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롭게 피아노 연주곡이 흐르는 노인요양원 복도에 한 청년이 나타난다. 총을 든 손과 팔에 핏자국이 보이고 그가 지나온 복도 끝에 휠체어가 넘어져 바퀴만 빙글빙글 돌고 있다. 창가에 주저앉아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유서를 읽어 내려가는 청년. “넘쳐나는 노인이 나라 재정을 압박하고 그 피해는 전부 청년이 받는다. 노인들도 더는 사회에 폐 끼치기 싫을 것이다. 옛날부터 우리 일본인은 국가를 위해 죽는 것을 긍지로 여겨왔다. 나의 이 용기 있는 행동을 계기로 진솔하게 논의하고 이 나라의 미래가 밝아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마지막 총성이 잦아들 때쯤 라디오에서 뉴스가 흘러나온다. “75세 이상 고령자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지원하는 제도 ‘플랜 75’가 오늘 국회를 통과했습니다. 노인 대상 혐오범죄가 전국에서 이어지는 한편 심각해지는 고령화 문제에 대처할 방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습니다. 처음 발의 때부터 논란이 되어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으나 오늘 마침내 제정되었습니다. 전례 없는 이 시도는 일본의 고령화 문제를 해결할 묘수가 될 것입니다.”

이 짧지만 강렬한 오프닝에서부터 나는 이미 자세를 고쳐 앉았다. 눈 크게 뜨고 이야기에 빠져들 준비를 마쳤다. 그사이 카메라는 요양원 복도를 떠나 어느 호텔의 복도에 자리잡았다. 주인공 미치(바이쇼 지에코)가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객실 정리를 돕는 78세 노동자. 아직 건강하고 제 한 몸 건사할 능력도 있고 비슷한 또래 친구들과 어울려 여행도 다니는, 그러니까 당장은 죽을 마음이 없는 ‘75세 이상 고령자’.

하지만 새로운 법이 시행된 뒤 자꾸 눈치가 보인다. “오래 살려고 용쓰는 것처럼 보일까 봐” 건강검진 받는 것도 점점 눈치가 보인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할 권리’를 보장해주었는데 당신은 왜 그 권리를 행사하지 않느냐고 온 세상이 눈을 흘기는 것만 같아 매일 눈치가 보인다. 주변의 나이 많은 사람들은 다들 눈치가 보이는 모양이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플랜 75’에 신청서를 낸다. “손주들을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수 있다”라면서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죽음’을 결국 스스로 선택하게 된다.

장편 데뷔작 〈플랜 75〉로 칸 영화제가 신인 감독에게 주는 황금카메라상에 ‘특별 언급’된 하야카와 지에 감독은 2016년 일본에서 일어난 실제 사건이 영화의 출발점이라고 말했다. 20대 남성이 장애인 시설에 들어가 19명을 죽이고 26명을 다치게 한 흉기 난동 사건. 사회적 약자를 “쓸모없는 존재, 짐만 되는 존재”로만 여기는 사회 분위기라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혐오를 핑계로 제도를 만든 뒤 “그럴듯한 말로 보기 좋게 꾸며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국가를 상상했다.

영화가 그려낸 ‘가까운 미래’가 나에겐 ‘오래된 미래’로 다가왔다. ‘인간의 존엄’이 ‘사회적 쓸모’에 따라 이미 ‘차등 지급’되고 있으니까. 고령사회의 책임을 고령자에게 떠넘기는 혐오의 시대를 이미 살고 있으니까. 놀랍도록 정교한 각본과 능숙한 연출로 그런 현실을 숙고하게 만드니까. 꼭 필요한 이야기를 참 잘해주어서 고마운 영화였다. 서늘한 이야기 끝에 한줄기 햇살 같은 따뜻함을 잃지 않는 영화라서 정말 고마웠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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