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7일 방영된 KBS 〈특별대담-대통령실을 가다〉에서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KBS 화면 갈무리
2월7일 방영된 KBS 〈특별대담-대통령실을 가다〉에서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의혹에 대해 해명하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KBS 화면 갈무리

설 연휴가 시작되기 하루 전인 2월7일 오후 10시, KBS에서 〈특별대담-대통령실을 가다〉를 방영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공식적인 자리에서 기자와 마주 앉은 건 540일 만이다. 2022년 8월17일 취임 100일을 맞아 열었던 처음이자 마지막 공식 기자회견 이후로 처음이다. 대담의 방향성을 유추할 수 있는 제목은 ‘대통령실을 가다’였다. ‘대통령에게 듣는다’였던 첫 기자회견의 제목과 대비된다. 대담 진행을 맡은 박장범 KBS 앵커 역시 “오늘 처음으로 윤석열 대통령이 대통령실을 국민에게 공개하고 안내할 예정이다”라고 첫 멘트를 했다.

이날 국민은 생방송이 아닌 미리 녹화된 방송을 봤다. 프로그램 방영은 2월7일이지만, 실제 용산 대통령실에서 촬영이 이루어진 건 2월4일이었다. 취임 1년 기자회견도 열지 않은 데다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사건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소한 생방송으로라도 대담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대통령실은 결국 녹화 방송이라는 형식을 선택했다. 한 여권 관계자는 “기자회견을 열면 김건희 여사 등 민감한 질문이 나오는 걸 통제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담 형식으로 간 건 이해하지만, 그조차도 굳이 녹화해야 했나 싶다. ‘짜고 치는 인터뷰’라는 논란을 자초할 필요는 없지 않나”라고 말했다.

대통령실 1층 로비에서 박장범 앵커를 만난 윤석열 대통령은 “9시 뉴스 시청률이 많이 높다는데 축하한다”라고 인사를 건넸다. 박장범 앵커는 박민 KBS 사장이 취임한 이튿날인 지난해 11월13일부터 〈뉴스 9〉 진행을 맡았다. 박 앵커에 앞서 4년간 해당 프로그램을 이끌었던 이소정 전 앵커는 주말 동안 결정된 갑작스러운 인사로 시청자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물러나게 되어 KBS 내부의 반발을 불렀다. KBS의 한 기자는 “박장범 앵커는 고대영 전 사장의 비서실장을 했다. 2016년 박근혜 정부 KBS 보도 개입 논란(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이정현 당시 청와대 홍보수석이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해 비판 보도를 자제해달라고 요구해 대법원에서 벌금 1000만원 형이 확정된 사건)이 불거졌을 때도 자성 목소리를 낸 한 후배에게 오히려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라’고 꾸짖는 내부 성명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용산 낙하산’이라는 비판을 듣는 박민 사장이 앉힌 뉴스 진행자를 대담자로 뽑은 게 과연 우연일까”라고 말했다.

대담 프로그램 제작 과정도 여의치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KBS의 한 내부 관계자는 “통상 CP(책임 PD)와 PD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CP만 내부 사람이고 PD는 외주업체 사람이다. 이런 프로그램은 만들 수 없다며, 손 든 PD가 없다고 들었다. 외주업체와 함께 프로그램을 만드는 건 흔한 일이지만, 공영방송에서 대통령 대담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외주업체에서 만든다는 건 이례적이고 이상한 일이다”라고 말했다.

95분 정도 진행된 이날 대담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박장범 앵커에게 집무실을 소개하는 데만 약 20분이 걸렸다. 윤 대통령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책장, 대통령 취임사를 적은 병풍, 해외 정상들로부터 받은 선물 등이 화면에 등장했다. 국무회의가 열리는 회의장에서는 윤 대통령이 박 앵커에게 “제 자리에 한번 앉아보실래요?”라고 묻고, 실제로 윤 대통령 자리에 앉아본 박 앵커는 “잠시나마 대통령의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름을 밝히기를 꺼린 한 언론학자는 이 장면에 대해 “기자는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제3자의 ‘자리’에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어야 한다. 대통령 자리에 앉은 기자의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비치겠나.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잠깐 앉았다고 한들 그 모습을 방송에 내보내선 안 됐다. 생방송도 아닌데 이 모습을 편집하지 않고 오케이 해서 나간 건 KBS도 이날 대담 자리에서 기자의 ‘자리’나 위치, 역할에 대해 아무런 고민이 없었다는 뜻이다”라고 비판했다.

집무실을 소개하는 20분을 뺀 75분 동안 박 앵커는 마흔 개가 넘는 질문을 쏟아냈다. 물가 안정 대책, 저출생 대책, 여소야대 상황,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문제, 경제 안보, 북한과의 관계 등 굵직한 이슈를 다뤘는데도 한 질문당 평균 2분을 채 넘기지 않았다. 임기 초반인데도 어느 역대 대통령보다 더 많은 재의요구권(대통령 거부권)을 행사한 윤 대통령에게 “입법부와의 대립을 해결할 수 있는 보다 더 생산적인 방안”에 대해 묻자 “국회에서 의결된 법이 행정부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여야의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쉽다”라고 동문서답하지만, 박 앵커는 해결 방안을 되묻지 않고 그대로 넘어갔다. 전세사기 피해자 구제 대책이나 이태원참사 특별법, 해병대 채 상병 외압 의혹, 고발 사주 의혹으로 1심 유죄판결을 받은 손준성 검사 등 중요한 현안들도 질문에 오르지 않았다.

2월7일 방영된 KBS 〈특별대담-대통령실을 가다〉에서 대통령 자리에 앉아보는 박장범 앵커. ⓒKBS 화면 갈무리
2월7일 방영된 KBS 〈특별대담-대통령실을 가다〉에서 대통령 자리에 앉아보는 박장범 앵커. ⓒKBS 화면 갈무리

“부부싸움 했냐”가 후속 질문?

유달리 시간을 많이 할애한 질문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최근에 많은 논란이 되고 있는 이른바 파우치, 외국 회사 조만한(작은) 백이죠. 그 백을 어떤 방문자가 김건희 여사를 만나서 그 앞에 놓고 가는 영상이 공개가 됐습니다.” 300만원짜리 디오르 명품 가방을 ‘외국 회사 조만한 백’으로, 대통령 부인이 뇌물을 받는 장면을 ‘어떤 방문자가 놓고 가는’ 장면으로 애써 의미를 축소한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 부인이 누군가를 박절하게 대하기는 어렵다. 자꾸 찾아오겠다고 하니까 매정하게 끊지 못한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라고 답한다. 대통령 부인이 왜 고가의 선물을 받았는지, 어떤 대가가 있었는지, 국민에게 직접 사과할 의향이 있는지 등의 후속 질문 역시 나오지 않았다. 대신 박장범 앵커는 웃으며 “이 일로 부부싸움 하셨느냐”라고 묻고 윤 대통령 역시 웃음을 터뜨리며 “전혀 안 했다”라고 답한 채 넘어갔다.

최영재 한림대학교 미디어스쿨 학장은 “저널리즘이라기보다 연출된 정치 예능으로 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BBC나 CNN에서 진행했던 전·현직 대통령 인터뷰를 보면 나라가 어떤 방향으로 가고 있고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또 비판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태도를 보이는지 알 수 있었다. 사담 같기도 하고 농담 같기도 한 이런 대담에서 국민들이 무슨 새로운 정보를 얻을 수 있겠나. ‘워치독(감시견) 저널리즘’이 아니라 권력의 예쁨을 받는 ‘푸들 저널리즘’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KBS는 스스로의 격을 떨어뜨렸다.”

그러나 KBS는 이튿날 “윤 대통령의 특별대담이 닐슨코리아 집계 기준 전국 시청률 8.7%, 최고 시청률 9.9%를 찍으며 전 채널 동시간대 1위를 차지해 전 국민적인 관심을 받았다”라며 홍보하는 보도자료를 냈다. 같은 날 박장범 앵커는 〈뉴스 9〉에서 “어제 대담 이후 난데없이 백이냐, 파우치냐 논란이 시작됐다”라며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같은 외신들도 모두 파우치라고 표기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KBS는 2월10일 대담 프로그램을 재방송하기도 했다.

KBS 청원게시판에는 2월15일 현재 대담과 관련해 항의하는 시청자 게시글이 50건 넘게 올라와 있다. 대담 이후 나온 첫 여론조사 결과(JTBC가 의뢰해 여론조사 기관 메타보이스가 2월11~12일 실시)에 따르면, 여론조사에 응한 1004명 중 67%가 김건희 여사의 명품 가방 수수 사건에 대한 윤 대통령의 해명이 ‘적절하지 않았다’라고 응답했다(자세한 내용은 중앙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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