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짧은 낮

츠쯔젠 지음, 김태성 옮김, 글항아리 펴냄

“아저씨, 그건 아저씨 탓이 아니라 동짓날이라서 그런 거예요.”

“내 글쓰기의 연륜은 단편소설의 연륜과 일치한다.” 작품은 선언과도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저자 츠쯔젠은 좡중원문학상·루쉰문학상 등을 수상한 중국 문학의 거장 중 한 명이다. 일하고 사랑하는 동시에 아프고 외로운 작품 속 등장인물의 삶은 충분히 핍진하다. 여기에 인간과 인간 사이의 서사 위에 자연을 포개는 저자의 주특기가 더해져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진다. 하필 그날이 동짓날이라, 안개가 자욱한 날이라 벌어지는 사건 앞에 인간은 겸허해질 수밖에 없다. ‘고슴도치 같은 안개’ ‘기름등잔 같은 해’ 등 문장 곳곳에서 등장하는 비유적 표현도 자연에 대한 저자의 관심을 짐작하게 한다. 등단 후 30년간 발표한 단편 100여 편 가운데 16개를 저자가 직접 골라 하나로 묶었다.

ARM, 모든 것의 마이크로칩

제임스 애슈턴 지음, 백우진 옮김, 생각의힘 펴냄

“ARM은 모든 곳에 존재한다.”

세계의 어떤 거대 테크 기업이든 네덜란드 업체 ASML로부터 노광 장비(빛으로 웨이퍼에 반도체 회로를 그리는 기계)를 공급받지 못하면 최첨단 칩을 만들 수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테크 기업들이 자사에 필요한 ‘맞춤형 반도체’를 기획할 때 그 기본 설계를 반드시 맡겨야 하는 업체가 있다. 영국 소재 기업인 ARM이다. 다른 어떤 업체도 이 부문에선 ARM을 대체할 수 없다. 칩 설계와 관련된 ARM의 독점적 ‘지식재산’ 덕분에 스마트폰과 클라우드 컴퓨팅, 인공지능 같은 신기술이 개발될 수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1980년대부터 최근까지 ARM의 일대기를 상세히 소개한다. ARM이라는 한 회사를 통해 개인용 컴퓨터부터 스마트폰·인공지능에 이르기까지 첨단기술의 최근 역사와 패권 다툼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선릉과 정릉

전욱진 지음, 난다 펴냄

“보고 싶은 사람은 어제에 있고/ 영원의 근처를 나는 서성인다.”

2월은 전욱진이다. 시의 적절함으로, ‘시의적절’하게 시인 열두 명이 매달 한 권씩 열두 권의 책을 릴레이로 펴낸다. 책 한 권 속에는 매일 글 한 편이 배정된다. 시인이 쓰지만 장르는 시·편지·노트·에세이 등으로 다양하다. ‘선릉과 정릉’은 2월2일에 실린 시다. 오래된 왕과 왕비의 무덤을 걸으며 “옆의 사람이 오늘 밤 죽을까 봐/ 하루 종일 붙어 있을 작정”을 하고 “떨어지는 것들을 바라보며 너는/ 다시 태어나고 있다고” 말한다. ‘계절 서간-봄’은 부치지 않을 편지라서 “꿈에라도 놀러오라”는 쑥스러운 말을 잘도 털어놓는다. 산문도 시처럼, 2월처럼 가물거린다. 매일 아침, 오늘을 펼쳐볼 수 있다.

상처 없는 계절

신유진 지음, 마음산책 펴냄

“글을 쓰는 나는 무언가를 얻고, 잃고, 부서뜨리고, 붙이며 나아간다.”

저자는 자신의 일을 ‘번역’이라는 말보다 글을 ‘옮긴다’는 동사로 표현하는 사람이다. 납작한 활자가 아닌, “피와 살과 뼈가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만지는 마음으로 단어를 고르는 일”이기에. 그의 글을 읽다 보면 번역이 얼마나 고난스러운 창작의 영역인지 깨닫게 된다. 아니 에르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등 다양한 프랑스 작가의 책을 번역한 저자는 에세이스트로 자신만의 글쓰기 세계를 구축해왔다. “흔들리는 일은 균형을 찾아가는 일” “글쓰기란 결국 보내는 말이 아니라 맞이하는 말” 등 곳곳에서 남다른 사유를 만날 수 있다. 어긋남을 인정하고 그 충돌까지도 아름답게 옮길 수 있는 용감한 번역은 가능할까. 두 언어 사이에서 길을 내온 ‘쓰는 사람’의 이야기다.

위대한 셰프의 생각법

김한송 지음, 언폴드 펴냄

“셰프란 삶의 가장 치열한 현장에서 자신과 싸우며 답을 찾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맛집에 대한 열정은 사그라들 새가 없지만 그 뒤의 ‘사람들’은 거의 주목받지 못한다. 그중에서도 오랫동안 묵묵히 버텨온 극소수의 장인이 있다. 마음을 움직이는 맛이란 무엇일까. 셰프인 저자는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중화요리의 대가 이연복, 초밥 장인 안효주, 미슐랭 셰프 조희숙 등 ‘위대한 셰프’ 6명을 만나 인터뷰했다. 단순한 성공담처럼 보이지만 저마다 겪어온 분투와 시행착오, 삶의 곡절들이 하나의 이야기처럼 연결된다. 이들은 요리를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면 절대 교만할 수 없다고 말한다. 화려한 기술만 익히는 게 아니라 겸손해야 한다고도. 자기계발서로 분류되었지만, 일하는 태도에 관한 이야기로 읽었다.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

하림 글, 지경애 그림, 그리고 다시, 봄 펴냄

“우리는 모두 다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당진에서 사망한 20대 노동자를 기리는 노래 ‘그 쇳물 쓰지 마라’로 다 함께 부르기 열풍을 일으켰던 가수 하림이 볼로냐 라가치상 수상 작가인 지경애 작가와 그림책을 펴냈다. 평범한 노동자들을 생각하며 하림이 만든 곡 ‘우리는 모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일을 합니다(우사일)’는 그림책 제목이 되었다. 하림은 “음악의 목적은 조각난 사람들의 마음을 이어주는 데 있다”라고 말한다. 일을 마치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고, 일과 쉼이 공존하는 하루가 모두에게 평범한 일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사에 녹아 있다. 책 장마다 주변에서 쉽게 만나는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섬세하고 따뜻하게 담겼다.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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