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달 라이더 장희석씨(45)는 오토바이 운전석 앞에 파란색 미니 우산 하나를 꽂고 다닌다. 예쁘라고 단 게 아니다. 내리쬐는 여름철 햇빛으로부터 핸드폰을 보호하기 위해서다. “햇빛 받아서 뜨거워지면 (스마트폰) 충전도 제대로 안 되더라고요.” 배달의민족, 쿠팡이츠 등 배달 대행 플랫폼 앱을 통해 콜을 받는 장씨에게 핸드폰은 소중한 생계 수단이다.
정작 장씨의 머리 위에는 햇빛을 가려줄 보호막이 없다. “낮 12시 넘어 해가 머리 위로 올라가면 햇빛 피할 데가 거의 없어요. 너무 더울 때는 버스 옆에 섰을 때 생기는 그늘도 감사할 지경이죠.” 열을 오래 받은 핸드폰과 마찬가지로, 오랫동안 폭염에 노출된 후에는 신체감각과 기능이 훅 떨어지는 걸 스스로도 느낀다. “오토바이에서 내릴 때 땅을 밟으면 머리가 ‘핑’ 하고 돌 때가 있어요. 그제야 깨닫죠. ‘아 덥구나’.” 그늘에 앉아 물을 마시고 잠깐 한숨을 돌려봐도 띵한 기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다.
사실 휴식할 공간도 마땅치 않다. “음식점에서 음식이 늦게 나오면 저희 같은 라이더들은 오히려 내심 좋아하죠. 기다리는 동안 잠깐 실내에서 쉴 수도 있으니까요.” 다만 식당 주인이 허락해줬을 때에 한해서다. 에어컨 바람으로 잠시 땀을 식히고 물 한잔이라도 얻어 마실 수 있으려나 기대하고 갔는데 사장이 손님에게 방해된다며 ‘나가 계세요’ 내쫓으면 도리 없이 다시 땡볕 아래에서 음식을 기다린다.
올해로 라이더 4년 차인 장씨는 점점 여름이 무서워진다. 여름 내내 폭염일 아니면 폭우일이고 두 쪽 다 그 강도가 한 해가 다르게 심해지는 느낌이다. 건물 그림자도 지지 않는 시간, 신호를 받아 바닥에서 피어오르는 도로 아지랑이를 바라보면서 후, 날숨을 내뱉고 나면 다시 들숨이 안 쉬어진다. 너무 덥거나 비가 많이 오는 날은 평소보다 더 자주 쉬면서 받는 콜 수를 줄여야 안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쉽사리 콜을 포기하지 못한다. “남들이 밖에 나가기 꺼리는 때가 라이더들에게는 가장 많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피크잖아요. ‘내가 이걸 안 잡으면 남이 분명 잡을 텐데’ ‘지금 나가면 분명 단가 높은 콜을 잡을 수 있을 텐데’라는 불안감과 조바심을 내려놓기가 힘들어요.”
라이더 일을 시작하고 맞은 첫 장마철,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도 그랬다. 빗물 속에서 오토바이에 앉아 울어버린 날이었다. 서울 이태원 쪽에서 남산 2호 터널을 넘어 명동까지 가는 콜이 하나 떴다. “추가금이 많이 붙었더라고요. 나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잡아버렸어요.” 이태원에서 음식을 받고 터널은 일단 넘었는데, 터널 밖으로 나오니 헬멧 앞으로 쏟아지는 빗물 때문에 앞이 보이지 않았다. 도저히 못 가겠는데 그러면 안 될 것 같고, 어찌할 바를 몰라 눈물만 흘리다가 일 시작 후 처음으로 배민 관제팀에 전화를 걸었다. “‘도저히 못 갈 것 같은데 어떻게 책임을 져야 하나’ 물어본 뒤, 너무 궁금해서 또 물어봤어요. ‘저기 죄송한데… 지금 이런 날씨에도 일하는 사람 있어요?’라고. 웃더라고요. ‘네, 많아요’ 하더라고요.”
어떤 기후든 아랑곳 않고 달리는 라이더들이 사실 가장 예민하게 살피는 게 일기예보다. 장씨도 매일 눈을 뜨면 날씨 앱부터 켜서 그날의 ‘배달 피크 시간대’를 가늠하고 일정과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예측이 점점 어려워지는 한반도의 여름철 기상 상황 탓에 이 계획들은 많이 어그러지거나 수정된다. 노동하는 내내 예측 불가능성과 불확실성에 시달리는 플랫폼 라이더들에게 이 극한 기후는 또 하나의 스트레스 가중 요소다.
‘너무 덥거나 빗길이 위험할 땐 쉬어야 한다’는 안전수칙을 모르는 라이더는 없다. 내가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해도 되는 ‘프리랜서’ 노동자의 자유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도 일하는 쪽을 택하는 그 기제가 꼭 내 자유의지만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라이더들은 폭염특보·호우경보 속에서도 콜을 기다린다. 장씨는 말했다. “제일 비참할 때가요, 더위에 머리가 핑 돌아가고 미끄러운 빗길이 겁이 나는 그 순간에도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띵동’ 소리를 기다리고 있는 제 자신을 발견할 때예요. 이런 불안정과 불확실성에서 조금만이라도 벗어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
폭염 속 찜통 비닐하우스에서 하루 24시간을 사는 사람들 [극한 기후, 극한 노동 ①]
폭염 속 찜통 비닐하우스에서 하루 24시간을 사는 사람들 [극한 기후, 극한 노동 ①]
변진경 기자
경기도 포천시의 한 작물 재배 지역. 들판에 비닐하우스 수십 동이 펼쳐져 있다. 이 중 어떤 곳에는 작물이 자라고 어떤 곳에는 사람이 산다. 그곳에 사는 사람은 이주노동자들이다. ...
-
고속도로 아스팔트 위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극한 기후, 극한 노동⑤]
고속도로 아스팔트 위를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 [극한 기후, 극한 노동⑤]
변진경 기자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연곡졸음쉼터 주차장에 승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한국도로공사 로고가 박힌 조끼와 모자를 착용한 차미애씨(53)가 동료들과 함께 차에서 내려 잰걸음으로 쉼터 여...
-
“밥 짓다 열사병 걸려요” 급식 노동자의 숨 막히는 여름나기 [극한 기후, 극한 노동③]
“밥 짓다 열사병 걸려요” 급식 노동자의 숨 막히는 여름나기 [극한 기후, 극한 노동③]
변진경 기자
등갈비찜, 수제 떡갈비, 도라지튀김, 아귀살떡강정, 닭곰탕, 만둣국, 햄모듬찌개, 김말이튀김, 소떡소떡, 왕새우튀김…. 다음 달 식단표를 받아 들면 군침이 도는 대신 공포에 떠는 ...
-
노동자 온도는 왜 기업의 관심사 밖일까 [극한 기후, 극한 노동 ②]
노동자 온도는 왜 기업의 관심사 밖일까 [극한 기후, 극한 노동 ②]
변진경 기자
차 안으로 후텁지근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7월8일 오후, 이마트 배송 기사 김태원씨(38)가 모는 1t 차량 조수석에서 측정한 온도는 33.7℃였다. 그날 김씨가 배송을 다닌 ...
-
폭염과 폭우 속, 여러분의 노동은 안전한가요? [편집국장의 편지]
폭염과 폭우 속, 여러분의 노동은 안전한가요? [편집국장의 편지]
차형석 편집국장
편집국장 업무 중 하나가 ‘결재’다. 예컨대 기자들이 출장 갈 때마다 ‘띠릉띠릉’ 휴대전화가 울린다. 지역 출장을 마치고 오면 출장비를 정산한다. 그때도 ‘띠릉띠릉’ 울린다. 귀찮...
-
당신의 일상은 이들의 성실함에 빚지고 있다 [취재 뒷담화]
당신의 일상은 이들의 성실함에 빚지고 있다 [취재 뒷담화]
장일호 기자
우리 일상은 타인의 성실함에 빚지고 있다. 일과 생활은 한 몸이라 쉽게 멈출 수 없다. 폭우 속에서 눈물을 쏟아야 했던 40대 라이더도 그랬으리라. 기후위기 시대, 노동의 사각지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