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빌리 엘리어트〉(2001)의 마지막 장면. 평생 자신을 뒷바라지한 아버지 앞에서 빌리가 힘껏 날아오른다. 한 마리 새처럼 멋진 자세로 하늘 높이 솟구친다. 그 아름다운 비상의 순간에 영화가 멈추고 우리의 눈물은 멈추지 않는다.

자, 조금 고약한 상상을 더해 다음 이야기를 써보자. ‘그 아름다운 비상의 순간’ 뒤에 곧바로 최악의 순간을 맞이한다면? 착지할 때 발목을 접질리며 쓰러져 공연을 망쳐버렸다면? 적어도 2년 동안 무대에 서지 못할 심각한 부상 때문에 무용수의 전성기를 하릴없이 흘려보내야 한다면?

영화 〈라이즈〉의 주인공 엘리즈(마리옹 바르보)가 지금 그 비극의 주연이 되었다. 파리 오페라발레단 수석 무용수 데뷔 공연에서 무대 바닥에 나뒹굴었다. 평생 이 순간만 기다렸는데 남은 평생 이 순간을 후회하며 살게 생겼다. 26세. 다른 분야라면 다시 기회가 오겠지만 몸을 쓰는 일이기에 다시 오지 않을 황금기가 째깍째깍, 사라져간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묻자. 춤출 때 어떤 기분이니?” 런던 발레학교 입학 오디션에서 빌리는 이렇게 대답했다. “모르겠어요. 그냥 기분이 좋아요. 제가 사라져버리는 것 같아요. 몸 전체가 변한다고 해야 하나? 마치 몸에 불이라도 붙은 느낌이에요. 전 그저 한 마리 새가 되는 거죠. 마치 전기처럼요.”

엘리즈도 그래서 춤을 췄을 것이다. 그래서 발레에 인생을 걸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친구를 붙잡고 이렇게 한탄하는 신세가 되어 있다. “이제 보니 발레는 다 망가진 여자의 삶을 그리고 있어. 늘 비운의 주인공이야. 마치 여자라면 당연히 끔찍하고 비극적인 운명에 묶여야 하는 것처럼. 생각해봐. 지젤, 백조의 호수… 다 죽은 여자들이잖아. 배신당하거나 우롱당한 여자들. 어딘가 부러진 여자들. 지금의 나처럼. 난 현실에서도 발레의 여주인공이 됐어.”

말하자면 이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의 만들어지지 않은 속편’이다. 화려한 비상 뒤에 찾아온 당혹스러운 추락의 해부. 바닥에 떨어지고 나서야 알게 된다.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동작만 춤이 아니라는 걸, 땅바닥을 구르는 순간에도 한 마리 새가 될 수 있다는 걸, 그냥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무것도 시작한 적 없다는 걸. 엘리즈는 매일매일 새로 배운다. 다시 웃고 다시 떠들고 다시 사랑하고 계속 춤을 춘다.

그리고 맞이하는 무대. 다시 춤을 추고 박수 받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영화가 멈추지 않는다. 다른 영화라면 멈추었을 순간을 지나 조금 더 보여준다. 바로 그 ‘조금 더’의 장면에서 나는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맞아, 저거였어. 저게 바로 청춘의 밤이었지. 무언가를 같이 해낸 사람들끼리만 느끼는 기분 좋은 피로감, 짜릿한 흥분에서 멈추지 않고 알 수 없는 공허함과 허전함으로까지 굽이쳐 흘러가는 이상한 마음. 그것까지 빠짐없이 담아낸 ‘진짜 청춘영화’를 너무 오랜만에 만났다. 그 덕분에 내 안에도 잠시 전기가 흘렀다.

비상(飛上)이 아니라 비행(飛行)을 배워가는 이야기. 높이 뛰는 대신 멀리 가는 방법을 익혀가는 주인공. 보는 내내 즐겁고, 보다 보니 찡하고, 보고 나면 흐뭇한 영화 〈라이즈〉는, 2024년 첫 ‘올해의 영화’다. 적어도 나에게는.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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