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26일 ‘사법농단’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대법관, 박병대 전 대법관(왼쪽부터).ⓒ시사IN 포토
지난 1월26일 ‘사법농단’ 1심에서 무죄판결을 받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 고영한 전 대법관, 박병대 전 대법관(왼쪽부터).ⓒ시사IN 포토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비롯한 ‘사법농단’ 피고인 3명이 1심에서 무죄선고를 받았다. 사법농단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재임 시절 사법부 이익을 위해 주요 재판에 관여했다는 의혹이다. 2018년 이 사건 수사를 총괄한 이는 윤석열 대통령(당시 서울중앙지검장), 수사팀장은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었다. 지난 1월26일 서울중앙지법 형사 35-1부(재판장 이종민)는 양승태 대법원장과 고영한·박병대 전 대법관의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2019년 2월11일 양 전 대법원장이 구속 기소된 뒤 5년여 만에 나온 판결이다.

사법농단의 핵심은 재판 개입이다. 양승태 대법원은 정부가 주목할 만한 주요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혐의를 받는다. 대법원이 정부 입맛에 맞는 판결을 끌어내려 했다는 것이다. 목적은 상고법원 설치를 통한 대법원 위상 강화다. 상고법원이 신설되면 비교적 단순한 사건은 상고법원이 가져가고, 사회적 관심이 높거나 법령 해석상 중요한 사건만 대법원이 담당하게 된다. 대법원이 헌법재판소 이상의 권위를 갖게 된다는 의미다. 박근혜 정부의 ‘협조’를 끌어내기 위해 판결을 대(對)정부 협상 카드로 삼았다는 게 검찰 주장이다. 일제의 전범기업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 옛 통합진보당 의원 지위 확인 소송, 전교조 법외노조 소송 등이다. 이 밖에도 검찰은 양승태 대법원장과 두 대법관에게 ‘법관 블랙리스트’ 작성, 판사 비위 은폐 등 47개 혐의를 적용했다. 적용한 죄목 중 다수는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직권남용죄)이다. 어째서 1심 재판부는 이들 모두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재판부가 ‘형식 논리’를 내세워 사법농단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나온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은 1월29일 논평에서 이 판결이 “사법농단 사건의 재발 방지는커녕 (중략) 범죄행위를 벌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라고 주장했다. 민변은 “대법원장 등이 개별적 재판에 개입할 직무권한이 없으므로 재판에 개입해도 직권남용죄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형식적 논리”라고 비판했다. 2017년 판사직을 그만두고 사법농단 문제를 제기한 이탄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1월31일 〈시사IN〉 유튜브에 출연해 이렇게 말했다. “‘명백한 재판 개입’이라는 표현이 판결문 곳곳에 등장한다. 그런데 (판결에 따르면) 양승태 대법원장은 몰랐다는 것이다. 재판 개입을 한 법원행정처는 양승태 대법원장의 비서 조직이다. (중략) 서른 명 넘는 비서 판사들이 대법원장 몰래 이렇게 오랜 기간 다양한 방식으로 재판 개입을 했다는 건 상식에 반한다.”

“명백한 재판 개입” 양승태는 몰랐다?

이번 판결의 논리를 파악하려면 핵심 죄목인 직권남용죄에 대한 배경지식이 필요하다. 형법상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다. 크게 ‘직권의 남용(시도)’과 ‘권리의 방해(결과)’가 충족돼야 이 죄목에 해당한다. 그런데 ‘직권의 남용’이란 요건이 보기보다 복잡하다. 공무원이 저지른 일이 ‘일반적 직무권한’에 속해야 이 죄목에 든다. 대법원은 어떤 행동이 해당 공무원의 권한에 속한다는 명문이 있거나, 최소한 그렇게 해석될 여지가 있어야 그 직권남용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고 본다. 예컨대 상급 공무원이 하급자에게 심부름을 시키거나 벌을 세우는 등 ‘갑질’은, 상황에 따라 강요죄나 폭행죄가 적용될 수 있으나 직권남용죄는 아니다. “형식적, 외형적으로는 직무집행으로 보이나 실질은 정당한 권한 외의 행위”인 것이 직권남용이라고 대법원은 해석했다(2006도3339). 주요 사건의 수사 결과에 대해 보고받을 권한이 있는 군 조직 상급자가, 수사 기밀이 담긴 보고서를 요구하는 게 대표적이다.

이 요건을 통과해 직권을 남용했다고 봐도 곧장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후 경과를 살펴야 한다. 직권남용죄는 미수범을 처벌하지 않기 때문이다. 직권남용이 그 목적에 맞는 ‘결과’를 발생시켜야 한다. 1978년 도청기 설치 사건은 유명한 판례다. 정보 담당 경찰이 한 정당의 회의 내용을 알기 위해 몰래 회의실에 들어가 도청기를 설치했다. 그런데 이 경찰은 회의 개최 전 정당 관계자들에게 발각되었고, 도청기는 뜯겼다. 회의 시간이 10분 지연됐을 뿐 도청은 실패한 것이다. 당시 대법원은 “회의 진행을 도청당하지 않을 권리가 침해된 현실적 사실은 없다. (중략) (그리고) 미수의 처벌은 정한 바 없으니” 직권남용죄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이후에도 법은 개정되지 않았고 이 대목에 대한 대법원 판례도 유지되고 있다.

강제징용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관한 판단은 ‘직권의 남용’ 법리의 맹점이 드러나는 사례다. 이 사건은 대법원과 청와대의 재판거래 의혹 중 핵심이다. 1심 재판부는 2014년부터 2016년 사이 청와대, 외교부, 법원행정처, 김앤장 법률사무소가 강제징용 사건을 협의한 사실을 인정했다. 외교부는 2012년 대법원의 강제징용 피해자 승소 판결에 대한 불만과, 사건 재상고심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해 결론을 뒤집어달라는 요구를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에게 전했다. 양승태 대법원장도 이를 알고 있었다. 양 대법원장은 전범기업 소송대리인 한상호 김앤장 변호사와 만나 의견을 교환했고, 2014년 이 사건 재상고심의 주심을 맡은 김용덕 당시 대법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이 사건 판결 확정 후 ICJ 제소 등 절차를 취하겠다고 하면서 승복하지 않고 있다. ICJ에 제소되면 우리 대법원 판결이 재판 대상이 되어 국제법적으로 문제가 될 것 같다.” 김용덕 대법관은 2018년 1월 퇴임할 때까지 소송 결론을 내지 않았고 그해 7월 사건은 전원합의체로 회부됐다. 재판 지연 기간도, 전원합의체 회부도 이례적이다. ‘박근혜 게이트’ 이후인 2018년 10월30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원고(강제징용 피해자) 승소를 확정했다.

이 사건은 대법원장이 직접 ‘공모’해, 정부가 원하는 방향으로 재판을 이끈 사례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번 1심 재판부가 보기에 양승태 대법원장의 직권남용죄 혐의는 ‘권리의 남용’을 판단할 때부터 삐걱댄다. 판결문에 이렇게 썼다. “양승태 대법원장은 소부에서 심리가 진행되고 있는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의 재판에 개입·관여할 수 있는 직무권한이 인정되지 않는다. (중략) (양 대법원장에게)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죄에서 말하는 일반적 직무권한이 존재한다고 볼 수 없다.” 정부와 사전에 교감한 바 있고, 소부 주심이었던 대법관에게 재판에 대한 의견도 제시했으나, ‘판결에 개입할 권한이 없기에 직권남용죄가 아니다’라는 논리다. 재판부는 “양승태 대법원장이 (중략) 강제징용 재상고 사건과 관련하여 김용덕 대법관에게 재판 절차 진행 및 결론에 대한 특정한 방향을 설정해주는 등 위법·부당한 지시를 하였다고” 가정해도 처벌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직권남용부터 부정하고, 이 논리에 따라 검찰이 ‘공모 관계’라고 본 양승태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의 혐의를 벗긴 대목도 있다. 판결의 득실을 분석한 법원 내부 문건 작성 건이다. 2014년 12월 임종헌 당시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은 이른바 ‘전교조 보고서’ 작성을 지시했다. 전교조 법외노조 통보 처분 효력 집행정지 사건에 대한 재항고심이 진행되던 때였다. 법원행정처는 보고서에서 청와대의 입장과 대법원 추진사업에 미칠 영향을 ‘시나리오’별로 분석했다. “재항고 인용 결정→(청와대와 대법원) 양측에 윈윈의 결과가 될 것”이라고 적었다. 이 사건은 “청와대에게는 매우 중요한 사건이나 대법원 입장에서는 많은 사건 중 하나”이고, “상고법원 입법 추진, 대법관 임명 제청, 헌법재판소와의 의견 대립에 있어 청와대의 적극적 협조를 얻을 수 있다”는 분석을 곁들였다.

2018년 10월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앞줄 가운데) 등이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시사IN 신선영
2018년 10월30일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이춘식씨(앞줄 가운데) 등이 대법원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시사IN 신선영

우선 재판부는 임종헌 실장의 보고서 작성 지시 행위가 그의 ‘직권’에 해당한다고 적었다. 강제징용 사건에서 양승태 대법원장에게 적용한, ‘권한이 없으니 남용도 없다’는 법리와는 궤가 다르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이 지시를 직권남용으로 보지 않았다. 보고서가 “사건처리 결과를 예측하고 대응방안 등을 분석하기 위한 내부 검토 과정에서 작성된 문건에 불과하다”라는 데 무게를 실었다. 보고서 작성에 투입한 시간과 노력이 적었고, 임종헌 실장에게 재판 결과를 좌우할 영향력이 없었다는 이유였다. 이 보고서가 재판 개입의 증거가 아니라 ‘정세 파악을 위한 문건’이라는 게 재판부 시각이다. 통합진보당 해산에 따른 국회의원들의 행정소송에 대해 검토한 ‘통진당 행정소송 대응 TF팀’에 대해서도 비슷한 판단을 내렸다. 검찰은 이 팀이 ‘통진당 해산 후의 행정소송을 청와대와의 협상 카드로 이용하려는 법원 내 조직’이라고 봤다. 반면 1심 재판부는 “행정소송 자체에 대한 법리적 연구 및 재판 지원이 필요한 경우를 대비한 검토”가 목적이라고 봤다.

법망 보완할 ‘지위남용죄’ 신설 주장도

이번 판결이 사법부의 책임을 부인한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를 상대로 “사법부의 이익을 극대화”하자고 적힌 구체적 문건들이 사실로 인정됐다. 재판 개입 시도가 있었다고 적은 대목도 있다. 대법관이 판사 비위 사실을 감추기 위해 ‘관련 사건 판결을 미뤄달라’고 요구한 일을 두고 재판부는 “부적절한 재판 개입을 요청한 행위에 해당함이 명백하다”라고 했다. 그러나 여기서도 문제는 ‘직권 유무’와 ‘결과 발생’이었다. 대법관은 재판에 개입할 권한이 없고, 내용을 전달받은 판사는 “부담을 느끼지 않았고 판결에 영향이 없었다”라고 진술했다.

법학계에서는 입법으로 해결할 문제가 있다고 본다. 오병두 홍익대 법학과 교수는 2020년 ‘직권남용죄의 성립요건에 관한 검토’ 논문에서 “미수범 처벌 규정을 두는 것과 법정형을 상향하는 것, ‘지위남용’에 대한 처벌을 명시하는 것”을 대안으로 소개했다. 지위남용은 직권남용의 사각을 보완하려는 시도이다. 권한은 없으나 지위를 이용해 위법하고 부당한 지시를 하는, 현실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을 방지하는 것이다. 2022년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이 내용을 담은 형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선고 후 법원을 나서면서 “당연한 귀결이다. 명백한 판결을 내려준 재판부에 경의를 표한다”라고 말했다. 2019년 5월29일 자신의 첫 공판에서 그는 “우리나라 직권남용 혐의의 기원인 일본에서는 공무원이 직무상 권한을 남용해 일반 국민의 권리를 해칠 때 죄가 성립한다. 공무원 조직 내부의 상하관계에서 직권남용이 적용된 사례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박병대 전 대법관은 〈법률신문〉 인터뷰에서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흔들렸는데 쥐 한 마리만 나타났다)이라는 말이 있지만 이번에는 쥐 한 마리 안 나왔다”라고 말했다. 쥐가 없는지, 쥐구멍에 숨었는지는 이어질 임종헌 전 차장 판결 등 추후 재판에서 가려질 예정이다. 2월1일 현재까지 검찰은 이번 사건에 대한 항소 여부를 결정하지 않았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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