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그날의 술자리를 생각하면 지금도 수치스럽다. 변호사가 되기 전, 2년 차 사회부 기자 시절의 일이다. 수사 상황을 절대 알려주지 않는 형사들 틈에서, 어떤 수사를 하고 있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알아내라는 지시를 받던 때였다.
기자가 사무실에 들어서면 하던 말을 멈추고 잡상인처럼 내쫓는 경우가 많았지만 반갑게 맞아주던 수사팀 한 반장이 있었다. 팀 회식에 초대받고는 ‘드디어 친밀한 취재원이 생기는 것인가!’ 기쁘게 따라나섰다.
그러나 2차 자리에서 아버지뻘인 그 반장은 ‘진짜 오르가슴을 느낄 때 여자들이 보이는 신체적 반응’에 대해 내 앞에서 장광설을 늘어놓았다. 적당히 맞장구쳐주고 끝내 아무 정보도 얻지 못하고 헤어진 그날 밤, 잠이 오지 않았다. ‘성적 굴욕감이나 수치심’ 때문은 아니었다. 순진하고 어린 ‘여기자’와 시시덕거리려고 나를 회식에 불렀던 것일까? ‘나를 기자로 생각이나 한 것일까’ 자괴감이 들었다. 그 기분은 길거리에서 누군가 내 엉덩이를 만지고 도망갔을 때 느낀 ‘빡침’과도 다른 것이었다.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기습적으로 성추행을 당했을 때 똥 밟은 기분이 든다면, 직업적 관계로 얽힌 사람한테 당하는 성희롱은 ‘직업인으로서의 자존감’이 훼손당한다는 점에서 더 고약하다. ‘나는 왜 상대방에게 ‘업무 파트너’로 보이지 못했던 것일까’ 스스로 계속 곱씹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밤 일을 끝내 문제 삼지 않았다. 기삿거리를 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성희롱이라고 문제 삼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절차를 밟기에는 기회비용이 너무나 컸다.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 치러야 했던 것들
최근 대법원은 성희롱을 문제 삼은 수습 PD를 해고한 회사 간부들에게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다. 기회비용이라는 단어를 다시 떠올렸다. 판결문에 따르면, 피해자는 ‘독서실에 오래 앉아 있는 여자는 엉덩이가 안 예쁘다’ ‘내 성기에 뭐가 났어. 내가 뭐 성병 걸릴 뭐를 해야 성병이 걸리지’ 따위 부적절한 말을 회사에서 여러 차례 들었다. 피해자가 성희롱 상황에 이의를 제기하자, ‘인성에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교육에서 배제되고 정규직 전환이 되지 않았다. 부당해고 판정을 받고 복귀했지만, 재계약이 거절되어 또다시 해고되었다. 성희롱 문제와 관련하여 이의를 제기한 피해자는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직장 내 성희롱 관련 자문 업무를 하고 있지만, 성희롱 피해자에게 선뜻 싸우라고 권하기는 쉽지 않다. 이 사건 피해자도 2016년 가을에 성희롱을 당하고 2023년 2월에야 성희롱과 2차 피해에 대한 위자료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시간, 노력, 비용, 직장 내에서의 평판 등 모든 기회비용을 생각할 때 직장 내 성희롱은 아직 너무나 많은 것을 걸어야 하는 싸움이다.
그럼에도 직업인으로서 자존감을 회복하는 길을 택하고, 싸움의 선례를 만든 피해자에게 응원의 마음을 보낸다. 나를 찾아온 의뢰인이 ‘나는 왜 그런 말을 들어야 했을까?’ 혼자 곱씹지 않을 수 있도록, 직장인으로서 너무 많은 것을 걸지 않아도 성희롱 피해를 말할 수 있다고 마음 편히 조언할 수 있는 세상이 좀 더 가까워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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