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육아계의 금수저다. 아이를 낳고 출근한 이래 초등학생 학부모가 된 지금까지, 양가 어머니들이 번갈아 아이를 전담하여 봐주신다. 남편의 육아 분담 비율은 대한민국 남성 상위권이다. 급할 때 도움을 청할 여동생과 시누이도 있다. 모두 부러워할 만한 조건이다. 내 노력과 무관하게 주어진 ‘타고난’ 육아 조건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회사를 진작 그만둘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사실 사표를 고민하는 것도 사치다. 남녀고용평등법은 육아휴직을 이유로 불리한 처우를 한 사업자에게 3년 이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 벌금에 처한다고 못 박고 있지만, 여전히 육아휴직 뒤 책상이 사라지는 세상이다.
한 로펌 변호사가 둘째를 출산하면서 첫째 자녀 육아휴직과 둘째 자녀 출산휴가를 사용하고 6개월 뒤 복직하기로 했다. 복직을 한 달 앞두고 회사는 ‘실질적 근로관계는 출산 준비로 인한 이석 시 종료되었다’고 통보했다. 말 그대로 ‘책상을 뺀 때 근로관계는 끝났다’는 것이다. 해당 로펌은 “고액의 급여를 받고 재취업이 쉬운 업계 특성상 여성 변호사가 출산하면 근로관계를 종료하는 것이 업계의 오래된 관행”이라고 주장했다. 법원은 부당 해고라고 판단했지만, 해당 로펌이 항소 복직 예정일로부터 2년 넘게 다툼이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육아휴직 후 부당 전직 인정받기까지 7년
복직 후 불이익 문제는 더 어려운 싸움이다.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사업주는 육아휴직 사용 근로자에게 육아휴직을 이유로 업무상 또는 경제상의 불이익을 주지 않아야 하고, 복귀 후 맡게 될 업무나 직무가 육아휴직 이전과 현저히 달라짐에 따른 생경함, 두려움 등으로 육아휴직의 신청이나 종료 후 복귀 자체를 꺼리게 만드는 등 근로자로 하여금 심리적으로 안정된 상태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함에 지장을 초래하지 않아야’ 한다. 멋진 문장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이 원칙을 인정받기 위해 소송을 불사하며 싸우기란 쉽지 않다. 지난해 대법원은 육아휴직 전후 임금 수준이 같더라도, ‘업무의 성격과 내용, 범위, 권한, 책임 등에 불이익이 있는지, 기존에 누리던 업무상·생활상 이익이 박탈되는지 여부와 정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불이익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고 구체적인 기준을 제시했는데, 부당 전직을 인정받은 이 사건도 육아휴직 복직 뒤 판결이 확정되기까지 7년 가까이 걸렸다.
또 다른 사례로는 팀장으로 일하다 육아휴직 뒤 팀원으로 인사 발령이 났는데, 육아휴직 신청 전에 이미 보직 해임 결정이 있었으므로 육아휴직을 이유로 한 불이익은 아니라는 취지로 대법원이 판단한 사건도 있다. 이처럼 육아휴직에서 복직한 뒤 타지역 발령, 보직 강등, 승진 누락, 인사고과 저평가 등의 인사 조처를 받더라도 ‘육아휴직을 이유로’ 한 것인지, 아니면 육아휴직과 무관한 ‘개별 근로자의 능력’이나 ‘회사 사정’과 같은 ‘다른 이유’에서인지 구별하여 다투는 일은 만만치 않다.
최근 한국 아빠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긴 육아휴직을 쓸 수 있지만, 사용률은 최하위권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가 있어도, 불안감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휴직하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다. 육아휴직을 쓰고 불이익을 받아도, ‘원래 능력이 없었다’라거나 ‘바뀐 업무도 회사에 필요한 업무’라는 회사 주장에 맞서 싸우기 어렵다면, 불안감은 해소될 기회가 없다. 주변만 둘러보아도 육아휴직 이후 한직으로 전보되거나 승진을 못한 경우들이 있지만, 남녀고용평등법 위반과 관련한 판결은 현실에 비해 많지 않다.
상시 근로감독을 강화한다거나 사업주에게 더 엄격한 입증책임을 묻는다거나, 회사를 상대로 남녀고용평등법 위반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불이익한 조처를 하면 더 엄격하게 배상책임을 묻는다거나, 최소한 판결이라도 빨리 내려주는 조치가 필요하지 않을까. ‘사업주는 육아휴직을 이유로 해고나 그 밖의 불리한 처우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육아휴직 기간에는 그 근로자를 해고하지 못한다. 다만, 사업을 계속할 수 없는 경우에는 그러하지 아니하다’라고 규정된 남녀고용평등법 제19조 제3항과 관련한 더 많은 소송과 승소 판결이 쌓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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