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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창업자 가족, 경영에서 축출되나

조양호 회장은 국민연금공단의 반대로 대한항공 사내이사직을 잃었고, 한진그룹 지주회사인 한진칼 주총에서는 ‘겨우’ 이겼다.

이종태 기자 peeker@sisain.co.kr 2019년 04월 18일 목요일 제60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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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호 회장은 오늘 주총 결과 사내이사 재선임이 부결되었습니다. 이는 사내이사직 상실이며 경영권 박탈은 아닙니다.” 지난 3월27일 오전 대한항공 주주총회에서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사내이사 선임 건이 부결되었다. 당일 오후 대한항공 측이 기자들에게 발송한 입장문이다. ‘조양호 경영권 박탈’이라는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이사’ 직위는 크게 사내이사와 사외이사로 나뉜다. 사내이사는 해당 기업의 상근자로 경영 전반을 관리한다. 사내이사여야 대표이사로 발탁될 수 있다. 사외이사는 사내이사의 경영 행위를 감시하는 직위로 기업 외부 인사에게 맡겨진다. 조양호 회장이 대한항공의 사내이사가 아니라면 적어도 이 회사에 대해서는 공식적인 경영권을 행사할 수 없다. 언론의 ‘경영권 박탈’이라는 표현이 과도한지는 몰라도 틀린 보도는 아니다. 그런데도 대한항공 측이 굳이 ‘경영권 박탈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조양호씨가 한진그룹의 ‘회장’이기 때문에 그룹의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에 대해 자연스럽게 경영권을 갖는다는 뜻일까. 그렇지 않다. 한국에서 재벌 그룹의 대주주 겸 ‘최고 지도자’에게 붙이는 명칭인 ‘회장’은 법률적 실체가 없는 지위다. 회장은 그룹(기업집단)의 대표를 의미하는 용어인데, 그룹이라는 것이 법률적으로는 인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법률상으로는 개별 기업들만 ‘법인(법률적 인간)’으로서 존재한다. 예컨대 대한항공·한진·진에어·한진칼 등 개별 기업과 이 회사들을 각각 대표하는 사장은 존재한다. 그러나 이런 기업들을 하나로 묶은 ‘한진그룹’과 그 대표인 ‘회장’은 법률적 차원에서 한낱 유령일 뿐이다. 즉, 조양호씨가 그룹 회장으로 불린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는 계열사 경영에 어떤 권한도 합법적으로 가질 수 없다.


ⓒ시사IN 신선영

그렇다면 대한항공의 입장문은 단순한 거짓말인가? 그렇지도 않다. 한진뿐 아니라 재벌 그룹의 회장이란 존재는 법률상 개별 기업인 여러 계열사를 하나의 기업처럼 운영할 수 있는 실질적 힘을 가진다. 그룹의 지배구조가 그런 방식으로 짜여 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의 경우에도, 자연인으로서 조양호 일가가 직접 다수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한진칼밖에 없다. 이 한진칼이 대한항공·진에어·한진(물류업체) 등에 다수 지분을 갖고 지배한다. 조양호 일가의 지배력은 한진칼을 통해 다른 계열사로 내리꽂히는 것이다(위의 <표> 참조).

만약 이번 같은 사태가 2013년 상반기에 발생했다면 조양호 일가의 한진그룹에 대한 지배권이 송두리째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당시 조양호 일가가 자연인으로서 핵심 계열사인 대한항공에 직접 보유한 지분은 9.86%에 불과했다. 다른 계열사인 한진이 대한항공 지분 9.69%를 갖고 있었던 덕분에 일가의 지배력이 유지되었다. 합치면(9.86%+9.69%) 19.55%다. 그러나 일가가 직접적으로 소유한 한진 지분 역시 7% 에 불과했다(우호 지분을 합쳐도 모두 26%). 자금력 있는 외부인이 한진 주식을 다수 사들여 지배하게 되면, 대한항공에 대한 지배권까지 빼앗길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조양호 일가는 2013년 하반기에 이른바 ‘인적분할’이라는 방법으로 그룹 개편을 단행한다. 인적분할이란, 재벌 일가가 추가 자금 투입 없이 계열사들에 대한 지배력을 대폭 강화할 수 있는 마술 같은 방법이다. 한국의 기업집단 개편에 널리 사용되어 왔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먼저 핵심 계열사를 두 개로 쪼갠다. 하나는 지주회사(지배하는 기업)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회사(지주회사의 지배를 받으며 실제 사업을 하는 기업)이다. 그다음 단계는, 재벌 일가가 가진 사업회사의 주식을 지주회사에 넘겨주고 대신 지주회사의 주식을 인수한다. 결과적으로 재벌 일가는 지주회사의 지분을, 지주회사는 사업회사의 지분을 다수 보유하게 된다. 일가는 사업회사 지분을 지주회사에 거의 넘겨주게 되지만, 상관없다. 지주회사만 확고하게 지배한다면, 지주회사를 통해 사업회사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진그룹의 인적분할에서는 당시의 대한항공이 한진칼(지주회사)과 지금의 대한항공(사업회사)으로 쪼개졌다. 그 결과, 지금의 한진그룹은 2013년 이전과 완전히 다른 구조를 갖게 되었다. 한진칼은 대한항공 지분의 29.96%, 진에어의 60%, 한진의 22.19%를 보유하는 명실상부한 지주회사로 자리를 굳혔다. 조양호 일가는 한진칼의 지분 28.93%를 확보하고 있다. 조양호 본인이나 한진의 사립학교 재단인 정석인하학원이 별도로 보유한 계열사 지분까지 합치면, 일가의 지배력은 대한항공 33.35%, 한진 33.13%까지 늘어난다.

ⓒ연합뉴스
조양호 회장은 3월29일 열린 한진칼 주총(위)에서 승리했으나 내년 주총에서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조양호, 대한항공 합법적 지배 가능


국민연금공단은 지주회사인 한진칼의 7.16%, 대한항공의 11.7%를 보유했다. 이번 사태 전까지 국민연금공단은 관행적으로 재벌 일가의 경영권을 타격하는 일에는 좀처럼 발을 담그지 않았다. 재벌 일가에게 적이라기보다 우군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처럼 일가의 계열사 지배력은 그룹구조 개편을 통해 더욱 탄탄해진 것으로 보였다.

지난 수년 동안 조양호 본인을 제외한 모든 가족 구성원이 제각기 저지른 각종 기상천외한 ‘난행’들이 드러나면서 굳건한 것처럼 보였던 지배력에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지난 3월29일 한진칼 주총 직전에는 국민연금공단까지 조양호 일가의 적으로 전향하면서, 조 회장은 대한항공 사내이사직을 상실하고 만다. 대한항공의 사내이사로 사장직을 맡고 있는 조원태씨는 조 회장의 아들이다. 그가 아들을 통해 대한항공 경영에 간접 개입할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면 ‘경영권 박탈’은 아닌 셈이다.

2013년 그룹구조 개편의 위력이 본격적으로 드러난 것은 3월29일 열린 한진그룹 지주회사 한진칼의 주주총회였다. 한진칼의 사내이사는 조양호(대표이사 회장), 조원태(사장), 석태수(대표이사 사장) 등 세 사람이다. 이 중 지난 3월 임기를 마치게 되어 있었던 사람은 석태수 대표이사다. 한진칼 주총에서 조양호 일가의 적은 토종 사모펀드인 KCGI와 국민연금공단이었다. 양측이 한 사람씩 맡았다. 한진칼 지분의 10.81%를 확보한 KCGI는 석태수 대표이사의 사내이사 재임을 반대했다. 지분 7.16%인 국민연금공단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금고 이상 형이 확정된 이사는 결원으로 본다’라는 조항(‘사내이사 자격 강화’)을 한진칼 정관에 넣어달라고 제안했다. 조양호 회장을 겨냥한 공격인 것이 명백했다. 조 회장은 현재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혐의로 재판 중이다. 만약 국민연금공단 측의 제안이 주총에서 통과된 이후 조 회장의 혐의가 유죄로 판결난다면 그는 자동적으로 사내이사 자격을 잃게 된다.

조양호 일가는 한진칼 주총에서 승리했다. 석태수 대표이사가 사내이사 연임에 성공한 것이다. 국민연금공단 측의 ‘사내이사 자격 강화’ 안건도 아슬아슬하게 부결되었다(찬성 48.6%, 반대 49.2%). 결국 조양호 회장은 지주회사인 한진칼을 통해 자회사인 대한항공, 한진 등을 합법적으로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경영권을 박탈당하지 않았다.

그러나 곧이어 다시 위기가 닥칠 것이다. 내년 3월에 조양호 회장과 조원태 사장 부자의 한진칼 사내이사 임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KCGI가 지지 세력을 확장하고 국민연금공단이 돌아서면 건국 이후 최초로 창업자 가족이 재벌그룹 경영에서 축출되는 사건이 현실화될지도 모른다. 다만 조양호 일가는 경영 일선에서 축출되더라도 여전히 대주주로 남기 때문에 경영권에 재도전할 기회는 보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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