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이번 방중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중국으로 떠나기 직전 기자들과 만난 ‘블링컨 팀’ 역시 ‘대화의 시작’ ‘단지 긴장 완화가 목표’ 같은 발언들로 방중의 의의를 애써 낮췄다. 언론엔 그런 투로 말했다.
중국은 기세등등했다. 방중 며칠 전인 6월14일, 친강 중국 외교부장은 블링컨 국무장관과의 통화에서 ‘미·중 관계 악화의 책임은 오직 미국에 있다’라고 퍼부어댔다. “미국은 중국의 우려를 존중하고, 중국 내정에 대한 간섭을 중단하며, 중국의 주권과 안보, 이익에 대한 훼손을 중단해야 한다." 그 내용을 공개하기도 했다. 지난 5월에도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미국은 한편으론 대화를 요청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중국을 억누르며 고립시키고 있다”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중국의 대(對)미 분열 작전
이런 중국 측의 발언은 대체로 사실과 부합한다. 그러나 외교는 정치적 행위다. 중국 외교부장이 미국 국무장관에게 퍼부은 독설은 단순한 화풀이가 아니다. 오히려 중국 주민들의 ‘반미항전’ 의지를 강화하고, 미국의 시민사회 및 정치권을 분열시키기 위한 고도의 정치 행위로 봐야 한다. 실제로 미국 공화당 의원들은 블링컨의 방중을 맹렬히 비난했다. ‘중국에 더 강한 제재와 수출 규제를 가해야 하는 시점에 무익한 대화나 일삼으니 굴욕외교’라는 식이다.
또한 중국 정부는 최근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 랙스먼 내러시먼 스타벅스 CEO,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 등 글로벌 기업 경영 책임자들을 줄줄이 베이징으로 불렀다. 심지어 지난 6월16일엔 시진핑 주석이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를 직접 만났다. 미국과 중국 간 무역 규모가 연간 7000억 달러에 달한다. 미국 비즈니스계는 중국과의 긴장 완화를 바랄 수밖에 없다. 미국 기업의 CEO들은 중국 정부가 부르면 초과 수익의 기회를 노리며 뛰어간다. 정치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은 중국 기업 CEO들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행위다.
이와 함께 중국은 국제사회에서도 미국과 그 동맹국들을 분열시키는 전략을 사용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중국은 최근 중동의 라이벌 국가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란 간의 화해를 중재해 이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높였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을 초청하기도 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이런 상황이 진행 중인 가운데 ‘중국과의 해빙’을 거론했다. 그는 블링컨의 방중 직전, 기자들과 만나 “앞으로 몇 달 안에 시진핑 주석과 다시 만나 양국이 앞으로 어떻게 잘 지낼 수 있는지 이야기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라고 말했다. 블링컨은 중국으로부터 험한 말을 들으면서도 방중을 강행했다. 외견상으론 미국이 굴욕외교, 중국은 자주외교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과연 그럴까? 그동안 ‘반도체 전쟁’ 혹은 ‘무역전쟁’의 ‘전세’를 보면, 승기를 잡은 나라는 미국이다. 바이든 행정부는 반도체 수출 규제 정책으로 중국을 확실한 곤경에 빠뜨렸다. 앞으론 동맹국들까지 끌어들여 공세를 더욱 강화할 계획이다. 더욱이 중국은 '리오프닝'으로 기대했던 경제회복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수출 실적이 바닥을 기고, 청년 취업률이 치솟으며, 투자 전망도 밝지 않다. 이에 따라 세계적 추세와 정반대로 물가가 가라앉으며 디플레이션 우려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블링컨 국무장관이 중국을 방문한 이유
이런 상황에서 중국이 구원을 요청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밖에 없다. 미국이 대중 수출 규제를 완화하고 중국에 투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현재 미국 정부와 의회는 대중 자본수출을 강력히 규제하는 법안까지 추진 중이다). 사실 중국 정부가 만나고 싶은 사람은 블링컨 국무장관이 아니다. 미국의 대중 무역정책에 실질적 영향을 미치는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지나 라이몬도 상무장관, 나아가 바이든 대통령이다. 블링컨의 방중은 이런 미·중 간 최고위급 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한 마중물일 뿐이다.
브루킹스 연구소의 선임 연구원 데이비드 달러는 〈워싱턴포스트〉(6월17일)에 “가장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은 블링컨의 방중이 옐런과 라이몬도 장관의 차후 방문을 위한 발판이 되는 것”이라며 “중국은 미국의 다양한 무역 및 기술 수출 규제에 대해 우려하고 있지만 ‘블링컨 팀’은 이 문제로 협상할 수 있는 적절한 대상이 아니”라고 말했다.
이런 점들을 감안하면, 블링컨과 바이든 정부가 이번 방중으로 ‘큰 외교적 성과를 바라지 않는다’고 누누이 강조한 이유를 알 수 있다. 대니얼 크리텐브링크 동아시아 담당 외교관은 지난 6월14일 기자들에게 “우리는 미·중 관계에서 어떤 돌파구나 전환의 계기를 만들기 위해 중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미국은 중국과 당장 화해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앞으로 더욱 공세를 강화할 입장에서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단지 중국을 ‘관리’할 필요는 있다. 수출 규제에 대한 중국의 반발과 남중국해 및 타이완 해협에서 돌출되는 군사적 충돌을 적절한 선에서 누그러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블링컨은 옐런과 라이몬도라는 미끼를 중국에 던지는 대신 ‘중국 관리’의 수단인 의사소통 라인을 재건하기 위해 방중한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정권은 중국에 험한 말을 던지기보단 외교적 술수를 선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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