 시작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에 있는 것이 UFO이고 이 메커니즘이 공황장애와 일치한다고 생각했다. ‘직접 감각할 수 있는 형태로 몸에 가해지는 허상의 병’이기 때문이다. 글과 그림 이외의 표현 양식을 담았다. 영화는 코믹하게 흘러간다. 공황장애를 얕보고 희화화했다. 병을 가볍게 다루고 ‘컨트롤’해본 경험이 증상 완화에도 도움을 주었다.
극심한 공황장애 상태는 최근 3년 동안 오지 않았다. 그래도 1%가 남았다. 최초의 발작 때처럼 앞이 뻥 뚫린 도로를 운전할 때, 극장같이 밀폐된 공간에 있을 때, 커피를 마셨을 때 간혹 어지럽고 시야가 흐려진다. 혼자 넘길 수 있는 정도다. 지병처럼 데리고 살아가기로 했다. 재발했을 때 어떻게 대처하느냐가 중요한 것 같다. 처음처럼 ‘KO패’ 당하지 않고 넘어설 수 있는가가 관건이다.
공황장애를 겪은 뒤 달라진 점이 있다. 평소 발랄해 보이는데 우울증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많았다. ‘왜 저러지’ 생각했는데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다는 걸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정신 질병에 대해 조금이나마 공감하게 되었다. 창작 활동에는 특히 많은 영감을 주었다. 공황장애를 주제로 전시회도 열고 영화도 만들었으며 그간의 글을 묶어 독립출판 형태로 책도 냈다. 출판사와 연이 닿아 최근 〈넌, 생생한 거짓말이야〉라는 책을 정식 출간했다.
그는 한국화를 전공했지만 ‘난을 못 친다’. 골방에서 그림만 그리던 화가들을 동경했으나 졸업 후 우연히 강정마을에 대한 영상을 보고 제주도에 내려간 뒤 예술관이 바뀌었다.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가 집합되어 있었다. 거기서 활동하는 예술가를 보면서 내가 아는 예술과 다른 점을 발견했다. 갤러리에 입성하려는 노력보다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었다.” 단편영화 〈강정 오이군〉을 찍었다. 네 차례 개인전을 열었고 애니메이션 〈블라인드 필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단편영화 〈봄날〉을 연출했다. 최근에는 영상과 피아노 연주를 결합한 퍼포먼스에 집중하고 있다. 언젠가 그는 ‘공황장애 페스티벌’을 열고 싶다. 혼자만 끙끙 앓던 사람들이 시청 광장에 모이면 좋겠다. 고통을 놀이의 대상으로 삼아보는 경험이 될 것이다. 7월에는 공연도 예정되어 있다. 그는 자신에게 찾아온 고통을 이처럼 적극적으로, 심지어 예술적으로 받아들였다. ‘생생한 거짓말’이 불러온 우연이었다.
-
출판 편집자, 그대는 ‘호모 이직쿠스’
출판 편집자, 그대는 ‘호모 이직쿠스’
임지영 기자
“금요일이면 어김없이 에코백에 교정지를 말아 넣는다. 월요일에 고스란히 들고 출근할 걸 알면서도 왜 주말에 교정지를 집에 싸가느냐고 뭐라는 건 어차피 죽을 줄 알면서 왜 사느냐는 ...
-
북저널리즘을 아시나요?
북저널리즘을 아시나요?
임지영 기자
2014년 1월, 〈이코노미스트〉에 기사 한 편이 실렸다. 제목은 ‘캄브리아기의 순간(Cambrian moment)’. 전 세계 스타트업 생태계에 대한 밀도 높은 리포트였다. 생물...
-
어느 날 불쑥, 시가 찾아왔다
어느 날 불쑥, 시가 찾아왔다
임지영 기자
김복희 시인의 친구가 약속 시간에 늦었다. 추운 날씨, 버스 정류장에서 20분을 기다려야 했던 시인이 친구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는 이제 희망에 대해 말해버릴 거야.” 이 이야기...
-
판사 출신 추리소설 작가, 판결을 평하다
판사 출신 추리소설 작가, 판결을 평하다
임지영 기자
창밖은 공사 중이었다. 서울중앙지방법원 바로 앞이라 집회 시위가 매일같이 열리는 장소다. 서울 서초동 대로변에 자리한 도진기 작가의 사무실엔 판사복을 입은 그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
언제 어디에서나 엄지로 집필한다
언제 어디에서나 엄지로 집필한다
임지영 기자
‘나의 iPhone에서 보냄.’ 배우 봉태규의 에세이집 〈우리 가족은 꽤나 진지합니다〉의 머리말은 이렇게 끝난다. 그는 스마트폰으로 글을 써서 책 한 권을 완성했다. 처음에는 시간...
-
산 자로서 쓴 죽음이 시작되는 순간
산 자로서 쓴 죽음이 시작되는 순간
임지영 기자
“땡스 돈미.” 김혜순 시인이 가장 먼저 찾은 이름은 최돈미, 자기 시를 번역한 번역가이자 시인이었다. 6월6일 캐나다 토론토에서 열린 그리핀 시문학상 시상식에서 “최고의 번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