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은 정말‘악의 축’인가
  • 이종태 기자
  • 호수 602
  • 승인 2019.04.05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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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은 한국 경제에 어떤 존재였을까. 170만여 개 기업의
11년치 정보를 분석한 부경대 연구팀의 작업을 소개한다. 대·중소기업 관계부터 혁신 전략까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아이스크림 판매량이 치솟더니 물놀이 사고가 폭증했다. ‘아이스크림’이라는 원인이 ‘물놀이’ 사고라는 결과로 이어진 것일까? 그렇지 않다. 물놀이 사고의 원인은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여름이다. 엄청난 무더위로 아이스크림을 먹거나 물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이 각각 많아지면서 전자는 많이 팔리고 후자도 늘어났을 뿐이다. 만약 이 문제의 원인과 결과를 오판해서 아이스크림 판매를 금지한다면? 물놀이 사고는 줄지 않고 애먼 빙과업체만 도산하게 된다.

단지 빙과업체(혹은 그 사장)가 밉다고 ‘사고의 원인은 아이스크림’이라고 주장해서는 안 된다. 세상의 각종 부조리를 개선하려면 원인과 결과(인과관계)부터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인과관계를 제대로 알아내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은? 오로지 현실에 기대야 한다.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수집해 데이터로 가공한 뒤 분석하는 길밖에 없다. 데이터는 풍부하면 풍부할수록 좋다. 그래야 현실을 좀 더 정확하게 분석해서 다양한 인과관계를 찾아낼 수 있을 터이다. 현재 한국 사회가 경제 영역에서 겪고 있는 양극화, 실업, 혁신 지체 등 각종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서울 서초구에 있는 삼성타운 전경. ⓒ시사IN 이명익

<시사IN>이 부경대학교 ‘산업생태계 연구팀’의 최근 작업(‘기업 간 거래 네트워크 분석’)을 기사화한 이유다. 이 연구의 가장 큰 장점은 기업 관련 데이터를 다른 비슷한 연구들과 비교하기 힘들 만큼 풍부한 규모로 확보했다는 점이다. 한국 경제 전반에 유의한 영향을 끼치는 170만여 개 기업의 11년치 정보를 분석해서 그동안 산업생태계가 어떻게 변모해서 지금에 이르렀는지 상세하게 그려냈다. 그동안 관련 연구들이 기업 관련 데이터의 부족 때문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던 한계를 정면 돌파한 것이다.

남은 일은 최근 한국 경제가 겪고 있는 다양한 고통의 원인에 대한 규명이다. 진보 진영의 학자, 시민단체, 언론 등이 보기에 그 ‘원흉’(원인)은 굳이 힘들게 연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너무나 자명하다. 바로 재벌 대기업이다. 그들에게 대기업은 정치적으로 ‘박정희 군부독재의 유산’이고 경제적으로 ‘독점자본’이다. 중간재 시장을 내부화(수직계열화)해서 중소기업의 성장을 가로막는 ‘시장 파괴자’다. 심지어 중소기업 착취에 따른 단가 인하로만 국제 경쟁력을 겨우 유지하며 혁신을 포기한 ‘게으름뱅이’다. 혹은 이 모든 나쁜 속성을 종합한 ‘악의 축’이다.

그 반대편에는 재벌 대기업이라면 무조건 옹호하는 세력이 있다.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시장주의자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강한 자의 이익을 보장하면 시장주의’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기업의 영향력 아래 있는 중소기업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결성 및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는 조치가 그들에게는 ‘노동시장의 정상적 작동’을 가로막는 것으로 간주된다.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의 생존을 위해 해당 업종에 대한 대자본의 침투를 규제하면 ‘좌파의 시장 개입’이다. 이토록 시장을 사랑하는 그들이, 재벌 일가가 순환출자로 계열사에 대한 지배력을 부풀리거나 경영권 상속을 위해 분식회계까지 저질러 자본시장의 질서를 해치는 경우에는 턱없이 너그럽다.

이처럼 ‘정치 담론’ 차원에서는 전체적으로 어느 정도의 균형이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정치적 균형이 반드시 정확한 현실 분석이나 개선 방안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예컨대, 과연 대기업의 경제력을 축소하면 중소기업이 성장하게 될까? 수직계열화를 해체하면 중간재 단가가 올라갈까? 재벌 대기업들은 정말 혁신으로부터 고개를 돌렸나? 대기업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기업을 중심으로 새로운 산업생태계를 설계할 수는 없을까?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만한 이런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 정의감이나 당위가 아니라 철저히 현실 데이터에 기반해서 분석하고 그 개선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듯하다. 산업생태계 연구팀의 분석을 지면에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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