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벽 너머

카트야 호이어 지음, 송예슬 옮김, 서해문집 펴냄

“히틀러와 스탈린 사이에 갇히다.”

동독(독일민주공화국)은 1949년 건국되어 1990년 10월 지금의 독일 연방공화국(이전엔 서독)으로 흡수 통합되면서 사라진 나라다. 한국인에게 동독은, 슈타지(비밀경찰)로 겨우 유지되었고, 서독과의 경계에 장벽까지 세워가며 인민들을 통제하다가 하루아침에 망한 공산국가로 기억될 뿐이다. 〈장벽 너머〉는 이 나라의 일대기다. 히틀러에게 추방당한 독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처음엔 스탈린의 감시 아래서, 나중엔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독일식 사회주의 국가를 만들어가는 궤적을, 저자는 담담히 추적한다. 단순한 정치사가 아닌 광범위한 기록물을 바탕으로 억압뿐 아니라 기회와 소속감도 존재했던 동독 사회의 각계각층 인물들이 총천연색으로 등장한다.

 

각인된 지식

조르조 발로르티가라 지음, 김한영 옮김, 위즈덤하우스 펴냄

“나는 지식의 시작을 경험과 배움의 산물이 아닌, 다른 가능성으로 본다.”

병아리와 신생아의 머릿속에 매료된 동물행동학자의 이야기다. 이 ‘작은 뇌들’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통해 그가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경험 이전의 지식’이다. 갓 알에서 깨어난 병아리가 어미 닭을 찾는 상황을 상상해보자. 여러 닭 머리 그림 가운데 병아리는 둥근 윤곽 안에 역삼각형 점이 찍힌 도식적인 얼굴 형태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저자는 모든 척추동물의 뇌에는 얼굴 인식 능력, 살아 움직이는 것에 이끌리는 능력(유생성 인지) 등 생존과 상호작용에 필요한 지식이 깊이 새겨져 있다고 말한다. 이는 행동 분석에서 ‘유전과 경험’이라는 이분법을 깨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돌봄, 동기화, 자유

무라세 다카오 지음,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펴냄

“우리는 고령자를 부담스러운 짐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약에 찌들게 하지 않습니다.”

일본 후쿠오카의 노인요양시설 ‘요리아이의 숲’은 노인 돌봄과 관련된 통념에 정면으로 맞서는 곳이다. 격리와 통제가 없고, 노인들은 언제든 원할 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식판이 아닌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는다. 이곳에서 돌봄은, 단팥빵을 먹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주장하는 ‘나’와 혈당치를 걱정하는 ‘나’가 함께 존재한다는 걸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누군가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돌봄은 가능한가? 수많은 노인들을 돌보는 저자가 노년 돌봄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펼쳐냈다. 책의 마지막에 이르러 ‘하루 빨리 죽고 싶다’가 아니라 ‘오래 살고 싶다’로 수렴되는 이유가 있다.

 

조선소, 이 사나운 곳에서도

김그루 외 지음, 마창거제산재추방운동연합 기획, 코난북스 펴냄

“그러니 우리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에요.”

표지부터 강렬하다. 녹슨 선박 위에서 한 노동자가 붉은색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책에 나오는 증언처럼 “온몸이 컬러”이지만, 수십 년 일해도 ‘여자가 조선소에서 뭐 해’ 하는 소리를 듣는다. 도장, 용접, 급식, 세탁 등 조선소 안에도 다양한 역할과 위치에서 노동하는 여성들이 있다. 젠더 관점의 기록 활동에 오랜 경험을 쌓아온 저자들이 배 만드는 곳에서 일하는 여성 노동자 11명을 만나 저마다의 일과 삶을 기록해냈다. 인터뷰이 중 한 명은 이렇게 말한다. “특히 남자 독자들이 잘 읽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투쟁한다는 걸 느꼈으면 좋겠”다고. 어머니의 고생담이나 여성 ‘최초’로 주목받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생애와 투쟁을 역동적으로 담아냈다.

 

계급 천장

샘 프리드먼·대니얼 로리슨 지음, 홍지영 옮김, 사계절 펴냄

“한 가지 예를 들자면, 그는 대학 재학 중 학부 논문 자료 조사를 위해 부모님의 지원을 받아 뉴욕을 방문했다.”

마크는 39세의 젊은 나이에 영국의 주요 방송사에서 시사부장을 맡고 있다. 초고속 승진에 걸맞게 그는 유능하고 영리한 사람이다. 계급과 불평등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학자 샘 프리드먼과 대니얼 로리슨이 이 책을 쓰기 위해 만난 다양한 직업의 엘리트 175명 대부분이 그렇다. 마크에게 특별한 점이 있다면, 다른 인터뷰이들이 자신의 성공 스토리를 ‘능력’의 결과로 풀이하는 데에 비해, 자신이 특권층 출신이라는 “강력한 순풍”을 인정했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영국의 엘리트 직종에서 커다란 ‘계급 임금 격차’를 발견한다. 노동계급 출신은 상위 직업에 진출하더라도 특권층 출신 동료보다 평균 16% 적은 수입을 올린다. 엄연히 현실에 존재하는 ‘계급 천장’을 실증적으로 파고든다.

 

세상은 망했는데 눈 떠보니 투표일?!

조현익 지음, 키박 그림, 스튜디오하프-보틀 펴냄

“세상에는 마감 기한이 없어도 용기와 끈기를 가지고 해야 할 일도 있습니다.”

펼쳐볼 수밖에 없는 제목이었다. 총선이 코앞에 닥친 요즘, 뉴스를 들여다볼 때마다 하는 생각이기도 했다. 치솟는 물가, 불안한 국제 정세, 매일의 안전 등 일상 곳곳이 지뢰밭인데 정치는 서로를 심판하겠다고 아우성 아닌가. 그러나 ‘망한’ 자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저자는 ‘고작’ 4년이 아니라 앞으로 적어도 100년 이상 우리가 마주해야 할 장기적 쟁점을 분야별로 간결하게 정리했다. 한국 사회가 어느 자리에서 구체적으로 실패했는지 돌아보게 한다. 그 난장판 속에서도 우리가 만들어온 변화 역시 알 수 있다. 무엇보다 유용한 건 책의 4장이다. 투표를 위한 체크리스트가 여러분의 선택에도 도움이 되길 바란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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