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의 한 최근 기사(3월30일)는 중국 세관 공무원의 밀수범 적발 에피소드를 담았다. 세관원은, 임신한 지 5~6개월밖에 되지 않았다는 여성의 배가 지나치게 볼록한 것이 수상했다. 수색했더니, 과연 그녀는 허리에 꾸러미를 두르고 있었다. 꾸러미 안에서 발견된 것은 무엇이었을까? 마약이나 무기가 아니라 반도체 칩 202개였다.

지난해 미국 바이든 행정부의 10·7 조치 이후 실제로 중국에서는 반도체 품귀 현상이 격심한 모양이다. 첨단 반도체는 물론이고 이를 제조할 장비도 수입하기 어렵게 되면서 반도체 밀수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같은 기사에 따르면, 국유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인 YMTC 등 대기업들도 10·7 이후 반도체 칩 생산에 큰 차질을 빚고 있다. YMTC는 수입 장비로 생산라인을 구축할 수 없게 되면서 2023년도 사업계획도 작성하지 못했다. 중국 내 장비업체들에 냈던 주문도 취소해야 했다. 중국 내 반도체 공급망이 요동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의도가 드디어 관철된 것일까.

중국 국유 메모리 반도체 제조업체인 양쯔메모리테크놀로지 (YMTC) 본사 모습. ⓒYMTC

미국 ‘와드와니(Wadhwani) 인공지능 및 첨단기술 연구센터’의 그레고리 앨런 이사는 미국 민간 싱크탱크 CSIS(전략국제연구센터)에 기고한 보고서(5월3일)에서 “지난해 10월7일의 수출통제를 계기로 미·중 관계와 국제정치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10·7 조치의 기본 논리와 시행 방식이 지난 25년간 미국의 대중국 무역 및 기술 정책을 완전히 뒤집었다며 그 이유로 세 가지를 들었다.

첫째, 그동안 미국의 대중국 수출통제는 해당 물품이 군사적 용도나 특정 기업(미국이 제재한 ZTE나 화웨이)에 사용되는지 여부를 따져 시행되었다. 그러나 10·7 조치는 지리적 의미에서의 중국 전체를 규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 둘째, 10·7 조치 이전의 미국은 중국의 기술발전 자체는 허용하되 속도만 제한했다. 미국의 기술적 우위를 일정한 폭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새로운 수출통제의 목표는 중국 반도체 산업의 기술 수준을 적극적으로 퇴보시키는 것이다. 셋째, 새 정책은 중국이 반도체 부문에서 선진 기술의 문턱으로 올라오는 것 자체를 저지하려 한다.

그러나 10·7 조치 이후 중국은 눈에 띌 만한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정부 관료 및 학자들이 국제 포럼에서 미국을 공개 비판하거나, 이미 실효성을 상실해버린 세계무역기구(WTO) 분쟁해결기구에 미국을 제소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은 미국에 어떻게 대항할 수 있을까? 가장 확실한 대안은 중국 반도체 기술의 자립이다. 중국의 관점에서 국제 문제를 고찰하는 매체인 〈시니피케이션(Sinification)〉은 지난 2월1일 베이징 대학 루펑 교수와 한 인터뷰를 게재했다.

과거부터 ‘중국의 독자적 기술혁신’을 주창해온 루 교수는 인터뷰에서 “중국은 반도체에 대해 독자적 산업 기반 개발을 목표로 포괄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반도체 설계에서 제조공정에 이르기까지 반도체 공급망의 거의 전 부문에 이미 중국 기업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동차, 전자기기 생산업체 등 중국산 반도체들을 수요할 중국 업체도 많다. 그렇다면 이런 기업들 간에 수요-공급망을 연결해서 ‘중국 내 공급망’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루 교수는 외국산 장비와 소재들을 중국산으로 대체하는 ‘반도체의 탈(脫)미국화’가 가능하다고 믿는다. 물론 중국산 장비만으론 10나노급보다 미세한 최첨단 반도체를 생산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국 기업들은 크기 기준으로 28나노 이상인 ‘레거시 반도체’에는 경쟁력이 있다. 레거시 반도체는 비교적 옛 공정으로 생산되는 제품들이지만 여전히 다양한 산업에 필수적인 중간재이며 이에 대한 수요도 계속 올라가리라 예측되고 있다. 그렇다면 최첨단 반도체보다 레거시 반도체를 생산할 수 있는 국내 공급망을 강력히 구축하는 방법으로, 중국이 이 부문에서 글로벌 차원의 경쟁 우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루 교수는 중국이 일단 레거시 반도체의 세계적 강자로 부상하면, 이를 무기화(weaponizing)해서 미국 등 기술 강국들을 압박할 수도 있다고 본다. 지금 미국이 중국에 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8년 2월26일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한 전시회장에 걸린 중국 통신사 ZTE 로고. ⓒEPA

중국이 가진 반격 카드

앨런 와드와니 이사는 중국이 2018년 4월, 미국 트럼프 정부가 중국의 거대 통신업체인 ZTE를 제재할 때부터 중국은 반도체 산업을 국가안보 측면에서 바라보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ZTE가 반도체 칩 부족으로 생산을 중단하자 중국 지도부는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이후 중국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각자 대규모 반도체 펀드를 조성하는 한편 보조금, 세제 혜택, 공공지분 투자, 저금리 대출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국내 반도체 산업을 지원하면서 대미 의존도를 줄이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편 중국의 약점은 강점이기도 하다. 중국은 국내 반도체 수요의 80% 정도를 해외에서 수입한다. 2020년의 반도체 수입액이 무려 3500억 달러를 웃돈다. 반도체 제조 장비 부문에서도 중국은 전 세계 수요의 25~30%를 점유한다. 이 정도의 고객을 무시할 수 있는 공급업체는 없다. 미국의 ‘중국 포위망’에 참여한 국가의 반도체 관련 기업들이 당장은 바이든 정부의 위세에 휘둘리고 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반발심이 강해질 것이다. 내부 분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지난 3월 말, 중국 인터넷안보심사판공실은 국내에서 판매되는 마이크론(미국의 메모리 반도체 대기업) 반도체에 대한 사이버 안보 심사를 시행한다고 밝혔다. 중국 정부가 대미 보복 조치에 나선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미국도 트럼프 행정부 시절, 중국의 통신장비 업체 화웨이가 백도어를 통해 안보 관련 정보를 빼내 간다며 ‘사이버 안보’ 이슈를 터뜨렸다. 이 사태는 화웨이에 대한 제재로 이어졌다. 마이크론의 매출액 중 25% 정도가 중국에서 나온다. 만약 중국 측이 마이크론을 제재하면 마이크론뿐 아니라 ‘반도체 산업 부흥’을 외쳐온 미국 정부도 타격을 받는다. 결국 한국으로 불똥이 튀었다. 지난 4월25일자 〈파이낸셜타임스〉는 "중국이 마이크론 반도체 판매를 금지할 경우 이에 따른 중국 내 반도체 부족분을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중국에 수출하지 않도록 해달라고 한국 정부에 요청했다"라고 보도했다. 이 사건은 앞으로 돌출될 ‘중국 포위망’ 내부 분란의 주요 사례로 발전할 수 있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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