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초, 대통령실이 국가정보원(국정원) 김남우 기획조정실장(기조실장)을 불렀다. 예정에 없던 호출이었다. 대통령실은 이 자리에서 국정원 부서장급 1급 간부 8명에 대해 직무 대기발령 조치를 요구했다. 기조실장으로부터 대통령실 메시지를 보고받은 김규현 국정원장이 용산을 찾아갔다. 윤석열 대통령 면담을 요청하고 ‘상황’을 설명했다.

국가정보원 1급 간부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외부로 노출됐다. ⓒ국회사진기자단
국가정보원 1급 간부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외부로 노출됐다. ⓒ국회사진기자단

김규현 원장과 김남우 기조실장이 대통령실을 방문하기 일주일 전, 윤 대통령은 국정원 1급 간부 17~18명의 승진·보직 인사를 재가했다. 나중에 대통령실이 대기발령 조치를 요구한 8명이 여기에 포함돼 있었다. 윤 대통령과 김 원장 면담 이후에도 대통령실 요구는 바뀌지 않았고 오히려 이들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인사 재가가 철회됐다. 대통령실은 별도로 이번 1급 간부 인사 배경에 대한 진상조사에도 착수했다.

인사가 확정되기 전 진행 과정에서 대상자들이 바뀌는 건 드문 일이 아니다. 그러나 철회된 이번 국정원 인사는 내부 검토와 법무부 인사정보관리단, 대통령실 검증을 거친 뒤 윤 대통령 재가에 따라 정식 임명됐다. 고위급 인사가 대통령 결재 일주일 만에 뒤집히고 그 내용이 외부에 고스란히 노출된 일은 1999년 국정원으로 개편된 이후 처음이다.

국정원 인사 번복은 기관 내부에서 나왔다고 알려진 ‘투서’에서 시작됐다. 대통령실이 접수된 투서 내용을 인사에 반영한 것으로 전해졌으나, 대통령실은 “받은 적도 없고 투서를 근거로 인사를 하지 않는다”라고 밝혔다. 투서를 직접 받은 건 여권 실세 의원들과 국회 정보위원회 소속 일부 여야 의원 등이다. 이후 여권을 통해 투서에 담긴 내용이 “국정원에 문제가 있는 것 같다”라는 취지로 대통령실 국가안보실에 전달됐고, 국가안보실은 자체적으로 사실관계를 파악한 뒤 보고서를 만들어 윤석열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서를 검토한 윤 대통령도 직접 여러 경로로 투서 내용과 정보기관 내부 속살이 외부로 드러나게 된 배경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이 김남우 국정원 기조실장을 호출하고 김규현 국정원장이 용산을 찾아간 것은 그다음 일이다. 인사 번복 배경에는 투서 내용 대부분이 사실에 가깝고, 사안도 심각한 수준이라는 윤 대통령과 대통령실의 판단이 깔려 있었다.

2022년 11월24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김규현 국정원장(가운데). ⓒ연합뉴스
2022년 11월24일 국회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김규현 국정원장(가운데). ⓒ연합뉴스

투서에는 국정원 실세로 지목된 간부 A씨가 내부 인사에 지나치게 개입했다는 문제 제기가 담긴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1급 간부 인사에서 승진 대상자는 7명이었다. 여기에는 A씨 본인이 포함돼 있었고, 다른 3명은 A씨의 국정원 공채 입사 동기였다. 기수와 업무 이력 등을 종합했을 때 이례적인 승진이며, A씨가 자신의 측근이자 특정 지역 출신들을 요직에 앉히면서 내부에 큰 세력을 만들고 있다는 게 투서의 주된 내용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인사 전횡’ 지목 A씨는 누구?

A씨는 윤석열 정부 들어 고속 승진을 하며 요직을 맡았다. 지난해 김규현 원장 취임과 함께 비서실장으로 임명(당시 3급)됐고, 이후 대북방첩센터장으로 자리를 옮기며 2급으로 승진했다. 국정원 방첩 업무는 문재인 정부 시절 유명무실했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후 방첩센터가 신설되며 힘이 실렸다. 지난해부터 국정원 등이 수사하는 창원·진주·전주·제주 민주노총 간첩 의혹 사건은 A씨가 센터장이 된 이후 시작됐다.

대북 파트 국장이 따로 있었지만, 방첩센터는 국정원장 직속 조직이라 A씨는 지휘체계를 건너뛰고 원장에게 직보했다. 이 때문에 비서실장직을 떠났음에도 국정원 인사와 조직 관련 업무에 관여할 수 있었다고 알려졌다. A씨는 올해 철회된 인사에서 1급으로 승진했다. 1년 만에 3급에서 1급 승진은 국정원 내부에서 전례가 없다. A씨는 승진과 함께 정책 관련 부서를 새로 만들어 기조실장이 총괄하는 조직과 인사, 예산 업무를 일부 가져오려고 했던 것으로도 전해졌다.

이번 인사 번복 사태 배경이 외부에 드러나는 과정에서 외교관 출신 김규현 원장이 국정원 공채 출신 비서실장 A씨에게 휘둘린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A씨 발탁 전후 사정을 보면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는 게 국정원 안팎의 해석이다. A씨는 김규현 원장이 취임하면서 비서실장에 발탁됐다. 당초 비서실장에는 다른 인사가 거론됐으나 김 원장 임명이 확정되면서 교체됐다. A씨의 비서실장 발탁 배경에는 윤석열 대통령 후보 시절 캠프에 합류했던 국정원 출신 관계자와 여당 의원 등의 추천이 있었다.

국내정보 파트에서 오래 근무한 A씨가 문재인 정부 시절 국정원 개혁 일환으로 이뤄진 ‘국내정보 수집 업무 폐지’로 한직을 떠돌았다는 말이 있었다. 이 때문에 윤석열 정부에서 추천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실제 A씨는 정보 수집과 정무 감각을 인정받아 문재인 정부 시절 주요 보직을 맡기도 했다고 한다. 윤석열 캠프에서 A씨를 추천한 인사들은 A씨와 국내정보 파트 근무연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규현 원장과 A씨는 ‘이념적 성향’도 잘 맞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규현 원장은 취임 초기부터 국정원에서 전임 정부의 색깔을 완전히 빼내려고 했다. 지난해 국정원의 대규모 인사 발령이 그 일환이었다. 지난해 9월 국정원에서 1급 간부 27명이 퇴직했고 12월에는 2·3급 인사 100여 명이 보직을 받지 못했다. A씨가 이 과정에서 인사와 관련한 김규현 원장의 판단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게 여권과 국정원 안팎의 해석이다.

지난해 10월 검사 출신 조상준 당시 국정원 기조실장이 돌연 사직서를 낸 배경에도 A씨가 지목된다. 윤 대통령의 검사 시절 최측근이었던 조상준 전 실장이 사퇴하던 당시 갖가지 해석이 나왔다. 그중 하나가 김규현 원장과 인사를 둘러싸고 갈등을 겪었다는 것이다. 김 원장은 전임 정부 시절 중용된 직원들을 모두 바꿔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조 전 실장은 전문성과 실적 위주의 인사를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조 전 실장이 국정원을 떠나면서 김 원장이 판정승을 거뒀는데, 이때 A씨의 존재가 부각됐다고 한다. 원장과 차장 및 고위급 인사들의 의사소통 길목에 있던 A씨가 관련 정보를 차단하거나 선별해 전달했다는 게 여권 관계자들의 해석이다.

국정원 향한 대통령실 그립 강해진다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진 만큼, 국정원 내부에서는 ‘내전’에 준하는 파벌 싸움이 벌어졌다는 해석이 나왔다. 전임 정부 시절 중용됐다 밀려난 직원들과 신진 세력의 갈등설, 국정원 내부 세력과 윤석열 정부 들어 파견된 검찰 라인 사이 갈등설, 해외정보 파트와 국내정보 파트의 힘겨루기설 등이다. 인사 전횡 의혹 핵심으로 지목된 A씨 측도 “정권교체 이후 밀려난 인사들이 김규현 원장과 특정 인사들을 밀어내기 위한 시도”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안팎을 돌던 갈등설은 최근 구체화되기도 했다. 김규현 원장이 인사 번복 사태를 이유로 권춘택 1차장에 대해 감찰을 지시했다는 관측이었다. 1차장은 국정원장에 이은 서열 2위로 해외정보를 총괄한다. 공채 출신 해외 파트 전문가인 권춘택 1차장은 김규현 원장 지명 전 국정원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지난해부터 단행된 국정원 인사에 다소 온건한 입장으로, 김규현 원장 판단에 일부 반대 의견을 내며 A씨와도 충돌했던 것으로도 알려졌다. 다만 권춘택 1차장에 대한 김 원장의 감찰 지시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내부 갈등설’이 퍼지며 정보기관이 내부에서 각종 ‘공작’을 벌이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22년 10월 사임한 조상준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현 원장과 갈등이 있었다는 해석이 나온다.ⓒ연합뉴스
2022년 10월 사임한 조상준 전 국정원 기획조정실장. 현 원장과 갈등이 있었다는 해석이 나온다.ⓒ연합뉴스

국정원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한 여권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인사 단행을 앞두고 내부에서 여러 의견이 나오는 건 어느 조직이든 마찬가지다. 원 내부에 파벌도 분명히 있지만 이번 인사 문제 ‘당사자’로 지목된 인물들이 외부에 제보하고 노출할 정도로 심각한 갈등을 빚은 건 아니었다. 세력 간 다툼이라기보다는 논공행상 과정에서 대상자들 사이 요직을 두고 갈등을 빚었다는 데 무게가 실리고 있다. 검찰 라인의 경우 기조실장직을 연달아 맡으면서 인사와 조직을 총괄하고 있지만, 이번 인사 문제를 보면 처음부터 전혀 힘을 못 쓰고 있었다는 게 명확히 드러났다고 봐야 한다.”

인사 문제와 함께 김규현 원장의 리더십도 도마 위에 올랐다. 그가 중용한 A씨가 문제의 핵심으로 지목된 것은 김 원장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의 조직 장악력에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김 원장은 윤 대통령과 면담하면서 “대통령실이 이번 국정원 인사에 대해 오해가 있었다”라는 취지로 해명했다고 한다. A씨가 자신의 인사 판단에 깊숙이 관여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고도 설명했다. 다만 윤 대통령은 김 원장 해명을 전부 수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때문에 대통령실과 여권 일각에선 김 원장의 교체 가능성도 거론됐지만 윤 대통령은 최근 김 원장 유임을 결정했다. 진상조사를 통해 책임 소재를 명확히 가리겠다는 뜻이란 해석과 이번 정부의 고질적 문제인 좁은 인력풀로 인해 당장 마땅한 후임 국정원장을 찾기 어려워 내린 고육지책이라는 분석이 함께 나온다.

대통령실은 공직기강비서관실을 중심으로 이번 국정원 인사 문제에 대한 진상조사에 착수했다. 국정원은 별도로 인사 시스템을 점검하고 개편할 방침이다. 다만 국정원 자체 해결보다는 대통령실이 나서 교통정리를 하게 된 상황이라, 국정원에 대한 대통령실 그립이 강해질 수밖에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국정원 관계자는 “정보기관 인사 등에 대해서는 확인해줄 수 없다”라고 밝혔다.

기자명 문상현 기자 다른기사 보기 m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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