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영이가 해성이를 좋아한다고 그러더라고요. 저희 이제 이민 가거든요. 그래서 가기 전에 좋은 기억을 만들어주고 싶어서요.” 저 멀리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걸 보며 나영이 엄마가 말했다. “근데 왜 가세요? 나영이 아빠 영화감독 하시고, 어머님은 그림 그리시고. 왜 그걸 다 버리고 가세요?” 궁금해하는 해성이 엄마에게 답해주었다. “버리는 게 있으면 얻는 것도 있거든요.”
한국 국적을 버리고 캐나다 국적을 얻은 가족. 자기 이름 ‘나영’의 과거를 버리고 영어 이름 ‘노라’의 미래를 얻는 아이. 그렇게 열두 살 때 헤어진 첫사랑과 스물네 살 때 SNS로 다시 만난다. 한동안 랜선 친구로 즐겁게 수다 떨다 차츰 멀어진 그가 서른여섯이 되어 눈앞에 나타난다. 열두 살, 그로부터 12년, 다시 또 12년. 꼬박 24년 만의 재회. 두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나누게 될까? 어떤 눈빛으로 마주보게 될까? 그러다 결국, 어떤 뒷모습을 서로에게 보여주게 될까?
올해 아카데미 작품상과 각본상 후보에 오른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셀린 송 감독의 실제 경험에서 시작되었다. 열두 살 때 캐나다로 이민 간 뒤 커서 미국 뉴욕에 정착해 남편과 살던 어느 밤, 한국에서 어릴 적 친구가 찾아왔다. “연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어렸고, 첫사랑이라고 하기에도 친구라고 보기에도 애매”한 사람,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서로 얼굴만 봐도 웃음이 나오는 관계”였던 그와 남편 사이에 앉아 셋이 함께 술을 마셨다.
한국어를 못하는 남편과 영어를 못하는 친구의 대화 주제는 오직 하나. 셀린 송. “나에 대한 이야기’를 서로에게 통역해주면서 감독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두 언어와 컬처만을 해석하는 게 아니라 나의 역사, 나의 아이덴티티까지 해석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현재·미래가 한자리에서 같이 술을 먹는다는 느낌”이 너무 특별해 영화로 만들고 싶어졌다. 희곡만 쓰던 그가 직접 시나리오를 쓰고 연출해 아름답고 웅숭깊은 데뷔작을 완성했다.
흔한 로맨스 영화의 삼각관계로 관객을 데려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한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잇는 거대한 삼각형 안으로 관객을 잡아끄는 영화다. 두 남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여자는 없다. 두 남자와 나 사이의 인연을 심사숙고하는 여성이 있을 뿐. 이미 내 다음 생의 전생이 되어 있을 현생을 지금 살아간다는 감각. 그 신비로운 느낌을 관객에게도 전염시키는 영화의 엔딩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나의 과거·현재·미래가 한자리에 앉아 같이 영화를 보는 것만 같은 그 기분, 참 특별했다.
내 삶의 플롯을 만든 건, ‘지금 내가 손에 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내가 손을 흔들어 떠나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의 나는 여기에 없지만 지금의 나는 예전의 내가 써 내려간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페이지를 넘겨야 이야기가 계속되듯이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저 쉼 없이 페이지를 넘기는 게 전부는 아닐까. 구겨지고 얼룩지고 찢어진 페이지라 할지라도 어떻게든.
나영이는, 아니 노라는 이제 막 새로운 페이지 하나를 넘겼다. 돌아서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끼는 이유는 간단하지 않다. 절대, 절대, 절대로 간단할 수 없는 그 마음을 나는 지금 차근차근 헤아려보고 있다. 노라와 해성이가 함께 보낸 ‘마지막 2분’의 시간을 두고두고 곱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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