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안 나니?” “안 나요.” 로키타(졸리 음분두)의 잔뜩 겁먹은 얼굴을 향해 화면 밖 누군가의 목소리가 소나기 펀치처럼 날아든다. “동생을 만난 곳이 학교라고 했지? 나자마자 버려져서 본 적도 없는데 동생인 걸 어떻게 알았어?” “···.” “로키타? 어떻게 안 거야?” “토리를 찾아달라고 했어요.” “이름을 어떻게 알고? 보육원에서 준 이름이라 넌 몰랐을 텐데.” “···.”

코너에 몰린 로키타. 가쁜 숨을 몰아쉰다. 공황발작 때문에 체류허가증 심사가 연기되었다. 시간을 벌었다. 집에 돌아와 동생 토리(파블로 실스)의 머리를 빗기며 말한다. “어떻게 널 알아봤는지 설명해낼 수 있어야 해.” “걱정 마. 누나는 잘 대답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서로를 다독이며 둘은 함께 일터로 향한다.

영화 〈토리와 로키타〉의 오프닝 장면. 고작 5분 만에 주인공 남매가 처한 상황을 다 눈치채게 만드는 연출. 감독들은 말한다. “우리 영화는 첫 장면부터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느낌을 준다. 한 영국 비평가는 ‘다르덴 형제 영화만 보면 제시간에 극장에 가도 늦게 도착한 느낌을 받는다’고 하더라(〈중앙일보〉 인터뷰, 2023년 5월 1일).”

딱 그 느낌. 분명히 처음부터 봤는데 중간부터 보고 있는 느낌. 영화가 만들어낸 인물들인데 오래전부터 유럽 어딘가에 계속 살고 있는 느낌. 그래서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영화 속 그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경험. 다르덴 형제의 작품에서만 느끼는 그 희귀한 생동감이 이번에도 영화를 가득 채운다. “왜 저는 체류증 주고 누나는 안 줘요?” “누나 없이 전 여기서 어떻게 살아요?” 열한 살 토리의 질문이 계속 내 명치께를 맴돈다. 기어이 마음 깊은 곳에 거센 소용돌이를 만들어냈다.

“그는 오로지 부정적으로만 정의되었다. 그에게는 신분증이 〈없다〉. 그는 프랑스인이 〈아니다〉. 그는 백인이 〈아니다〉. 그는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의 부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거울이기도 했다. 그를 보면 프랑스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 수 있었다.” 영화 〈웰컴 삼바〉(2014)의 원작 소설 가운데 일부. ‘그’를 ‘로키타’로, ‘프랑스’를 ‘벨기에’로 바꾸어 다시 읽어본다.

“로키타는 오로지 부정적으로만 정의되었다. 로키타에게는 신분증이 〈없다〉. 로키타는 벨기에인이 〈아니다〉. 로키타는 백인이 〈아니다〉. 로키타는 ‘사람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의 부정이었다. 하지만 로키타는 거울이기도 했다. 로키타를 보면 벨기에가 어떻게 변해가는지 알 수 있었다.”

이제 벨기에를 다시 한국으로 바꾸어 읽을 차례다. 이민자는 우리 곁에도 있다.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이곳에도 많다. 토리와 로키타는 결국, 낯선 타인처럼 보이는 낯설지 않은 이웃들. 영화엔 국적이 있지만 질문엔 국적이 없으므로. 영화가 세상을 바꾸진 못하지만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하게 만들 순 있으므로. 다르덴 형제는 또 한번 묻고 있다. 우리는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가. 당신은 어떤 세상에 살기를 원하는가.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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