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 본부에서 만난 리야드 알 말리키 팔레스타인 외무장관과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왼쪽). ⓒREUTERS
유엔 본부에서 만난 리야드 알 말리키 팔레스타인 외무장관과 아날레나 베어보크 독일 외무장관(왼쪽). ⓒREUTERS

10월27일 유엔총회에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 채택을 위한 투표가 있었다. 결의안은 불법 감금된 시민에 대한 조건 없는 즉각 석방과 가자지구의 인도주의적 구호 활동을 위해 즉각적이고 영구적인 인도적 휴전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찬성 120개국, 반대 14개국, 기권 45개국으로 3분의 2 이상 찬성을 얻어 결의안은 통과되었다. 미국을 비롯해 해당 결의안을 반대한 국가들은 하마스의 이스라엘 폭격과 인질 납치 사건을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결의안에 명시하지 않은 것을 반대 이유로 삼았다.

독일은 이 투표에서 기권표를 행사했다. 독일 정부는 하마스의 테러를 강하게 비판하고 자국 안보를 지키기 위한 이스라엘 정부의 군사 활동을 지지하는 입장을 고수해왔다. 그런 독일 정부가 이스라엘의 군사 활동 중지를 요구하는 의미가 강한 해당 결의안에 반대표를 행사하지 않은 사실이 커다란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스라엘 정부 및 독일 내 유대인 협회, 친이스라엘 협회 등이 강하게 비판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 주요 언론사와 정치권 또한 비판 입장을 표명했다.

오랜 기간 독일의 주류 정치권과 언론은, 독일에 이스라엘을 지지해야만 하는 역사적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해왔다. 이스라엘 정부를 비판하는 행위는 곧 반유대주의라는 혐의를 받았다. 10월7일 하마스의 이스라엘 기습 공격 직후 올라프 숄츠 총리 또한 독일이 조건 없이 이스라엘 편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는 공식 성명을 통해 “독일에게는 이스라엘 편에 서는 것 외에 다른 가능성은 없으며 이스라엘의 안보는 독일의 ‘국가이성(reason of state)’이다”라고 발표했다. ‘국가이성’이라는 용어는 국가의 목적에 부합하는 절대적 원칙을 의미한다.

이스라엘의 안보를 독일의 국가이성이라고 처음 언급한 정치인은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였다. 2008년 메르켈은 이스라엘 건국 60주년을 맞아 독일 총리로는 최초로 이스라엘 의회에서 연설했다. 그는 자신 이전의 역대 독일 정부와 총리들은 이스라엘의 안보를 지켜야 하는 역사적 의무를 지고 있었고, 이 역사적 책임은 독일 국가이성의 일부라고 발언했다. 메르켈은 독일 총리로서 이스라엘의 안보는 협상 가능한 것이 아니라고 연설을 이어갔다. 그후 메르켈 총리가 발언한 국가이성은 독일 정부가 이스라엘에 대해 갖는 책임 의식의 상징이 되었다.

〈프랑크푸르터 룬트샤우〉는 독일 정부의 유엔총회 기권표 투표는 부끄러운 연극이며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기사당·기민당 연합의 연방의회 원내 부대표인 요한 바데풀 의원은 독일이 이스라엘을 버렸다고 표현했다. 연정에 참여하고 있는 자민당 또한 이번 투표를 두고 비판 목소리를 냈다. 자민당 대표이자 연방 재무장관인 크리스티안 린드너는 외무장관 아날레나 베어보크가 내린 결정에 대해 자신은 사전 논의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이번 결정으로 하마스가 기뻐하고 이스라엘을 강하게 비판하는 근거로 삼을 것이라며 내각의 동료들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슈피겔〉 보도에 따르면, 숄츠 총리와 베어보크 장관은 유엔 결의안에 이스라엘의 핵심 입장을 담기 위해 물밑 작업을 벌였다. 전쟁 원인으로 하마스를 명시하고 즉각적인 인질 석방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아랍, 아프리카, 중남미 국가들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고 인질과 전쟁의 원인에 대한 언급은 결의문에 우회적으로 들어가는 정도로 수정이 이루어졌다.

11월10일 독일 하겐에서 열린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전쟁 종식과 가자지구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AP Photo
11월10일 독일 하겐에서 열린 반이스라엘 시위에서 참가자들이 팔레스타인 국기를 흔들며 전쟁 종식과 가자지구의 자유를 주장하고 있다. ⓒAP Photo

반대와 기권 사이에서 고민한 독일

독일 정부는 찬성표를 고려하지는 않았고, 반대와 기권을 두고 숙고했다. 독일 정부가 반대표를 던질 경우 이슬람 국가를 비롯해 남반구 국가와 외교적 마찰이 일어날 수 있으며, 기권표를 던질 경우 강한 내부적 비판이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슐츠 총리는 결국 내부적 비판은 관리가 가능하리라고 판단해 기권을 선택했다. 다수의 이슬람 국가와 외교적 마찰을 피하는 것이 국익에 더 부합한다고 판단한 셈이다.

독일 정치권과 사회가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강조하고, 이스라엘 정부에 대한 비판을 반유대적인 것으로 치부하게 되기까지는 복잡한 역사적 경험이 있었다. 독일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이용하기도 하고 내부적으로 과거사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강조하는 문화가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스라엘에 지금 같은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새롭게 건국한 독일연방공화국(서독)은 1953년 이스라엘과 나치 피해를 배상하는 협상에 합의한다. 서독 총리였던 콘라트 아데나워는 배상과 관련해 유대인이 독일 땅에서 겪은 고통에 대한 공감을 강조했다. 하지만 그는 나치 범죄에 관한 독일인들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나치가 독일 민족의 이름을 오용했고 대다수 독일인은 나치 범죄에 반대했다는 서사를 만들었다. 당시 서독 정부는 배상 합의를 통해 자신들의 이런 서사를 정당화하려 했으며, 배상 행위를 통해 서독 정부 탄생의 정당성을 다른 국가들로부터 인정받으려 했다. 당시 서독에서는 유대인에 대한 독일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1952년 실시한 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의 겨우 11%만 독일이 이스라엘에 배상금을 지급하는 데 찬성했다.

서독은 이스라엘의 건국을 인정했지만 1965년까지 이스라엘과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았다. 이스라엘의 요청에도 서독은 이스라엘의 수도 텔아비브에 외교 공관을 설치하지 않았다. 서독이 이스라엘에 외교 공관을 설치하면 반대급부로 이슬람 국가들이 동독을 독일의 정통 정부로 인정하는 사태가 일어날 것을 우려해서였다.

1960년대 중반까지도 서독 시민들 사이에서 이스라엘과의 관계에 대한 부정적 판단이 지배적이었다. 1965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35%만이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맺는 것에 찬성했다. 만약 이스라엘 주변의 아랍 국가들이 이스라엘을 침공한다고 해도 독일은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의견이 75%에 달했다. 1967년 실제로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 사이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하자 서독 정부는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혔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을 지나면서 독일 사회의 분위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독일 사회는 내부적 논쟁을 통해 과거사에 대한 교육과 책임을 강조했다. 나치의 범죄에 대한 조사도 착수되었다. 미디어를 통해 나치의 범죄가 구체적으로 이야기되었다. 아이히만 재판이 보도되었으며, 1979년 미국의 TV 시리즈 〈홀로코스트〉가 서독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독일의 대표적인 미디어 재벌인 악셀 슈프링어. ⓒAFP PHOTO
독일의 대표적인 미디어 재벌인 악셀 슈프링어. ⓒAFP PHOTO

〈디벨트〉나 〈빌트〉 같은 보수언론을 소유한 출판·미디어 그룹 악셀 슈프링어(이하 슈프링어 그룹)가 이스라엘에 대한 독일 사회의 인식을 바꾸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룹의 창업자 악셀 슈프링어는 1년에 두 번 이스라엘을 방문했고, 수도 텔아비브에 갈 때마다 바닥에 키스를 하는 행동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는 과거 유대인 여성과 결혼했지만 나치 시절 사회적 지위를 위해 이혼했다. 그는 훗날 그에 대한 죄책감으로 유대 민족과 이스라엘을 강하게 지지하게 되었다. 창업자의 영향으로 슈프링어 그룹은 유대 민족을 지원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슈프링어 그룹은 나치 범죄에 대해 자세히 알리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1967년 제3차 중동전쟁 당시 이스라엘 편에서 보도를 했다. 이것이 서독 시민의 상당수가 이스라엘 쪽으로 돌아서게 하는 데에 기여했다. 1967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55%가 이스라엘을, 6%만이 이집트를 지지했다. 그후에도 슈프링어 그룹은 이스라엘을 지지하고 반유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는 시각을 유지했다. 특히 보수언론의 입장에서 좌파나 무슬림 사회의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민주공화국(동독)과 서독 내 좌파의 이스라엘에 대한 견해는 조금 달랐다. 동독의 경우 건국 당시 스스로를 반파시스트 민주주의 국가로 자처하며 나치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반유대주의를 척결하지 않았으며, 유대인 혐오와 공격이 동독 내에서 계속 이어졌다. 서독 좌파의 경우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나치의 과거 잘못을 반성하는 친이스라엘 입장이 강했다. 하지만 기성 사회가 이스라엘과 가까워지는 사이 좌파 상당수는 이스라엘을 과거 서구 열강의 식민주의에 의해 탄생한 국가로 강력히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게 되었다.

통일 이후 서독을 계승하고 있는 독일의 주류 사회는 유대인에 대한 부채 의식을 강화하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것을 공식 입장으로 갖게 되었다.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언론이나 인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사회적 주류는 아니다.

친팔레스타인 시위 불허하기도

10월18일부터 10월21일까지 진행된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은 도서전에서 진행되는 리베라투르상(LiBeraturpreis) 시상식 때문에 시작 전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리베라투르상은 독일어로 번역된 제3세계 여성 작가의 작품 중 뛰어난 작품을 선정해 시상한다. 이번 수상에는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시블리의 작품이 선정되었다. 하지만 하마스에 의한 이스라엘 폭격이 일어나면서 시상위원회 측은 시상식을 무기한 연기했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가판대에 놓인 아다니아 시블리의 작품. ⓒdpa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가판대에 놓인 아다니아 시블리의 작품. ⓒdpa

시블리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선정되는 과정에서, 작품이 이스라엘 정부를 살인 집단으로 묘사해 반유대주의적 성격이 있다며 선정 위원 중 한 사람이 사퇴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작품 선정을 비판했다. 부정적 시선이 있던 차에 하마스에 의한 테러까지 발생하자 시상위원회는 시상식을 연기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에 대해 전 세계의 작가들 다수와 언론은 독일이 팔레스타인의 목소리 자체를 억압한다며 비판에 나섰다.

하마스의 공격 이후 독일의 대도시에서는 친팔레스타인 시위가 벌어지고 있다. 그 과정에서 시 정부들이 시위 허가를 내주지 않는 일이 자주 발생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친팔레스타인 시위에서 유대인을 향한 증오와 위협의 목소리가 나올 뿐 아니라, 독일에서 금지된 이슬람 테러단체들의 깃발이 사용되거나 시설물 파괴 같은 폭력 사태로 번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유대인 회당 같은 유대인 관련 시설이나 유대인 개인에 대한 테러나 위협이 자주 발생하면서 독일 정부나 정치인들도 강력한 비판과 엄중한 경고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현재 독일에서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에 대한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독일 내부의 평화를 위해 이 문제를 잘 해결할 방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독일에는 유대인 약 9만5000명이 살고 있다. 반면 이슬람 인구는 500만명이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상황에서 커져가는 유대인 혐오는 독일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에게 큰 공포를 주고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반유대주의에 대한 규탄이 이슬람 이민자들을 반대하는 논리로 극우 세력에 이용당하기도 한다.

독일 내 이민자를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극우 정당 AfD는 이스라엘에 대해 강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EPA
독일 내 이민자를 몰아내자고 주장하는 극우 정당 AfD는 이스라엘에 대해 강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EPA

극우 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은 반유대주의 의식을 지닌 지지자를 가장 많이 가진 정당이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공공연하게 강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몰아내는 것과 독일 내 이민자들을 반대하는 자신들의 입장을 동일시하기 위해서다. 2018년 AfD는 아이히만 체포에 공로가 있다고 알려진 이스라엘 첩보기관의 전직 요원 라피 에이탄을 초대해 반유대주의를 규탄하는 행사를 열었다. 이 행사에서 에이탄은 AfD가 유럽으로 들어오는 이슬람 이민자들의 행렬을 막는 데 성공하기 바란다며 지지를 표명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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