홋폿(왼쪽)은 양고기와 양파 위에 도톰하게 납작썰기한 감자를 올린 다음 육수나 물을 자작하게 붓고 오븐에서 익힌 음식이다. ⓒ최은주

영국에는 피시앤칩스나 샌드위치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믿기 어렵겠지만 '국물 요리' 도 있다. 스튜가 그것인데, 스튜란 국물(liquid)에 단백질과 탄수화물을 넣고 푹 익힌 음식을 총칭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국물+단백질+탄수화물의 조합인 셈인데 이 구성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요리가 탄생한다.

먼저 국물로는 육수, 채수, 와인이나 맥주, 아니면 그저 물을 쓸 수 있다. 단백질의 경우 소고기·돼지고기·양고기·닭고기 등 각종 고기나 콩 등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뵈프 부르기뇽처럼 재료를 한 번 볶은 후 국물을 첨가하는 방식을 쓸 수도 있고, 아이리시 스튜나 랭커셔 홋폿처럼 모든 건더기를 처음부터 국물과 같이 넣고 조리하는 방법을 쓸 수도 있다. 또한 어떤 조리 기구를 쓰느냐에 따라 불 위에서 직접 조리하는 것과 오븐에서 조리하는 것, 불 위에서 볶은 후 오븐에서 마무리하는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여기에 다양한 양념과 향신료를 더할 수 있다.

단백질 국물에 탄수화물을 더하기 위해 일단 스튜를 만들고 납작한 오븐 접시에 담은 다음 페이스트리로 뚜껑을 씌워 다시 오븐에 구워서 먹기도 한다. 이러면 요리의 이름이 파이로 바뀐다. 소나 양의 기름과 파슬리 등의 향신료를 넣은 밀가루를 반죽하여 덤플링을 만들어 끓고 있는 스튜 냄비에 넣기도 한다. 또는 크리스마스 푸딩 틀에 이 밀가루 반죽으로 바닥을 깔고 스튜를 부은 뒤 다시 반죽으로 뚜껑을 만들어 씌워 안에 든 스튜를 꼭꼭 감싼 다음 쪄내기도 한다. 이렇게 만들어낸 것은 푸딩이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랭커셔 홋폿은 위 다양한 스튜 만들기 조합 중 가장 단순하고 손이 안 가는 조리법의 음식이다. 홋폿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이 스튜를 만드는 데 쓰이는 높은 토기를 말한다고 하기도 하고, 재료를 층층이 쌓는 요리법 때문에 뒤섞여 있는 상태라는 뜻의 호지포지(hodgepodge)라는 단어에서 왔다고 하기도 한다. 랭커셔 지방의 이름이 이 요리에 붙은 까닭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은데, 아마도 랭커셔에서 나는 값싼 부엌용 석탄이 유명했고 이 지역에서 일찍이 감자를 요리에 사용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랭커셔 홋폿은 영국 북서쪽 지방에서 즐겨 먹는 음식으로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었지만 1895년 〈영국 요리법(The English Cookery Book)〉이라는 요리책이 발간되면서 나머지 지역에서도 유행하는 음식이 되었다.

무엇보다 홋폿은 재료나 만드는 방법이 이보다 더 단순할 수 없다. 도구도 어느 집에나 하나쯤은 있을 법한 오븐에 넣을 수 있는 질그릇 냄비 하나면 된다. 높이가 높고 뚜껑 있는 냄비를 사용하는 것이 정석이지만, 가장 쉽게 만들고자 한다면 오븐에 사용 가능한 냄비에 먼저 양고기와 양파를 적당히 담고 도톰하게 납작썰기한 감자를 그 위에 지붕 덮듯이 올린 다음 육수나 물을 자작하게 붓고 오븐에 넣어 익을 때까지 그냥 두면 된다.

홋폿의 내용물을 접시에 옮겨 담은 모습. 홋폿은 분명 국물 요리이지만 탕, 찌개 같은 한국 국물 요리와는 많이 다르다. ⓒ최은주

포인트는 모든 재료를 냄비에 담고 뚜껑을 덮은 채 적당한 온도의 오븐에 넣어두기만 하면 된다는 데 있다. 이러면 음식이 저 혼자 천천히 조리되면서 일을 마치고 지친 채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따뜻한 식사가 되는 것이다. 이는 산업혁명 당시 랭커셔 지역에 번성했던 섬유산업 종사자들의 바쁜 라이프스타일에 적절한 조리법이었다. 홋폿은 꽤 인기 있는 음식이었던 모양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제인 오스틴이라 불리는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산업혁명 시대를 배경으로 쓴 소설 〈남과 북〉에 등장하는 방적공장 사람들은 랭커셔 홋폿이 제공되는 날이면 노동쟁의가 없을 거라는 농담을 했을 정도다.

한국식 찌개가 변용되는 날이 오면

또한 영양가 있으면서 동시에 싼 재료를 조달하여 만들 수 있는 음식이기도 했다. 감자나 양파와 같은 뿌리식물의 경우 북서쪽 지방의 정원에서도 쉽게 자랐다. 부자들은 어린 양의 고기(램, lamb)로 만든 홋폿을 선호했지만 노동 계층 사람들은 나이 든 양의 고기(머튼, mutton)를 사용했다. 나이 든 양의, 구워서 먹기에는 좀 질긴 고기를 물이나 육수를 넣고 끓이면 70~80℃ 정도에서 질긴 근육 조직이 끊어지면서 연하게 바뀌고 거기서 녹아나온 젤라틴이 볶은 양파 국물에 맛을 더하고 끈적하게 되어 소스까지 한 번에 만들어진다. 탄수화물로는 감자가 더해졌다.

랭커셔 홋폿은 쌀쌀한 계절 영국 펍들의 단골 메뉴이기도 하지만 영국인들이 어릴 때부터 먹던 '할머니 요리'이기도 하다. 그러니 사람마다 만드는 법도 다르다. 워낙 단순한 구성이니 다양하게 변주되는 것도 가능하다.

2022년 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즉위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세계 각국에 주재하고 있는 영국 대사관들에서 레시피를 모아 요리책을 낸 일이 있다. 당시 주프랑스 영국 대사관에서는 '모던 랭커셔 홋폿 쉬르 카나페(Moderne Lancashire Hotpot sur Canapé)', 즉 '카나페 위의 현대적 랭커셔 홋폿'라는 제목의 요리를 제출했다.

이 요리를 개발한 사람은 1970년부터 40년간 파리의 영국 대사관에서 일했던 프랑스 요리사다. 대영제국 훈장을 받았다. 이 세월 동안 영국 대사 10명과 프랑스 대통령 5명, 프랑스 총리 15명, 영국 총리 7명에게 음식을 만들어주었다. 이 요리사는 에드워드 8세가 이혼녀인 심프슨 부인과의 결혼으로 영국 왕위를 포기한 후 파리로 건너가 살 때 그 부부에게 요리를 만들어주면서 영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 만드는 법에 눈을 떴다는데, 영국 음식에 영국 재료를 사용하되 프랑스식을 가미하는 것이 특기라고 한다.

주프랑스 영국 대사관의 프랑스 요리사가 개발한 ‘모던 랭커셔 홋폿 쉬르 카나페’의 레시피. 원조 랭커셔 홋폿과는 천지 차이의 음식이다. ⓒ최은주

위 요리책에 실린 레시피와 사진을 보자면, 이 요리는 가장자리를 잘라내고 반으로 자른 식빵을 땅콩기름을 섞은 버터로 구운 토스트 위에, 여러 야채를 조리한 것과, 지방과 뼈를 제거한 다음 역시 버터에 구운 영국산 램, 구운 토마토, 바삭하게 튀겨낸 파스닙을 얹은 것이다. 조리법도 생긴 모양도 복잡하고 섬세하기 짝이 없어서, 그 탄생도 만드는 방법도 소박함의 표본과 같은 랭커셔 홋폿과는 천지 차이의 음식이다. 게다가 다른 걸 떠나 국물이라곤 전혀 없다.

따지고 보면 한국식 찌개 역시 주로 고기나 생선을 우려 국물로 하는 경우가 많고, 야채, 단백질 및 탄수화물 등의 다양한 재료를 국물에 같이 넣은 후 불 위에서 직접 조리하는 방식을 쓴다. 영국식 스튜보다 국물이 넉넉한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한국식 찌개를 변용한 스튜 요리가 영국뿐 아니라 각국의 식탁에 등장하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원조라는 주장 내지 '원형은 저렇지 않다'는 주장은 현란하고 창조적인 변주 앞에선 무의미할 수도 있겠다.

기자명 김세정 (변호사)·최은주 (이학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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