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중에 원해서 (군대를) 온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유야 어찌되었든 조국의 부름을 받았다. 이 땅의 평화를 위해 반드시 지불해야 할 대가이다.”

대대장의 훈화가 끝나자 ‘진짜 사나이’의 반주가 울려퍼졌다. 빨간 셔츠에 선글라스를 낀 조교들은 팔을 어깨만큼 벌리고 ‘군인 박수’를 쳤다. 12월7일 오후 1시30분, 경기도 의정부 306 보충대대. 매주 화요일 이곳에서 신병 700여 명과 가족 및 연인이 이별을 맞이한다.

ⓒ시사IN 안희태어머니들은 입대식에서 훈련소로 들어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며 가장 많은 눈물을 보인다.
앳된 얼굴의 김준호씨(20·대학생)는 카키색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어머니 문경림씨(51·주부)는 “덤덤하다”라는 아들의 손을 꼭 잡았다. 어린 줄만 알았던 아들이 대견했다. 그렇다고 걱정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울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장병 여러분은 이제 모두 앞으로 나와주십시오”라는 방송과 동시에 걸어 나가는 아들의 뒷모습을 보니 왈칵 눈물이 솟구쳤다. 그녀는 “때가 때인지라 안 보내고 싶지만, 그럴 방법도 없고…. 전쟁 같은 게 안 나기를 바랄 뿐이다”라고 말하며 보충대를 빠져나갔다.

밤마다 ‘군인을 위한 기도’를 하다

연평도 포격 이후 한반도에 전쟁의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불안감도 높아지고 있다.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는 더욱 그렇다. 2009년 현재 65만5000명이 군대에 있다. 상시적 불안을 겪는 ‘군인의 어머니’ 수도 그에 상응하는 규모라는 얘기다. 육·해·공군에 아들을 보낸 전국 각지의 군인 어머니 10명에게 최근의 심경을 물었다.

아들이 백령도 해병대에 복무 중인 윤정옥씨(52·회사원)는 군과 관련된 뉴스만 나오면 신경이 곤두선다. 예전 같으면 대충 보고 넘길 사소한 뉴스 하나에도 귀를 기울이게 된다. ‘연평도 후유증’이다. 지난해 9월 아들이 입대한 이후부터 군의 사건·사고가 더 많게 느껴진다(2010년 한 해에만 천안함 사건으로 46명, 연평도 포격으로 2명, 남한강 보트 전복 사고로 3명 등이 사망했다). 한 달을 기다려 찾아간 군 면회 당일은 천안함 사건이 터진 바로 다음 날이라 아들의 얼굴만 보고 헤어져야 했다.

홍 아무개씨(55·주부)는 전쟁 이야기에 금세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연평도 포격이 터진 뒤 12월에 군대를 간 아들이 걱정되지 않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홍씨는 “전쟁은 안 나야죠, 안 나. 별일 있겠어요? 전쟁 안 나요”라며 반복적으로 되뇌었다.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문을 외는 것처럼 보였다. 김영숙씨(56·주부)는 아들이 해병대를 간 지난 7월부터 밤마다 ‘군인을 위한 기도’를 한다.

군인 아들을 둔 어머니들은 고위층 자녀나 연예인의 병역 비리 소식을 들을 때마다 화가 난다. 군에서 고생할 아들이 생각나서다. 동시에 미안한 마음도 든다. 박 아무개씨(50·회사원)는 “그런 보도를 볼 때면 군대도 안 간 정치인들이 전쟁 운운하는 것이 같잖게 여겨지지만, 한편으로는 ‘내 아들도 안 보낼 수 있었으면 안 보냈을 텐데’라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박정미씨(49·주부)도 천안함 사건을 보면서 아들을 해병대에 보낸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박씨는 “한 번도 아이를 군대에서 빼보겠다는 마음을 먹은 적이 없지만 천안함 사건으로 죽은 군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만의 신념 때문에 아들을 구렁텅이에 밀어넣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라고 말했다.

정치에도 더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전쟁은 정치인들의 순간적인 판단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김영희씨(52·주부)는 “어찌 보면 전쟁은 한때 같은 나라였던 남북 간의 집안싸움 같은 거다. 그 싸움에 우리 아들들을 희생당하게 해서 되겠나”라고 말했다. 그래서 양영애씨(47·자영업)는 한나라당 안상수 대표의 ‘보온병 사건’에 마냥 웃을 수가 없다. 주변 사람들은 보온병을 포탄으로 착각한 안 대표를 향해 ‘〈개그콘서트〉 찍냐’고 비웃었지만, 양씨는 부아가 났다. “군대도 안 간 사람들이 나라의 안보를 이야기하고, 아들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데에 열 받는다”라고 그는 말했다. 양씨는 무슨 일만 나면 ‘벙커’에 들어가 말만 하는 정부를 믿을 수 없다. 정작 위험이 났을 때 앞세우는 건 최전방 GOP에서 근무하는 아들을 비롯한 일반 군인들이어서다.

어머니는 평화를 지킬 최고 주체

‘의식화’한 군인 어머니들은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한다. 인터넷 다음 카페 ‘미 쇠고기 군납반대’는 지난해 1월 군인 아들에게 미국산 쇠고기를 먹일 수 없다는 132명의 평범한 어머니들이 모여 만들었다. 천안함 사건 후에는 ‘여성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시사IN 안희태12월7일 경기도 의정부 보충대대에서 이별 행사를 마치고 흩어지는 군인 가족 및 지인들.
이 어머니들을 보고 ‘이기적인 모정’이라 비난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들은 자신의 아들을 통해 정치·사회 문제에 눈떴고 나아가 전쟁과 평화의 문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노라고 말한다. 정순옥씨(50·주부)는 요즘처럼 평화에 대해 깊이 생각한 적이 없다. 연평도 포격 이후 매일 전투복을 입고 잔다는 아들의 전화를 받으면 입이 바싹 마른다. 강원도 양구 전방으로 아들을 보낸 정씨에게 전쟁은 먼 이야기가 아니었다. “아들이 군대에 안 가 있었으면 ‘이번 연평도 포격을 보면서도 왜 우리 정부가 좀 더 공격을 안 했나’라고 생각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라고 그는 잘라 말했다. 전쟁은 할리우드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라, 아들이 당장 총알받이가 될 수 있는 현실로 다가왔다. 앞으로 혹여나 일어날 수 있는 전쟁에 누군가의 아들이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박어진씨(55·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여는 여성모임 평화소위원회 대표)는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들이야말로 평화를 지킬 최고 주체라고 주장했다. 내년 3월 군대 갈 아들을 둔 박씨는 “생애 최고 작품인 자식을 군대에 보낸 어머니들이 전쟁과 평화에 대해 더 잘 느끼고 잘 말할 수 있다. 내 자식이자 누군가의 자식일 군인들을 사지로 내보내지 말자고, 여성들이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행복한 세상을 여는 여성모임’을 비롯한 34개 여성 단체는 12월9일 서울 광화문에서 ‘여성들은 한반도에서 그 어떤 군사적 행동과 긴장도 지속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한다’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좋은 전쟁도 나쁜 평화도 없다는 게 군인 어머니들의 체감이다.

기자명 김은지 기자 다른기사 보기 smi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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