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는 그냥 ‘산업의 쌀’이라는 평화로운 별명으로 불렸다. 지금은 미국과 중국의 최고위급 지도자들로부터 ‘전략 자산’ 심지어 ‘핵무기’로까지 호칭되거나 비유된다. 반도체 이야기다. 미·중 양국은 반도체 산업의 글로벌 패권을 둘러싸고 국가의 운명을 건 싸움을 벌이고 있다. 2023년 5월 시점에서는 미국이 승기를 잡은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어떤 전략을 구사해서 중국을 궁지로 몰아넣었을까? 중국은 미국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무엇보다 두 나라의 싸움이 한국의 사활적 이익을 해치게 되진 않을까? 이 기사는 이런 의문들에 답변의 실마리를 제공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반도체 산업과 글로벌 공급망에 대한 기초 지식도 함께 담았으니 참조하시기 바란다. 

4월26일(현지 시각) 미국을 국빈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워싱턴 DC 백악관 로즈가든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AFP PHOTO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4월26일 한·미 정상회담 직후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기자에게 ‘(반도체법 등으로) 핵심 동맹인 한국에 피해를 주는 것 아니냐’는 취지의 질문을 받았다. 바이든 대통령은 “(반도체법이)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라고 답변했다. 이미 “미국에서 상당한 경제성장을 일으키고 있으며 한국에도 일자리를 만드는 등 양국에 윈윈”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반도체법은 중국에 피해를 주려고 설계한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 

아무리 외교적 언사라고 하지만, 바이든 대통령은 너무 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몰상식하고 무책임하다. 의심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실한 답변은 다음과 같아야 했다.

‘반도체법은 중국의 산업발전 수준을 퇴보시키기 위한, 바로 그 목적으로 설계되었다. 미국에선 어느 정도의 경제성장이 이뤄지겠지만, 한국 기업들의 미래엔 불확실성이 커졌다.’

‘미국 반도체 칩과 과학법(The US CHIPS and Science Act, 이하 반도체법)은 지난해 8월 바이든 대통령의 서명으로 제정되었다. 얼핏 보면, 미국 정부가 자국 내의 반도체 제조를 활성화하기 위한 산업정책일 뿐이다.

미국은 반도체 산업이 처음으로 태동한 나라다. 반도체라는 기술은 미국이 만든 ‘기술 표준’의 틀 안에서 발전해왔다. 1980년대 초반까지 글로벌 반도체 시장은 미국의 독무대였다. 이후 시장 상황이 크게 바뀌긴 했지만, 여전히 미국은 반도체 공급망의 고부가가치 부문(설계, 팹리스, 제조 장비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선두를 달리고 있다. 다만 미국 내에서 제조되는 반도체 규모(글로벌 생산 대비)는 1990년의 40%에서 지난해엔 12%까지 줄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당시 글로벌 차원에서 반도체 품귀 현상이 발생하자 일부 업종에선 생산이 중단되기도 했다. 미국으로서는 자국 경제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반도체를 구할 수 없는 상황에 대비할 필요가 충분하다.

반도체법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앞으로 5년 동안 미국 내의 반도체 제조 및 기초과학 연구에 모두 2800억 달러를 지출할 수 있다. 그중 520억 달러는, 미국에서 반도체 및 제조 장비를 생산하는 국내외 기업에 지불할 보조금, 세제 혜택, 연구개발 지원금 등이다. 미국 내로 반도체 제조 부문(파운드리)을 유치하겠다는 의도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앞에 떨어진 불똥

이 같은 미국 정부의 의지에 부응하듯이, 이미 텍사스주 오스틴시에 반도체 공장 두 곳을 운영 중인 삼성전자는 테일러시에도 170억 달러를 투입해 파운드리를 짓고 있다. 지난해엔 향후 20년 동안 텍사스주에 2000억 달러를 투자해 반도체 공장 11곳을 신증설하겠다는 계획까지 내놓았다. SK하이닉스는 반도체 제조의 마무리 공정인 첨단 패키징 공장을 미국에 세울 계획이다. 이 밖에도 글로벌 반도체 제조에서 절반 이상을 점유 중인 타이완 TSMC, CPU 시장의 절대 강자인 인텔 등이 미국에 파운드리를 짓고 있다.

미국 테일러시에 짓고 있는 삼성전자 파운드리 공장. ⓒ삼성전자 제공

정부가 전략산업 육성을 위해 기업들에게 보조금을 지급하는 것 자체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반도체 산업 부문에서는 한국·일본·타이완·중국·유럽연합(EU) 등 주요국들이 거의 어김없이 관련 법률을 이미 제정했거나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이런 나라들은 보조금 수혜 기업들에 ‘누구와 거래하면 안 된다’ 같은 조건을 달지 않는다. 이런 측면에서 바이든 행정부의 반도체법은 특별하다. 지정학적 목표를 노골적으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법에 따르면,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국내외 기업들은 10년 동안 ‘중국이나 다른 우려 대상국(People's Republic of China or any other foreign country of concern)’의 반도체 생산 능력을 확장하는 ‘중요한 거래(significant transaction)’에 관여하면 안 된다.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가 미국 정부의 보조금을 받는다면, 중국 현지 자회사에 더 투자하거나 새 공장을 지을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다(3월22일 나온 ‘가드레일’에선 ‘10년간 5%까지는 확장 가능’으로 완화). 뜨거운 경쟁으로 기술발전 속도가 대단히 빠른 반도체 산업에서 투자(생산능력 확장)를 억제하라는 것은 해당 공장을 닫으라는 이야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삼성전자는 중국 시안(낸드 플래시 메모리), SK하이닉스는 우시(DRAM)의 공장에서 회사 전체 생산량의 40~50%를 만들고 있다. 미국의 대(對)중국 견제는 한국 기업들의 비즈니스에 매우 파괴적일 수 있다.

차라리 한국 기업들이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지 않으면 어떨까? 이 또한 위험하다. 반도체법은 미국 내에 반도체 제조업을 육성하기 위한 산업정책인 동시에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지정학적 전략이다. 미국이 발표하는 ‘수출규제’ 조치의 목표물(들)은 ‘우려 대상국’이란 명칭으로 법안에 등장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 ‘우려 대상국’에 북한·러시아·이란과 함께 중국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은 암묵적 상식이었지만 말이다. 이에 비해 반도체법의 조항들은 ‘중국이나 다른 우려 대상국’이란 문구로 중국을 딱 찍어서 적시했다. 이 법은 또한 ‘수출이 규제되는 기술’ 및 ‘우려 대상’을 새로 지정할 수 있는 권한을 주무 부서에 부여한다. 미국 정부의 의도에 순응하지 않고 중국에 기웃거리는 다른 나라의 ‘기회주의자’들에겐 ‘중국과 비슷한 대접’을 선사하겠다로 해석할 수 있다. 미국은 그렇게 할 수단을 이미 확보하고 있었다. 그 수단은 반도체법 제정 이후 1~2개월 동안 모습을 드러낸다.

지난해 12월12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백악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지난해 9월16일,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은 ‘특별 경쟁력 연구 프로젝트(SCSP)’라는 단체(국가안보의 관점에서 미국의 장기적 국가경쟁력을 연구)의 행사에 나가 ‘수출통제(export control)’를 주제로 연설했다. “미국은 핵심 기술 부문에서 경쟁국에 대해 ‘상대적 우위’만 유지하면 된다는 오랜 전제를 재검토해야 한다. 이전까지 미국은 경쟁국이 기술 측면에서 추격해오면, 그 나라가 따라온 정도만 기술을 더 발전시켜 단지 두어 세대(generation) 정도만 계속 앞서 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그래도 괜찮은 전략적 환경이 아니다. 첨단 반도체 같은 기술들(인공지능·생명공학·청정에너지 등)의 기본적 특성을 고려할 때, 미국은 (경쟁국과) 가능한 한 큰 기술 격차를 벌려야 한다.”

“다음 시대 경쟁의 중심엔 기술이 있다”

이 연설에서 ‘경쟁국’은 당연히 중국이다. 상대방과 격차를 벌리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를 주저앉히는 것이다. 설리번은 중국에 대한 기술 수출통제가-강건하고 지속적이며 포괄적으로 시행된다면-미국의 새로운 ‘전략 자산’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전략 자산은 고성능의 무기체계를 의미하는 군사용어다. 이 연설에서 내놓은 설리번의 주장들은 요즘 ‘설리번 독트린’이라 불린다.

설리번 독트린은 연설로부터 20여 일 뒤인 10월7일 공식화되었다(10·7 조치). 미국 상무부가 슈퍼컴퓨터 및 고성능 컴퓨터에 들어가는 최첨단 반도체의 대중국 수출을 사실상 금지한 것이다. 일정 성능 이상 반도체(18나노급보다 미세한 DRAM, 128단 이상 낸드 플래시 등)의 제조에 활용되는 장비 및 기술의 대중국 수출은 미국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한다. 미국 시민과 영주권자(미국 영주권을 가진 중국인)가 중국 반도체 회사에서 일하는 경우에도 승인이 필요하다. 이후 미국의 반도체 제조 장비업체인 램 리서치, 어플라이드 머티리얼즈, KLA 등의 중국 수출 실적이 실제로 크게 줄어들었다.

그런데 10·7 조치는 단지 미국 기업들만 겨냥한 것이 아니다. 다른 나라 기업들도 첨단 반도체 및 관련 장비를 중국에 수출(반입)하면 이 조치를 위반한 것으로 간주된다. 미국 법률에 따라 기소되거나 경제제재를 당할 수도 있다. 다른 나라의 기업들로서는 황당한 일이다. 미국 법률에 따라 설립되지 않았고, 미국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왜 미국 법을 적용받아야 하는가.

미국엔 나름의 법적 근거가 있다. 20세기 중반 소련을 겨냥해 제정했던 ‘해외직접제품규칙(FDPR:Foreign Direct Product Rule)’이다. FDPR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해외에서 생산된 제품이라도, 그것이 미국산 장비나 기술을 활용해 만들어졌다면 판매를 중단시킬 권리를 갖고 있다. 미국의 기술과 장비 없이 생산된 반도체는 지구에 존재하지 않는다. 10·7 조치는 FDPR을 확대한 것으로, 중국 반도체 산업을 실제로 위축시키고 있다. 국제 컨설팅 업체인 인터내셔널 비즈니스 스트래티지는 중국이 2030년까지 자국에 필요한 반도체 규모의 절반 이상을 제조하게 될 것으로 봤다. 하지만 10·7 조치가 나온 이후 이 예측을 33%로 낮췄다.

중국 시안의 삼성전자 낸드 플래시 메모리 공장.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도 곤란한 처지다. 중국의 자회사로 반도체 제조 장비를 반입하기 어렵게 되었다. 다행히 지난해 10월 바이든 정부는 한국 기업들에 대해 이 조치의 적용을 오는 10월까지 1년간 유예해줬다. 5개월여 남았다. 다만 유예가 연장될 가능성이 있다. 지난 4월3일 〈파이낸셜타임스〉는 ‘바이든 정부가 한국의 두 회사에 대해 유예기간을 내년(2024년) 10월까지 연장할 것을 검토 중’이라고 보도했다. 연장되든 안 되든, 미국은 언제든 유예를 철회할 수 있다. 해당 기업들의 비즈니스엔 위협적 불확실성이다. 삼성전자가 동아시아보다 건설 및 운영비용이 훨씬 높은 미국에 공장을 짓고 있는 것 역시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미국은 적은 물론 동맹국도 노련하게 조종하는 방법을 안다.

지난 1월 말엔 바이든 행정부가 반도체 제조 장비의 중국 수출통제를 일본·네덜란드 정부와 합의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둘 다 반도체 제조 장비 부문의 강국이다. 특히 네덜란드의 ASML을 겨냥한 것으로 보인다. ASML은 최첨단 반도체 제조에 필수적인 노광 장비를 제작하는 업체다. 일본엔 니콘과 도쿄 일렉트론이 있다. 미국은 10·7 조치의 기조대로 중국의 목을 조여가고 있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지난해 10월17일 스탠퍼드 대학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변곡점에 서 있다. 냉전 이후의 시대(post-Cold War:1990년대 초의 사회주의권 몰락 이후부터 최근까지)는 막을 내렸다. 지금 다음 시대를 형성하기 위한 뜨거운 경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 경쟁의 중심엔 기술이 있다.”

미국과 기술 측면에서 경쟁하며 다음 시대의 주역이 되려는 자는 누구인가? 중국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무엇을 할 것인가? 설리번이 말했듯, 중국의 기술 역량이 미국을 따라잡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정도로는 부족하다. 미국은 중국의 기술이 오히려 퇴보하도록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야 한다. 반도체법과 10·7 조치의 핵심이다.

이런 전략을 구상하고 실천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이 유일하다. 한국이 나서서 ‘우리 기술이 들어간 물품은 특정국에 팔지 마’라고 주장하면 웃음거리에 그칠 것이다. 정치·군사적 힘과 소프트파워는 물론이고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에서 점유 중인 가장 부가가치 높고 대체될 수 없는 영역(설계, 팹리스, 장비)을 무기로 삼아, 미국은 “다음 시대”를 열어나갈 작정이다. 남은 수순은 10·7 조치 방식의 대중국 수출 규제를 반도체에서 인공지능·생명공학·청정에너지 등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최근 척 슈머 민주당 의원은 비슷한 내용을 담은 법안(이른바 ‘중국 경쟁 2.0’)을 의회에 제출했다.

난처한 것은 한국이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이 긴밀히 협력하던 시대에 선진국으로 발돋움했다. 중국과의 무역관계가 삐걱거리면 엄청난 타격이 불가피하다. 바이든 정부는 한국의 이런 처지를 감안해 10·7 조치를 잠정 유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폭풍 전의 고요일 수밖에 없다. 중국의 기술 수준을 퇴보시키려는 미국의 의지는 강고하고, 새로운 시대의 글로벌 패권을 둘러싼 이 싸움에서 한국은 미국에겐 장기말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미국의 강압에 적극적으로 저항하기도 힘들다. 미국은 IT 부문의 글로벌 ‘기술 표준’을 만들어온 나라다. 컴퓨터만 해도 20세기 중반의 미국에서 ‘CPU(시스템 반도체)와 메모리 반도체의 협력 체제’란 틀을 부여받아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세계 각국은 그 틀 안에서 관련 기술을 개발하며 경쟁해왔다. 반도체 기술 역시 발전의 한계에 도달했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2나노급 양산이 눈앞에 다가오면서 반도체를 더 작게 만들기는 어렵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새로운 기술발전 경로가 필요한데, 이 역시 현재로서는 미국이 주도할 가능성이 높다. 반도체법의 총예산(2800억 달러) 가운데 1000억 달러 이상을 과학과 연구개발 부문에 배정한 것은 이런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터이다. 한국은 복잡한 계산을 해야 한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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