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안의 인종주의
정혜실 지음, 메멘토 지음

“내 문제는 결국 우리 모두의 일이었다.”

1994년 파키스탄 남성과 결혼했지만 서류상으로는 ‘혼자 사는 여자’였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외국 여성은 호적에 이름이 올라갔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달랐다. 국적법상 부계주의 원칙이 사라진 건 1997년의 일. 젠더와 인종을 둘러싼 온갖 차별을 겪은 저자는 이주 인권 활동가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증언자였다. 백인과 결혼한 국제결혼 가족은 글로벌 패밀리가 되지만, 아시아 출신 결혼 이민자는 다문화로 불린다. 난민 혐오를 부추기는 가짜 난민 논쟁도 대표적이다. 저자는 인종주의의 핵심은 ‘우열 매기기’에 있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일대기가 한국의 이주민 역사를 훑는다. 제목이 '우리 안의 인종주의'인 이유다.

잠이 고장난 사람들
가이 레시자이너 지음, 김성훈 옮김, 시공사 펴냄

“나만 밤이 두려운 건 아니다.”

베개에 머리를 대는 순간, 끝마치지 못한 업무와 상념들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따뜻한 우유 한 잔도 쓸모없어진다. 고통스러운 새벽이다. 신경의학자인 저자는 수면장애센터에서 일하며 ‘상상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심각한 수면장애로 고통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성인 3분의 1이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다. 만성 불면증부터 기면병, 몽유병, 뇌전증까지 우리의 잠은 왜 고장났을까? 신경의학계에서도 수면은 충분히 연구되지 못한 영역이다. 저자가 만난 환자들의 사례를 통해 ‘잠 잘 자는 법’을 연구한다. 한 가지 방법은 자신에게 맞는 충분한 시간의 수면을 찾는 것. 수면장애는 영화나 드라마 속에 나오는 기이한 질병만은 아니다.

혐오하는 민주주의
박상훈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시작은 기성 체제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다.”

부제는 ‘팬덤 정치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이다. 팬덤 정치는 대개 부정적 맥락에서 쓰이지만, 좌우를 막론하고 ‘팬덤’으로 지목된 이들은 여기에 반발한다. 자신들의 활동이 사회개혁이나 (자유)민주주의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책은 21세기 한국 정치사를 간략히 훑으며, 팬덤 정치라는 용어가 2019년께야 등장했음을 지적한다. 이전부터 존재해온 ‘정치인의 열혈 지지층’과 달리 근래의 팬덤은 정당의 규범이나 정상적 정치 과정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적는다. 저자는 “시민을 바꿔 좋은 정치를 만들 수는 없다”라고 썼다. 대중보다 정치가 먼저 나빠졌으므로, 정당과 정치가가 먼저 변해야 한다는 게 결론이다.

우치다 다쓰루의 레비나스 시간론
우치다 다쓰루 지음, 박동섭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내 안의 누군가, 나 아닌 존재가 말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시간’은 흐른다.”

어려운 글일 것 같아 조심스럽게 책을 열었는데 한국어판 서문에 이런 말이 실렸다. “이참에 서문만이라도 읽어주십시오.” 프랑스 출신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일본의 사상가 우치다 다쓰루의 인생을 크게 바꾸었다. 대학원생 시절, 레비나스의 책을 읽고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던 우치다 다쓰루는 무얼 말하는지는 모르지만 레비나스가 말을 걸고 있다는 것만은 깊이 확신했다. 거기서 시작해 훗날 레비나스 사상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다. 가족 대부분을 강제수용소에서 잃은 유대인 레비나스가 전쟁 후 파리 ‘철학학원’에서 펼친 시간론 강연 ‘시간과 타자’의 뜻을 글자 하나하나 새기며 정독했다.

펜타닐
벤 웨스트호프 지음, 장정문 옮김, 소우주 펴냄

“그러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마약을 훨씬 넘어서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매우 복잡하다.”

좀비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사람들, 동작이 굼뜨거나 이상행동을 반복하는 사람들. 미국 어느 지역의 거리를 담은 화면은 충격적이었다. 원인은 펜타닐이다. 2015년만 해도 펜타닐을 잘 아는 미국인은 거의 없었지만 현재는 펜타닐이 주도한 약물 과다 복용이 55세 미만 미국인의 가장 흔한 사망 원인이다. 미국 유수 언론에 글을 기고하는 탐사 전문기자가, 기적의 진통제가 어떻게 죽음의 마약이 되었는지 좇는다. 약물을 만든 화학자들과 유통단계의 딜러, 각국 정부 등 마약 산업과 연관된 이들의 이야기를 생생하게 담았다.

고스트 듀엣
김현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나는 사과할 자격이 있다는 거야.”

넘을 유, 고개 령. 유령이라는 단어에 ‘고개를 넘는다’는 뜻을 붙여볼 수도 있겠다. 삶의 고개 너머에 있는 존재들이니까. 시인 김현이 5년간 발표한 단편소설 10편과 새로 쓴 한 편을 묶어 첫 소설집을 냈다. ‘있지만 없는 사람들’이 이야기마다 북적인다. 단편소설이지만 등장인물 대부분에게 이름이 있다. 심지어 귀신에게도. 은숙, 용연, 복희, 형우, 상민, 승우, 수영 같은 이름을 짚어가며 읽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고유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된다. 다 다르다는 점에서 다 같은 사람, 사회, 세상을. “섣불리 보듬지 않”지만 “존재를 쉬이 저버리지 않는 이야기를 쓰려” 애쓴 결과물이 여기 있다. 당신 같은 사람과 나 같은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이야기가.

기자명 시사IN 편집국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