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션〉을 처음 본 건 중학교 때였다. 서울 중구 호암아트홀에서 엄마랑 둘이 보았다. 동네 동시상영관에서 〈천녀유혼〉을 보며 좋아 죽던 내가, 시내 고급스러운 예술영화관에 앉아 그 이름의 어감마저 너무나 예술적인 감독님의 영화를 처음 보게 된 것이다. 롤랑 조페? 칼싸움 영환가? 주인공이 칼을 들고 서 있는 포스터를 지나 극장의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간 중학생.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소싯적엔 극장에서 살다시피 했다던 엄마, 끼니는 걸러도 영화는 거르지 않았다던 내 엄마의 고개가 오프닝에서부터 뒤로 넘어갔다. 절벽을 기어오르는 로버트 드니로를 따라 고개를 젖히는 줄 알았는데 조금 뒤 코 고는 소리가 들렸다. 그렇게 젖혔다 숙였다를 반복하며 상영시간 내내 상모를 돌리더니 제러미 아이언스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엔딩에 이르러 내 쪽으로 푹, 덩달아 쓰러졌다가 화들짝 놀라 깬 엄마. 창피했다. 다시는 같이 극장에 오지 않겠다고 혼자 다짐도 했던 것 같다.

〈시네마 천국〉의 감독이 만든 엔니오 모리코네 다큐멘터리 〈엔니오: 더 마에스트로〉를 보러 갔다가, 영화 〈미션〉의 몇몇 장면을 그때 이후 처음 극장에서(!) 다시 보았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어느 날 감독에게 전화를 걸어 방금 생각난 멜로디가 있다면서 콧소리로 흥얼거렸다는 비하인드 스토리와 함께, 그 유명한 테마 ‘가브리엘의 오보에(Gabriel’s Oboe)’가 흐르는 영화 장면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다시 만났다. 갑자기 눈물이 차올랐다. 왜 이러지? 족히 백 번은 본 장면이잖아? 이걸 보고 또 운다고?

이것이 그의 음악이 부리는 마법이구나, 생각했다. 〈시네마 천국〉의 장면에서도,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장면이 나올 때도, 〈황야의 무법자〉 장면 위로 휘파람 소리만 들려와도, 어김없이 가슴이 벅차오르는 다큐였다. 음악만 들어도 너무 좋은데 그 음악을 만들어낸 과정까지 알고 나서 다시 듣는 그의 모든 음악이 전보다 더 아름답게 느껴졌다. ‘지금의 엔니오를’ 만든 거장들의 영화도, ‘그때의 엔니오가’ 만든 걸작의 순간들도, 모두 다 경이로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미션〉의 장면에서 갑자기 차오른 나의 눈물에는, 엔니오 모리코네의 음악 말고도 다른 까닭이 더 있음을 뒤늦게 알아챘다. 이 좋은 걸 그날, 엄마는 못 보았구나. 이 좋은 음악을 엄마는, 극장에서 못 들었구나.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나이, 하루아침에 망해버린 집의 벌이를 혼자 책임지며 애 셋을 키우던 엄마에게 그날 극장의 어둠이 얼마나 아늑했을까. 그 잠이 얼마나 달았을까. 엔니오 모리코네의 마법으로도 깨우지 못한 삶의 고단함을, 그때는 미처 몰랐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아 차오른 눈물이기도 했던 것이다. 많은 이들이 나와 같지 않을까. 다큐에 담긴 엔니오 모리코네의 시간 위로 그의 음악을 극장에서 만난 각자의 시간이 포개져 갑자기 미소 짓거나 별안간 눈물을 흘리게 되지 않을까.

엄마는 요양원에 계신다. 호암아트홀은 올해 초 철거가 시작되었다. 엄마랑 〈미션〉을 본 극장이 없어진 뒤에도 그곳에서 쌓아올린 나의 기억은 무너지지 않기를 바란다. 엔니오 모리코네가 떠난 뒤에도 그의 음악은 영원하듯이. 상영이 끝난 뒤에도 내 안에서는 끝나지 않는 어떤 영화들처럼.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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