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은 종이 한 장이었다. 가정환경조사서. 엄마 아빠의 나이, 학력, 직업, 종교 따위를 모두 적어 내던 종이 한 장. 담임쌤이 앞으로 불러내 그걸 들고 이것저것 물어볼 때 다른 친구는 막힘없이 대답하는데 나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지던 기억을, 아프지도 않으면서 아픈 척 양호실에라도 달려가 숨고 싶던 그 불편한 마음을, 언젠가는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꼭 꺼내 보이고 싶었다.

커서 영화감독이 되었다. 첫 장편영화를 만들 기회가 왔다. 내가 잘 아는 오래전 나의 마음을, 나를 잘 모르는 지금의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여주는 게 좋을까. 궁리 끝에 영화의 시작도 그래서, 종이 한 장이 되었을 것이다.

이제 막 초등학교 5학년이 된 1996년의 열두 살 명은이(문승아)가 선생님께 편지를 쓰고 있다. 조금 전 문방구에서 어렵게 고른 선물과 함께 드릴 편지. “선생님! 제가 이 편지를 쓰는 이유는 선생님께만 건의하고 싶은 비밀이 있어서예요. 이 비밀은 선생님만 아셔야 해요. 그것은요, 새 학년이 시작될 때마다 하는 선생님과의 면담을 교실에서 말고 선생님 연구실에서 하면 어떨까예요. 왜냐하면….”

여기까지만 보여주고 영화는 다음 날 명은이가 앉아 있는 교실 한편에 우리의 자리를 마련해둔다. 지각해서 헐레벌떡 뛰어오는 바람에 책상 위 명은이의 편지를 미처 뜯어보지 못한 담임쌤(임선우)이 한 명 한 명 앞으로 불러내는 시간을 같이 겪게 한다. 아빠는 회사원, 엄마는 가정주부. 명은이가 얼렁뚱땅 지어내는 가정환경을 교실 맨 앞자리에서 엿듣게 만든다.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과 비밀이 탄로날까 봐 두려운 마음 모두를 관객도 똑같이 품고서 그때부터 우리는 명은이가 된다.

시장에서 젓갈 장사를 하는 엄마(장선)와 하는 일 없이 항상 누워만 있는 아빠(강길우)가 왠지 부끄러운 명은이. 엄마가 파는 젓갈처럼 새빨간 거짓말로 선생님의 총애와 친구들의 인기를 얻는 아이. 다른 아빠면 좋겠고, 다른 엄마면 좋겠고, 다른 집에서 태어났기를 바라다가 결국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던 나. 가족을 부끄러워한 게 미안하고 엄마 아빠에게 미안한 짓을 했다는 게 부끄러운, 열두 살의 우리들.

작은 금빛 자물쇠를 채워 서랍 깊숙이 넣어둔 내 비밀 일기장이 스크린 위에서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가는 영화다. 명은이를 연기한 문승아 배우의 모든 얼굴이 그 자체로 가장 완벽한 미장센이 되는 작품이다. 반장 선거와 글짓기 대회, 전학생과 외삼촌의 존재로 이야기에 흥미로운 오르막을 만들고, 적당히 좋은 사람이면서 또 적당히 부족한 인간으로 살아 움직이는 어른들 캐릭터가 기분 좋은 내리막이 되어주는 영화 〈비밀의 언덕〉.

시작처럼 끝도 종이 한 장이다.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가는 명은이의 표정이 마지막이다. 우리 각자의 일기장 자물쇠를 여는 작은 금빛 열쇠가 그 얼굴에 있다. 가정환경조사서의 무심한 폭력도, 연필로 꾹꾹 눌러쓴 편지의 진심과 본심도, 모두 다 종이 한 장에서 나오는 힘. 똑같은 종이지만 이렇게 다르다. 비슷해 보이는 성장영화지만 이 영화는 다르다. 내 마음에 쏙 든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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