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정 월드컵 첫 16강 진출을 일궈내라.” 남아공 월드컵 출전을 앞둔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떨어진 지상 과제다.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원정 첫 승을 거둔 한국은 이번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한 단계 더 나아가 16강 진출을 목표로 삼았다. 16강에 진출하려면 같은 B조에 속한 그리스·아르헨티나·나이지리아와 싸워 최소 조 2위가 되어야 한다. 1승1무1패로는 불확실하다. 1승2무 이상 성적을 거둬야만 16강행을 낙관할 수 있다.

ⓒ뉴시스한국 국가대표팀 허정무 감독(가운데)은 “(B조에서) 한국이 최약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허 감독은 “당당하고 유쾌하게 도전”해 이변을 일으키려고 한다.

한국은 B조 최약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부터 가장 낮다. 월드컵 2회 우승에 빛나는 아르헨티나와는 객관적인 전력과 월드컵 경험 등에서 모두 밀린다. 다만 그리스·나이지리아보다 월드컵 경험이 많은 게 위안일 뿐이다. FIFA뿐만 아니라 세계 언론도 아르헨티나가 조 선두에 오르리라 예상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리스와 나이지리아가 남은 16강행 티켓 1장을 다툴 것으로 본다. 한국의 16강행을 전망하는 곳은 한국 언론이 유일하다. 허정무 국가대표 감독도 “한국이 최약체인 것은 부인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6월12일 토요일 오후 8시30분 그리스와 첫 경기를 벌인다. 16강 진출 여부가 갈릴 가장 중요한 경기다. 한국으로서는 무조건 이겨야만 16강행 희망을 이어갈 수 있다. 반대로 패할 경우 2차전 아르헨티나전, 3차전 나이지리아전에서 큰 부담을 안을 수밖에 없다. 전력이 밀리는 데다 몸까지 굳어지면 승패를 떠나 우리가 준비한 플레이를 하는 것부터가 어렵다. 그리스에게 지면 사실상 16강 진출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그리스는 2004년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강호다. 장신 선수들을 앞세워 철옹성 수비를 구축하다가 3~4차례 역습 찬스에서 골을 넣는 스타일이다. 한국으로서는 공격 위주로 나설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보다 골을 넣기 더 힘든 상대일지 모른다. 게다가 두 번째 월드컵 무대를 밟는 그리스의 목표도 우리와 같은 16강 진출이다. 그리스도 한국전에 모든 걸 걸고 임한다. 한국-그리스전이 입장권 판매에서는 가장 저조한 경기로 꼽히지만 양 팀에게는 운명이 걸린 일전이다.

ⓒReuter=Newsis그리스 선수들이 오토 레하겔 감독을 헹가래치고 있다.
두 팀 모두 신중하게 플레이를 할 수밖에 없다. 승부는 1골 싸움이다. 한국도 한 골을 넣으면 수비에 무게를 둘 게 분명하고 그리스도 선취골을 넣을 경우 수비벽을 더 두껍게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결국 선취골을 넣은 팀이 최소한 패하지 않을 것 같다. 반대로 선취골을 내준 팀은 상대의 밀집수비에 막혀 골을 넣는 데 무척 애를 먹을 것이다. 일단 한국은 신장 190cm를 넘는 장대 선수를 앞세운 그리스의 ‘세트피스’ 공격을 철저하게 방어해야 한다. 한국 선수들이 세트피스 수비 때 공만 바라보다가 선수를 놓치는 경향이 많다. 그리스에게 이런 허점을 보이면 실점하기 쉽다.

그리스에서는 남아공 월드컵 유럽 지역 예선 득점왕(10골)에 오른 테오파니스 게카스가 요주의 인물이다. 무실점으로는 16강을 이룰 수 없다. 16강에 오르려면 골이 필요하다. 한국은 날카로운 역습으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선수가 아무리 빨라도 공보다 빠를 수 없다. 그리스 수비가 아무리 강해도 수적으로 부족하면 약점을 드러내게 마련이다. 한국은 볼을 가로채자마자 정확한 전진 패스로 상대 수비진을 무너뜨린 뒤 한두 차례 칼날 패스에 이은 깔끔한 슈팅으로 골을 노려야 한다. 패스 타이밍이 늦거나 역습 찬스에서 볼을 돌리면 그리스 수비진은 모두 제자리를 잡는다.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리스 수비진을 뚫고 골을 넣는 것은 더 어렵다. 박주영(AS 모나코)·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청용(볼턴) 등 작지만 빠른 선수들의 활약이 절실한 이유다.

메시 막을 비장의 카드 있나

6월17일 오후 8시30분 한국이 두 번째로 맞붙을 상대는 굶주린 늑대를 연상시키는 아르헨티나다. 객관적인 전력 등 모든 면에서 한국이 밀린다. 게다가 한국은 고지와도 싸워야 한다. 한국이 아르헨티나와 맞붙는 곳은 해발 1753m에 위치한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이다. 물론 아르헨티나는 남아공 월드컵 남미 예선를 치르는 동안 고지에서 벌인 경기에서는 부진했다. 하지만 이번만은 다르다. 아르헨티나는 1차전 나이지리아전부터 요하네스버그에 있는 엘리스파크에서 치른다. 그리고 이에 앞선 마지막 현지 적응 훈련도 고지에서 진행한다. 1차전을 평지에서 치르고 고지로 옮기는 한국과는 달리 아르헨티나는 현지 적응 훈련부터 1·2차전까지 고지 생활을 하는 것이다. 한국보다 고지 적응을 잘할 수밖에 없다. 한국이 그리스를 꺾는다면 아르헨티나와 맞서 다소 여유 있게 플레이하겠지만, 반대로 그리스에게 패하면 우승 후보 아르헨티나를 꼭 이겨야 한다는 부담까지 안게 된다.

ⓒReuter=NewsisB조 1위가 예상되는 아르헨티나의 디에고 마라도나 감독(오른쪽).
한국-아르헨티나 전 승부는 한국의 체력에서 갈릴 것으로 보인다. 한국이 역대로 강팀들과 맞서 대등한 경기력을 보인 비결은 강한 압박이었다. 기술이 좋은 상대가 공을 잡자마자 한국 선수 2~3명이 동시에 달려들어 상대가 기술을 부리지 못하게 원천 봉쇄하는 식이다. 강한 압박은 선수 전원이 상대보다 더 뛰어야만 가능하다. 체력적으로 뒷받침되지 못하면 압박이 느슨해지고 결국 상대에게 주도권을 내준 채 밀리기 십상이다. 현재 한국 선수들이 다른 팀에 비해 체력적으로 앞선다고 말할 수 없어 걱정스럽다.

아르헨티나 키 플레이어는 리오넬 메시(바르셀로나)다. 메시는 2009 시즌 FIFA 올해의 선수상 등 개인상을 모두 휩쓸며 최고 시즌을 보냈다. 올 시즌에도 스페인 프로축구와 유럽챔피언스리그에서도 소나기골을 퍼붓고 있다. 메시를 막을 묘안은 없다. “메시가 공을 잡기 전부터 압박해서 공을 아예 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라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릴지 몰라도 축구장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다고 메시에게 수비수 2~3명을 붙일 수도 없다. 아르헨티나 선수들은 모든 포지션에서 세계 정상급이다. 메시를 막기 위해 한국 수비수 2~3명이 쏠리면 다른 쪽에 구멍이 나게 되고 그곳에 있는 아르헨티나 선수에게 더 결정적인 찬스를 줄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한국은 선수 전원이 간격을 고르게 유지하면서 자기 자리를 지키다가 순간적으로 여러 명이 메시를 압박하는 협력 수비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메시도 모든 경기에서 골을 넣는 것은 아니다. 한국전에서 컨디션이 나쁘기를 기대하는 게 가장 확실한 방어책인지 모른다”라는 자조 섞인 말도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일리는 있다.

선취골 넣으면 나이지리아에 승산 있어

한국이 만일 그리스·아르헨티나를 거푸 꺾고 2승을 거두면 남은 나이지리아전 결과와 무관하게 16강에 오른다. 하지만 우리가 초반 2경기를 모두 이기는 것은 무척 어렵다. 초반 2연승을 거두지 못한다면 결국 마지막 3차전 나이지리아전(6월23일 오전 3시30분) 결과가 16강 진출을 결정짓는다. 나이지리아는 월드컵 직전 사령탑을 교체했다. 자국의 샤이부 아모두 감독으로 지역 예선을 통과했지만 지난 2월 스웨덴 출신 라르스 라예르베크 감독을 사령탑으로 바꿨다. 라예르베크 감독은 2002 한·일 월드컵, 2006 독일 월드컵에서 스웨덴을 이끌었지만 남아공 월드컵 진출권을 따내지 못한 뒤 경질됐다. 라예르베크 감독은 월드컵 경험이 있다. 하지만 아프리카 팀에 대한 경험은 전무하다. 아프리카 문화·축구·선수 등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월드컵 지휘봉을 맡은 것은 일종의 모험이다.

ⓒReuter=Newsis라르스 라예르베크 나이지리아 감독(위)은 스웨덴 출신이다.
우리나라는 역대 전적에서 아프리카 국가에 약하다. 아프리카 선수들은 체격이 크면서 체력이 뛰어나다. 고무공 같은 탄력과 유연성 덕분에 어떤 위치에서, 어떤 자세로도 강력하고 정확한 슈팅을 날릴 수 있다. 슈팅 타이밍도 빠르고 드리블과 패스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 만큼 창조적이다. 아프리카 팀과 싸워본 경험이 적은 한국이 아프리카 징크스에 시달리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당연하다.

아프리카 선수들의 단점은 몸이 아니라 마음에 있다. 아프리카 팀들은 골을 많이 넣고 신바람을 내면 브라질 못지않은 무서운 팀으로 변하지만, 거푸 골을 내주거나 팀워크가 흔들리면 모래알처럼 바뀐다. 아프리카 팀과 싸울 때는 무엇보다도 우리 페이스로 경기를 운영하는 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른바 서로 ‘치고 받는’ 난타전을 벌이면 패하기 쉽다. 한국은 침착하고 노련하게 경기를 운영하면서 가능한 한 오랜 시간 볼을 소유하다가 찬스에서 선취골을 넣는 게 중요하다. 아프리카 선수들은 선취골을 내주고 짧은 시간에 만회골을 넣지 못하면 경기를 포기하는 경향이 짙다. 우리가 갖고 있지만 나이지리아에는 없는 것, 그게 바로 단체 의식·팀워크·애국심이다.

허정무 감독은 한국의 남아공 월드컵 16강 진출 도전을 “당당하고 유쾌한 도전”이라고 표현했다. 과거 월드컵에 나선 한국은 경기를 시작하기 전부터 상대의 이름값에 주눅이 들어 다리부터 떨렸다. 기량이 부족한 데다 긴장까지 하면 그동안 자기가 준비해온 플레이를 제대로 할 수 없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지도 못한 채 시간은 금세 지나갔고 남은 것은 패배의 쓴맛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한국은 다르다. 잉글랜드·스코틀랜드·프랑스 등 유럽 리그에서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기량을 겨루는 해외파가 생겼다. 그리고 일본파·국내파 선수들도 그동안 선배들이 막연하게 앓았던 유럽 및 남미 징크스를 떨어냈다. 한국이 이번 월드컵에서 16강에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분명한 것은 우리 선수들이 세계 정상급 선수들과 당당하게 맞서 후회 없이 맘껏 싸우고 돌아올 거라는 사실이다.

기자명 주강빈 (스포츠 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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