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미추홀구에 위치한 전세사기 피해 건물에 경매 입찰 중단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시사IN 조남진
인천 미추홀구에 위치한 전세사기 피해 건물에 경매 입찰 중단을 촉구하는 현수막이 붙어 있다. ⓒ시사IN 조남진

설을 사흘 앞둔 2월7일 오전 11시, 인천지방법원 324호 법정은 재판을 방청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날은 소위 ‘건축왕’이라고도 불린 인천 미추홀구 전세사기범 남헌기 일당의 1심 선고가 열리는 날이었다. 결과는 피고 10명 전부 유죄. 주범인 남헌기씨에게는 최고형인 징역 15년과 추징금 115억여 원이 선고됐다.

이번 재판에 관련된 피해자는 남씨 일당에 의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임차인(세입자) 중 일부에 불과했다. 남씨 일당은 주택 총 2708채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검찰은 이번 재판에서 피해자를 161명으로 한정해 기소했다. 사기 범죄에 따른 피해액도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남씨는 법적으로 가능한 최고 형량을 선고받았다.

피해자를 한정함으로써 피해액은 줄어들었지만, 사기 범죄 의도는 더욱 명확해졌다. 피해자 161명이 남씨 일당과 임대차계약을 맺은 시점은 2022년 1월부터 2022넌 7월까지였다. 2022년 1월께 남씨는 이미 심각한 자금난을 겪고 있었다. 2020년 7월께부터 재산세를 체납하기 시작해 2022년 1월에는 체납액이 3억7000만원을 넘어섰다. 이즈음 남씨 소유 부동산 8건은 이미 경매에 넘어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씨 일당은 이를 제대로 알리지 않은 채 피해자들과 임대차계약을 맺어 보증금 125억여 원을 편취했다. 남씨는 직원들에게 “자금 상황이 어려우니 보증금을 증액하라”고 지시해 피해 규모를 키우기도 했다. 결국 임차인들은 임대차계약을 맺은 지 1~3개월가량 뒤 집이 경매에 넘어가는 상황을 맞닥뜨리게 됐다.

2023년 4월18일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광장에서 전세사기 피해 사망자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시사IN 박미소
2023년 4월18일 인천 미추홀구 주안역 광장에서 전세사기 피해 사망자 합동 추모제가 열렸다. ⓒ시사IN 박미소

재판 과정에서 남씨의 변호인들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피해자들이 주장하는 ‘피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모습이었다. 피해 임차인 대부분이 여전히 계약한 집에 살고 있으며, 계약만료가 도래하지 않아 전세보증금을 미반환한 상태가 아니라는 논리였다. 심지어 남씨는 1월17일 최후진술에서 “정부에서 이 사건 피해자들 보호를 위한 제도를 시행한다고 하고, 주택도시보증공사에서 해당 주택을 매수한다고 하니 희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라는 말까지 남겼다.

피고인 측은 직원들에게 대가를 주고 가짜 임대인으로 앉혀 임차인을 속인 점 역시 부인했다. 임대인이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할 경우, 임차인은 최후 수단으로 주택을 경매에 넘겨 보증금을 회수할 수 있다. 변호인들은 임대차 계약 당시 선순위 근저당과 전세보증금을 합친 금액이 주택 시세보다 낮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만약 시세가 떨어지지 않았다면 경매를 통해 피해자들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었을 것이기에, 실소유주 정체는 계약 여부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 정보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남씨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선 피해자들이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됐다는 점뿐만 아니라, 주택이 경매에 넘어가 법률적으로 불안정한 처지에 놓인 점 역시 ‘피해’로 인정했다. 법원은 “임대차 기간 동안 안정적으로 해당 주택에서 평온하게, 임대인으로 인해 발생하는 법률적 분쟁을 겪지 않고 거주”하는 것이 임대차 계약의 핵심이라고 판시했다.

또한 법원은 주택 시세뿐 아니라 임대인의 재력 역시 임대차 계약 결정에서 중요한 요소라고 판단했다. 주택 시세가 떨어질 경우 임대인의 재력은 전세보증금을 회수하기 위해 중요한 요소이므로, 가짜 임대인을 앉힌 남씨의 행동이 임차인들을 기망한 것이었다는 점을 인정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 안상미 위원장은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통과를 대책위의 마지막 목표로 꼽았다. ⓒ시사IN 조남진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 안상미 위원장은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안 통과를 대책위의 마지막 목표로 꼽았다. ⓒ시사IN 조남진

마지막까지 선고 지연 시도한 피고인 측

지난해 4월부터 진행된 51차례 공판에서 변호인 측은 피해자 100여 명을 증인으로 소환했다. 비슷한 증언이 반복됨에도 증인 소환이 이어지자 검사는 변호인이 재판을 지연시키고 있다고 항의했다. 하지만 변호인은 모든 피해를 개별적으로 확인해야 한다며 소환을 지속했다. 올해 초, 재판부가 변론을 종결하고 선고기일을 지정하자 변론재개신청·법관기피신청 등 선고를 미루기 위한 방법을 총동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계획대로 선고를 진행했다. 재판부는 남씨 측이 “범죄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가 분명한데도 각 피해자들을 모두 법정에 소환하여 고통스럽게 피해를 되살리도록” 했다고 지적했다.

비록 남헌기씨에게 중형이 선고되긴 했지만, 임차인들의 불안정한 처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전세사기특별법에 의해 중지됐던 경매가 재개되며 임차인들이 내쫓기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건물관리 업체에서 관리를 부실하게 해 단전·단수도 반복되는 상황이다. 전세 계약만료가 다가오며 주거가 불안정해지고 있다는 점도 문제다.

피해를 실질적으로 회복하기 위해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재판과 별개로 진행되고 있는 합의부 재판이다. 이 재판에서 남헌기씨를 비롯한 18명은 사기죄뿐 아니라 범죄단체조직죄(범단죄)로도 기소되어 있다. 일반적인 경우 국가는 피해자의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직접 개입하지 않지만, 범단죄가 유죄로 선고될 경우 국가가 적극 개입해 은닉 재산을 찾아내 피해 회복에 도움을 줄 수 있다. 해당 재판은 지난해 10월 시작돼 여전히 공판이 진행 중이다.

피해자들은 당장의 주거 안정을 위해 전세사기특별법 개정을 촉구한다. 개정안에는 피해자들이 적어도 최우선 변제금에 해당하는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있는 방안과 건물관리를 지자체에서 대신할 수 있는 방안 등이 담겼다. 개정안은 현재 국회 법제사법위원회에 계류돼 있다.

미추홀구 전세사기피해대책위원회는 개정안 통과를 마지막 목표로 삼았다. 안상미 대책위원장은 “피해자들이 모두 지쳐 더 이상 싸움을 계속할 힘이 없다. 마지막으로 특별법 개정안이라도 지키고 싶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2월28일은 미추홀구 전세사기 피해자 중 첫 번째 사망자가 발견된 날이다. 1년이 지난 현재 피해자들은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한다. 남헌기씨는 선고 당일 바로 항소장을 제출했다.

기자명 주하은 기자 다른기사 보기 ki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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