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8일 취재진이 방문한 충북 청주시 아파트 공사 현장에 쿠안 씨를 기리는 임시분향소가 설치되어 있다. ⓒ시사IN 신선영
2월18일 취재진이 방문한 충북 청주시 아파트 공사 현장에 쿠안 씨를 기리는 임시분향소가 설치되어 있다. ⓒ시사IN 신선영

공사 현장에 마련된 임시분향소는 텅 비어 있었다. 니엔 네고 쿠안 씨(사망 당시 35세)의 영정 사진과 작은 향로를 올려둔 테이블 하나, 돗자리 하나가 전부였다. 공사장의 하얀 먼지가 테이블 위에 내려앉아 있었다. 원청인 동양건설산업 소속 현장 직원은 “매일 아침 이곳에서 분향을 하고 사진을 찍어 공유한다”라며 당일 아침 단체 대화방에 올라온 분향소 사진을 보여줬다. 쿠안 씨와 함께 추락해 숨진 베트남 국적 노동자가 한 명 더 있었지만 영정 사진은 없었다. 그의 유가족은 사고가 발생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사와 합의를 마쳤다.

사고가 난 충북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오송파라곤센트럴시티 2차 공사 현장(오송파라곤 아파트 공사 현장)은 가랑비가 오는 흐린 날씨에도 마감 작업이 한창이었다. 대부분 한국인 노동자였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지금 같은 마감 작업 때가 아니라 철근 올리는 작업을 할 때 주로 고용한다. 힘들고 위험한 일이다. 그 단계는 전체 인력의 약 30%가 외국인 노동자다. 쿠안 씨도 그때 현장에서 일을 했다.” 추락한 노동자들을 인근 종합병원까지 이송했던 현장 직원이 말했다. 건설업에 종사하는 이주노동자들은 한국인 노동자가 기피하는 고위험 저임금 직종인 형틀공, 철근공에 60% 이상 몰려 있다.

지난해 7월6일, 쿠안 씨와 동료 노동자가 ‘갱 폼(외벽 시공 때 쓰는 임시 철골 구조물)’을 상부로 옮기기 위해 고정 나사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다가 25층 높이에서 추락해 숨졌다. 동양건설산업이 시공 중인 오송파라곤 아파트 공사 현장이었다. 한 층의 외벽 작업이 다 끝나면 갱 폼을 해체해서 이동시키는데, 이때 사고가 많이 발생한다. 인양 장비인 타워크레인에 갱 폼을 제대로 고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정 나사를 먼저 해체하는 경우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고정 나사를 풀고 다시 조립하는 시간 동안 크레인을 못 써서 공사가 지연된다는 이유에서다. 공사 현장에서 자주 일어나는 불법행위다.

쿠안 씨와 동료 노동자 역시 인양 장비에 갱 폼이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고정 나사 해체 작업을 했고, 하중을 감당하지 못한 갱 폼과 함께 추락했다. 갱 폼 아래 깔려 있던 쿠안 씨는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사고 발생 후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사망했다. 병원에 곧장 장례식장이 마련됐다.

베트남 국적 노동자 쿠안 씨의 아내 레티화 씨가 남편의 영정 사진을 안고 카메라 앞에 섰다. ⓒ시사IN 신선영
베트남 국적 노동자 쿠안 씨의 아내 레티화 씨가 남편의 영정 사진을 안고 카메라 앞에 섰다. ⓒ시사IN 신선영

사고가 발생한 당일, 쿠안 씨의 아내 레티화 씨(33)는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고 있던 여동생에게 전화를 받았다. 쿠안 씨가 일하는 공사 현장에서 사고가 났고 두 노동자가 병원에 실려 갔는데 목숨이 위태롭다는 소식이었다. 그중 한 명이 쿠안 씨일 수도 있다는 말을 듣고 화 씨는 기도를 시작했다. 30분 후, 쿠안 씨가 사망했다는 전화가 왔다.

베트남 작은 어촌마을 출신인 쿠안 씨는 2013년 레티화 씨와 결혼하고 이듬해인 2014년 한국에 들어와 선원으로 일했다. 쿠안 씨가 마지막으로 베트남에 들어간 때는 2018년 1월, 베트남 최대 명절인 설날이었다. 한 달여간 머물며 두 아이와 바다에도 놀러 갔다. 쿠안 씨는 “1년에 한 번씩은 꼭 이렇게 가족끼리 여행을 다니자”라고 약속했다. 화 씨는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라며 그날 함께 찍은 가족사진을 보여줬다.

쿠안 씨가 고된 바다 일을 정리하고 육지로 올라온 것은 비자가 만료된 2018년 8월이었다. 이때부터 사고가 날 때까지 쿠안 씨는 미등록 노동자로 여러 지역을 떠돌며 건설현장 청소 등 비숙련 노동을 이어갔다. 그러다 2023년 3월, 건설업 하청업체인 에이원산업개발과 근로계약을 맺었다. 오송파라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일을 시작한 것은 2023년 6월이다. 그로부터 한 달 뒤 그는 사고를 당했다.

화 씨는 쿠안 씨가 사고가 일어나기 몇 달 전부터 귀국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남편은 가족들이 함께 살 수 있는 집을 마련할 때까지 한국에서 일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밀린 임금만 받으면 어서 베트남으로 돌아오고 싶다는 말을 계속 했다. 정확한 이유도 없이 임금을 줬다가, 안 줬다가 해서 많이 힘들어했다.” 올해 설날에는 가족이 다 함께 모일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부부의 꿈은 그렇게 좌절됐다.

2014년 한국에 온 쿠안 씨는 선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사진은 2018년 한달 간 고향을 방문해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 모습이다. 쿠안 씨는 밀린 임금만 받으면 베트남으로 귀국할 계획이었다. ⓒ시사IN 신선영
2014년 한국에 온 쿠안 씨는 선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사진은 2018년 한달 간 고향을 방문해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간 모습이다. 쿠안 씨는 밀린 임금만 받으면 베트남으로 귀국할 계획이었다. ⓒ시사IN 신선영

‘이주노동자 유가족’이 된 후 벌어진 일

이주노동자의 유가족이 된 레티화 씨가 가장 먼저 겪은 일은 합의를 종용하는 전화를 받는 일이었다. 원청업체 사람인지 하청업체 사람인지도 알 수 없는 이들이 하는 말은 매번 비슷했다. “남편의 시신을 빨리 받게 도와줄 테니 회사와 합의해라” “빨리 합의하지 않고 시간을 끌수록 보상 금액이 낮아질 거다” “한국에 들어와서 보상금을 받고 그 돈으로 고향에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라”는 등의 내용이었다. 왜 사고가 일어난 건지 알려주지도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도 없었다. 겨를이 없는 중에도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쿠안 씨의 시신이 베트남에 인도된 이후에도 전화는 계속됐다.

쿠안 씨의 한국 장례식장에도 브로커들이 모여 들었다. 보상금을 많이 받게 해주는 법무법인을 알려주겠다는 중개인들이었다. 경남 창원에서 미등록 노동자로 일하고 있던 화 씨의 친척이 장례식장을 방문하자 고인의 친족인 것을 알아챈 브로커들이 그에게 접근하기도 했다. 한국 사정에 밝은 주변인들은 화 씨에게 “돈 얘기부터 꺼내는 사람은 누구도 믿으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이런 화 씨의 곤란한 사정을 알고 한국에서 일하고 있던 친척이 그를 대신해 이주민지원센터를 방문해 상담을 받았고, 센터에서는 민주노총 충북본부를 소개해주었다. 사고가 발생하고 한 달이 지난 2023년 8월, 화 씨는 처음으로 민주노총 담당자와 연락을 나누고 사건 일체를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12월8일, 쿠안 씨가 사망한 지 6개월이 흐른 지난해 연말. 화 씨는 회사 측과 직접 교섭을 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그가 한국에 입국하며 발급받은 비자는 유효기간이 3개월인 C3-1 단기 방문 비자다. 민주노총에서 주베트남 한국 대사관에 초청장과 신원보증서 등 서류를 제출해 발급받을 수 있었다. 일련의 과정은 단체의 협력 없이 이주노동자 유족 혼자서 산업재해의 피해를 규명하고 법적 절차를 밟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국내에 오래 머물 수 있는 비자를 발급받는 일마저 쉽지 않다.

1월23일, 레티화 씨가 청주시 오송파라곤 아파트 사고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단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1월23일, 레티화 씨가 청주시 오송파라곤 아파트 사고 현장을 둘러보기 위해 단지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연합뉴스

첫 교섭은 1월23일 오송파라곤 아파트 공사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화 씨는 남편이 마지막까지 일하다 목숨을 잃은 현장을 꼭 방문하고 싶었다. 풀리지 않는 의문이 많았다. 쿠안 씨와 함께 일했던 베트남 국적 노동자들이 알려준 이야기들의 진실을 알고 싶었다. “갱 폼 작업이 무서워서 15분간 버티다가 관리자의 성화에 어쩔 수 없이 작업을 하게 됐다고 들었다. 적절한 안전보호 장비도 받지 못하고, 안전교육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이 이야기들이 사실인지, 만약 그렇다면 어째서 이런 식으로 일해야 했는지 답해줬으면 한다.” 유족인 화 씨가 회사 측에 바라는 첫 번째 요구사항은 원청과 하청 대표자가 책임을 인정하며 직접 사과하는 것이다.

두 번째 요구사항은 중대재해를 막기 위한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사고 이후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은 사건 현장에 대한 특별근로감독을 실시했다. 그 결과 안전조치 위반 사항이 드러나 원청업체 동양건설산업과 하청업체 에이원산업개발에 과태료와 사법조치가 부과됐다.

쿠안 씨의 경우도 갱 폼 작업에 관한 안전조항인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 제331조의 3을 지켰더라면 일어나지 않을 사고였다. 해당 조항에 따르면, 조립 등 작업 절차를 근로자에게 미리 주지시키고, 갱 폼을 인양 장비에 매단 후 갱 폼을 조립·해체해야 하며, 인양 장비에 매달기 전에 고정 철물을 미리 해체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준수하는 것은 사업주의 의무다.

구체적인 이주노동자 안전대책 역시 재발 방지 대책에 포함된다. 이주노동자들은 산업 현장에서 내국인보다 더 많이 위험에 노출되지만 충분한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한다. 2021년 중대재해 사망자 668명 중 이주노동자 사망자는 75명이다. 전체의 11.2%다. 같은 해 기준 2099만여 명에 이르는 국내 전체 임금노동자 가운데 외국인 노동자가 약 81만1000여 명(3.8%)인 점을 고려하면 이주노동자의 사망자 비율은 내국인보다 3배가량 높다.

반면 2020년 기준 이들의 고용보험(54.3%)과 산재보험 가입률(68.1%)은 전체 노동자의 고용보험(90.3%)과 산재보험 가입률(97.8%)보다 훨씬 낮다. 고용노동부는 건설업 이주노동자를 ‘산업재해 취약계층’으로 분류했다. 작업장 안에서 위험에 노출되어 있음에도 언어 등의 문제로 위기 대처 능력이 낮고, 산업재해 이후 보상 및 처리 과정에서도 불이익을 겪는 등 한국의 법과 제도가 이들을 충분히 보호하지 못한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었다.

2월18일 충북 청주시 오송파라곤 2차 아파트 공사 현장의 모습. ⓒ시사IN 신선영
2월18일 충북 청주시 오송파라곤 2차 아파트 공사 현장의 모습. ⓒ시사IN 신선영

세 번의 교섭, 세 가지 요구사항

화 씨의 마지막 요구사항은 유족과 고인에 대한 합당한 예우다. 동양건설산업 소속 현장 관리자는 〈시사IN〉 취재진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인 사례와 동등하게 쿠안 씨에 대한 보상금을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유족 측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라고 주장했다. 유족 측은 동양건설산업이 적용하고 있는 이주노동자 배상금 산정방식이 애초에 차별적이라고 지적한다.

기존 법원 판례에 따라, 사망사고 발생 시 65세까지인 가동연한(노동에 종사해 수익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는 연령의 상한) 중 이주노동자는 최대 5년까지만 한국 임금이 적용된다. 그 이후는 본국 임금 기준으로 일실수입(예상 수입 상실분)을 계산해 손해배상액을 산정한다.

문제는 본국 임금이 낮다 보니, 이 같은 기준으로 손해배상액을 산정할 경우 산업재해보상보험에 따라 근로복지공단이 지급하는 유족급여만으로도 이주노동자의 재산상 손해 금액이 모두 공제된다는 것이다(산재보험 가입자인 사업주는 유족급여 한도 내에서 손해배상 책임이 면제된다). 예를 들어 손해배상액이 8000만원으로 산정됐는데 유족급여로 1억원을 받은 경우, 유족급여가 이미 손해배상액을 초과하므로 회사가 지급해야 할 재산상 손해액이 ‘0원’이 된다. 그렇게 되면 회사 측은 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만 지급하는 것으로 이주노동자 산재사망 처리를 할 수 있게 된다. 게다가 사망사고의 과실 책임이 노동자에게 일부 전가될 경우 그 위자료 금액마저 크게 축소된다.

최정규 변호사(원곡법률사무소)는 “현재의 법과 제도는 사측이 안전 체계를 구축하지 않아도 되도록 방조한다. 안전을 위한 투자금보다, 노동자 사망 위자료가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다. 특히 배상금이 거의 들지 않는 이주노동자 사망사고는 사측에게는 경제적 부담이 거의 없는 ‘저렴한’ 사망사고에 속한다.” 유족 측은 이런 구조적 문제를 지적하며 중대재해처벌법 적용 대상인 원청이 징벌적 손해배상을 포함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현재 대전지방고용노동청은 안전보건관리 책임이 있는 동양건설산업 사업주를 대상으로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사항이 없는지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해 12월에 한국에 들어온 화 씨는 처음 한 달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낯선 땅의 밤은 ‘버틴다’는 표현이 맞을 만큼 길었다. 그는 때때로 쿠안 씨가 세상에 없다는 것이 실감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남편이 10년간 산 한국에서, 이렇게 오래 남편 없이 홀로 머물게 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주노동자 유가족’으로 그 누구도 시작하지 못했던 싸움을 자신이 하게 될 거라고도 상상하지 못했다.

남편의 시신이 고향에 돌아온 후 가톨릭 신자인 화 씨와 가족들은 베트남의 가톨릭 장례 문화에 따라 고인을 애도했다. “50일간 매일 아침 모든 가족들이 모여 남편을 위해 기도했다. 억울하게 세상을 떠난 남편을 기리며 남은 가족들은 매일 새 꽃을 올렸다. 열 살, 여덟 살인 두 아이는 아빠가 세상에 없다는 게 무엇인지 이해하기에는 너무 어려서 여전히 한국에 아빠가 있다고 믿는다.” 웃고 있는 남편의 영정 사진을 든 화 씨의 손등 위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화 씨는 1월23일 진행한 1차 교섭에 이어 2월1일(2차 교섭)과 2월6일(3차 교섭), 회사 측과 세 번 교섭을 진행했다. 아직까지 다음 교섭 일정은 잡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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