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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고자 119명이 보내는 구조 요청

쌍용차 해고 노동자 김주중씨가 목숨을 끊었다.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다시 서울 대한문에 분향소를 차리고 조문객을 맞았다. 2012년 걸개그림 속 22명의 영정은 30개로 늘어났다.

장일호 기자 ilhostyle@sisain.co.kr 2018년 07월 16일 월요일 제56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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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차 해고 노동자 김주중씨가 적어낸 긴급생계비 지원서 내용은 단출했다. ‘해고 기간 55개월, 국가가 제기한 손배 14억7000만원, 퇴직금 가압류, 부동산 가압류.’ 김씨는 2014년 노란봉투 캠페인으로 조성된 기금 중 긴급생계비를 지원받은 329가구 가운데 한 가정의 가장이었다. 그해 7월7일 윤지선 ‘손잡고(손배·가압류를 잡자! 손에 손을 잡고!)’ 활동가는 김씨로부터 짧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잘 쓰겠습니다.”

윤 활동가는 김씨가 당시 남긴 서류와 문자메시지를 찾아보다가 결국 눈물을 쏟았다. 김씨가 SOS를 보내왔다는 사실 앞에 사무치는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2014년 ‘손잡고’ 결성 이후 손배·가압류 문제 해결을 위해 기자회견을, 실태조사를, 언론사 접촉을 수도 없이 해왔다. 2014년 <시사IN> 독자 배춘환씨가 뿌린 ‘4만7000원의 씨앗’은 시민의 힘으로 꽃을 피웠다. 노동권을 무력화하는 손배·가압류 남용을 막기 위한 ‘노란봉투 법안’까지 발의되었지만 19대 국회에서 단 한 차례 논의됐고, 20대 국회에서는 논의조차 되지 못한 채 잠자고 있다. 기자들에게 보도를 요청하는 전화는 대부분 거절되곤 했다. 누군가는 신생 시민단체 활동가를 가르치듯 말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사람이 죽었어요? 아니죠? 활동가님, 기사는 그렇게 안 나가요.”

ⓒ시사IN 조남진
6월29일 고인을 태운 운구차가 쌍용차 평택공장 정문을 떠나자 김선동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조직실장(왼쪽)이 울음을 터뜨리며 동료에게 기대고 있다.
올해가 작년과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해고 이후 지난 10년이 그러했듯 앞으로도 바뀔 것 같지 않은 막막한 현실이 또 한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 2015년 12월30일 쌍용차 노사는 해고자 복직에 합의했지만, 2018년 7월5일 현재 복직자는 45명에 불과하다. 회사가 해고자 복직을 차일피일 미루는 동안 ‘남아 있는’ 해고자 120명 중 한 명이었던 김주중씨는 매번 한 자릿수에 불과한 면접자 명단에 오르지 못했다. 지난 2월 교섭 과정에서 회사 측이 복직 시한 명시를 거부하면서 상황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6월27일 김씨는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및 가족의 서른 번째 사망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날 오후 2시 김씨의 아내는 남편에게서 문자를 받는다. “그동안 못난 남편 만나 고생만 시키고 마지막에도 빚만 남기고 가는구나. 사는 게 힘들겠지만 부디 행복해라. 그리고 천하에 못난 자식 어머님께 효도 한번 못하고 떠나서 정말 죄송하다고 전해주라.” 같은 시간 김씨의 해고자 동료에게도 문자가 도착했다. “형 그동안 고마웠어요. 신세만 지고 가네요.” 가족의 신고로 경찰의 위치추적 끝에 김씨가 발견된 곳은 집 근처 야산이었다. 유서가 된 문자메시지는 모두 예약 발송된 것으로 정확한 사망 시간을 추정하기 어려웠다.

사망 당일에도 김주중씨는 새벽 2시부터 6시까지 화물차로 화장품을 배달했다. 잠깐 한숨 자고 일어나면 할 수 있는 일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일이 있을 때면 공사장에서 바닥 미장 등을 했다. 새벽마다 배달을 나가느라 동료들을 만나도 ‘한잔’하기 어려운 날들이 이어졌다. 밤낮으로 일했지만 변호사 비용을 마련할 수 없어서 신용불량 회생 절차를 밟을 수도 없었다. 머물던 집은 재개발 구역에 포함돼 있었다. 수개월 안에 이사를 가야 했다. 그 와중에도 시간을 쪼개 쌍용자동차 정문 앞에서 1인 시위를 하고, 노조가 주최하는 문화제에도 참석했다. 지난 5월에는 경찰청 인권침해사건진상조사위원회 인터뷰를, 6월에는 언론 인터뷰에 참석해 파업 당시 상황을 증언하기도 했다.

ⓒ시사IN 이명익
2009년 8월5일 경기도 평택시 칠괴동 쌍용차 조립3·4공장 옥상에 투입된 경찰 특공대가
달아나는 노조원들을 쫓고 있다. 동그라미 안은 김주중씨.
2009년 8월5일 오전 8시, 김씨는 쌍용차 조립공장 옥상 위에 있었다. 사다리를 타고 옥상으로 올라오는 경찰을 저지하느라 컨테이너를 타고 올라온 경찰 특공대를 보지 못했다. 불과 7분 만에 김씨를 비롯한 11명이 검거됐다. 2009년 경기지방경찰청이 펴낸 <쌍용자동차 사태 백서>는 “격렬히 저항하는 노조원에 대하여 검거작전을 개시”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김씨가 손에 쥔 건 회사 측 직원들이 쏘는 볼트를 막기 위해 들고 올라온 밥솥 뚜껑이 전부였다(<한겨레> 6월23일자).

그동안 앞에 나서기를 꺼려왔던 그가 두 차례 인터뷰에 응한 건 복직 대기 기간이 길어지면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을 거라고, 김씨의 동료들은 말했다. 무엇보다 몇 차례나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에게 연대 의사를 밝혀왔던 정치인이 대통령이 되었다. 바뀐 정권에 대한 기대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김씨의 절망은 그렇게 깊어졌다. 막상 묵힌 기억을 꺼내고 나니 “지난 10년이 참 허무하다”라고 김씨는 동료들에게 토로하곤 했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스무 살을 갓 넘긴 김씨의 두 아들 얼굴에는 아직 여드름 자국이 남아 있었다. 상주의 ‘지나친’ 젊음이 조문객들을 더 서럽게 했다. 6월29일 쌍용차 정문 앞에서 노제가 열리는 동안 가족들은 내내 서로의 손을 몇 번이고 꾹 눌러 쥐었다. 울지 않으려 모아 쥔 손은 금세 눈물로 흥건했다. 상주가 앉은 곳은 아버지가 그토록 돌아가고자 했던 공장 앞이었다. 운구차 뒤로 보이는 공장 건물에는 이런 문장이 쓰여 있었다. ‘가장 혁신적이고 존경받는 대한민국 자동차 회사.’

ⓒ시사IN 신선영

7월3일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가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분향소를 설치했다.
그날, 김선동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조직실장은 운구차가 떠나고서야 겨우 울음을 터뜨렸다. “우리는 어떻게 살라고 그래….” 큰 덩치의 사내가 아이처럼 울었다. 홀로 공장 정문으로 내달리는 김 실장 뒤로 취재진이 우르르 따라붙었다. 공장 문은 그가 도착하기도 전에 닫혔다. “니들이 죽였잖아, 살려내! 얘기해봐, 왜 안 되는 거야! 얼마나 더 죽어야 해?”

7월3일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는 5년 만에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으로 나왔다. 2012년 22명의 영정을 안고 1년7개월을 보냈던 곳이다. 그사이 걸개그림 속 영정은 30명으로 늘어났다. 이날 조합원들은 3평 남짓한 공간을 차지하는 분향소 천막을 치는 데 꼬박 하루를 보내야 했다. 태극기혁명국민운동본부를 비롯한 자칭 ‘애국보수 단체’ 회원들은 물병과 의자를 집어던지며 천막 설치를 저지했다. 기자회견이 진행된 정오부터 다음 날 새벽 3시경까지 폭력과 모욕은 계속됐다. 분향소 출입을 막고 조합원과 연대자들을 고립시킨 그들이 설치한 스피커는 국민교육헌장을, 군가를, 애국가를 내내 토했다. 사람들이 앉지 못하게 바닥에 물을 뿌리거나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쏘기도 했다. ‘시체팔이’들은 “분신이나 하라”며 ‘실패자들’이라고 조롱했다. 경찰은 있었으나, 존재하지 않는 무법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대한문 앞에서 다시 기약 없는 싸움이 시작되었다. 김정욱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 사무국장은 김주중씨가 숨진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해고자 명단을 짚어가며 연락을 돌린다. 대한문 분향소에서 조문객을 맞고 있는 김득중 지부장은 지난 10년간 네 차례 단식을 했다. 지금껏 단식한 날을 모두 헤아리면 103일이다. 32일간 이어간 마지막 단식은 지난 4월2일 끝났다. 그 여파가 얼굴에 고스란했다. 김 지부장은 6월29일 노제에서 추도사를 이렇게 끝맺는다. “더 할 말이 없습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쌍용차에는 이제 119명의 해고자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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