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첫날부터 일이 고되었다. 집에 와 목욕부터 했다. 머리를 말리며 찬 우유 한 잔을 마셨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똑똑똑. 문을 여니 땀에 전 아저씨가 인사를 건넨다. 옆집에 산다고 했다. “욕실 좀 빌릴 수 있을까? 온수기가 고장 나서 사흘째 목욕을 못 했거든.”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오는 남자를 힘껏 밀쳐내고 황급히 문을 닫는 야마다(마쓰야마 겐이치).

한 달 뒤 첫 월급을 받아 제일 먼저 쌀을 산다. 깨끗이 씻어서 정확히 물을 맞춰 안친다. 갓 지은 밥의 냄새를 콧속 깊이 들이마시며 공기에 퍼 담는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흰쌀밥에 오징어젓갈을 올려 입에 넣는 순간, 툇마루 쪽 창밖에 옆집 남자가 서 있다. 텃밭에서 지금 막 수확한 채소 좀 먹어보라며 문을 열더니 재빨리 욕실로 달려 들어간다. 첨벙첨벙. 큰 소리를 내며 목욕하는 아저씨. 주저앉아 한숨을 쉬는 야마다.

오기가미 나오코다운 시작이다. 〈카모메 식당〉과 〈안경〉의 감독답게 새 영화 〈강변의 무코리타〉 주인공도 낯선 곳에서 낯선 사람과 부대끼게 만든다. 모르는 사람이라 처음엔 부담스럽지만 모르는 사람이라 오히려 편안해지는 순간이 온다. 핏줄로 엮인 가족(家族)의 의무감이 아니라 ‘같이 밥을 먹는 입’, 식구(食口)의 느슨한 연대감으로 서로 의지가 되는 것이다. 늘 그래왔듯이 이번 영화에서도.

그렇게 욕조를 내주고 말벗을 얻은 야마다는 ‘무코리타 연립주택’의 또 다른 세입자들 사연도 차츰 알게 된다. 그러다 오래전 연락 끊긴 아버지의 유골을 받아 든 야마다의 가슴속에 복잡한 감정이 한소끔 끓고 나면, 감독의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맛을 내는 이야기가 우리 앞에 차려진다. 어느 날 야마다가 만난 할머니의 정체와 툭하면 거꾸로 외는 구구단 7단의 비밀과 하늘을 헤엄쳐가는 금붕어 이야기까지 더해지면서 한층 더 색다른 맛으로 익어가는 영화가 된다.

〈고양이를 빌려드립니다〉(2012)부터인 것 같다. ‘죽음’과 ‘상실’을 자기 영화의 기본 찬으로 내놓기 시작한 게. 〈카모메 식당〉과 〈안경〉이 ‘스스로 떠나온’ 사람들 이야기라면 〈그들이 진심으로 엮을 때〉(2017)와 〈강변의 무코리타〉는 ‘밖으로 떠밀린’ 사람들 이야기라는 것도 내가 느낀 감독의 변화다. 멀리 떠나지 않는다. 가까이 두고 지켜낸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에서 새 삶을 시작하기보다는 ‘어딘가가 아닌 바로 여기’에서 내 삶을 이어가기로 한다. 이제는. 오기가미 나오코 영화의 주인공들이.

남몰래 혼자 울던 인생이었는데 남들도 혼자 울고 있었다는 걸 알고 나서 왠지 마음이 놓이는 야마다에게 옆집 아저씨는 말했다. “사소한 행복들을 자잘하게 찾아내다 보면 어떻게든 버텨나갈 수 있어.” 오물오물, 그 한마디를 야마다는 오래 곱씹는다. 밥 한 공기, 미소시루 한 그릇, 시원한 맥주 한 잔, 마요네즈에 찍어 먹는 오이와 다 같이 둘러앉아 먹는 스키야키 때문에라도 계속 살아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이다. 이번에도. 오기가미 나오코 영화의 주인공답게.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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