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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님’은 잊어도 ‘장포스’는 못 잊는다

고제규 기자 unjusa@sisain.co.kr 2010년 08월 06일 금요일 제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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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군대에서 ‘형님’이 은어로 쓰인 적이 있었다.  계급 대신 후배 장교가 선배 장교에게 은밀하게 ‘형님’이라고 부르면, ‘아 이 친구도 우리 하나회 회원이구나’ 하고 감을 잡았던 ‘박통’ 때였다. 박통이 키운, 철통보안 하나회가 다름 아닌 박통이 뿔나서 커밍아우팅을 당했다. 그 유명한 윤필용 사건이다.

1973년 윤필용 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 술자리에서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박정희 대통령을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는 형님이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가 박통의 분노를 샀다.

‘MB 사찰’의 원조 격인, 낮말도 박통이 듣고 밤말도 박통이 듣던 때라 잘나가던 하나회 형님 윤필용도 옷을 벗어야 했고 감옥살이까지 했다. 하지만 형님을 따르던 수많은 하나회 동생 덕에 그는 권력의 양지에서 승승장구했다.

그 윤필용씨가 지난 7월24일 세상을 떠났다. 그들의 세계에서 한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인가 보다. ‘차명진 황제’도 넘보지 못하는, 전 재산 29만원으로 몇 년째 ‘최고 생계비 체험’을 하는 전두환씨가 이번에도 동생들을 거느리고 장례식장을 찾아 일제히 머리를 조아렸다.

전씨가 장례식장을 찾은 이틀 뒤 장태완 전 장군도 세상을 떴다. 그 영결식장(사진)에 전두환씨는 발길도 안 했다. 아니 못했다. 하나회 동생들 발길도 뜸했다.

   
ⓒ뉴시스
1979년 12월12일 형님에 오른 전두환이 동생들과 함께 쿠데타를 감행한 그날 밤 10시, 장태완은 신군부 심장부에 직접 전화를 걸었다. 신군부 쪽이 “장 장군 우리와 같이 일하자”라며 회유하자, 그는 “이 반란군 놈들, 꼼짝 말고 거기 있거라. 내 전차와 포를 갖고 가서 모조리 대갈통을 날려버릴 테니”라고 일갈했다. 군인 장태완은 이미 대세가 판가름 났지만 반란군 진압에 나섰다.

성공한 반란과 실패한 진압의 길은 확연히 갈렸다. 장태완은 강제 예편됐다. 24평 집에서 가택연금도 당했다. 육군 참모총장 아들을 기대했던 부친은 그가 체포됐다는 뉴스를 보고 그날로 곡기를 끊었다. 1980년 4월17일 그의 부친은 ‘예부터 역모자들 손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가야지’라며 눈을 감았다.

비극은 계속됐다. 가택연금 중인 아버지 때문에 보안대원과 함께 생활하면서도 그의 아들은 1981년 서울대 자연대 수석을 차지했다. 장태완이 자랑하던 그 외아들은 1982년 1월 낙동강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에서 변사체로 발견됐다. 아버지 장태완은 ‘내 생명보다 소중한 OO를 사랑의 품으로 인도하여 영생토록 해주십시오’라는 피눈물 나는 글을 비문에 새겼다. 

역사는 돌고 돌아 ‘성공한 쿠데타’가 단죄되면서 장태완은 참군인의 표상으로 남았다. 누리꾼들은 떠난 두 별 중 ‘형님’은 잊고 ‘참군인’을 기억했다. 누리꾼들은 ‘대한민국의 진정한 군인’ ‘장포스’ ‘영웅’이 떠났다며 고인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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