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전 금요일인 굿 프라이데이에는 달큰한 핫 크로스 번을 즐겨 먹는다. ⓒMilla preece 제공
부활절 전 금요일인 굿 프라이데이에는 달큰한 핫 크로스 번을 즐겨 먹는다. ⓒMilla preece 제공

한국은 더 이상 농경사회가 아니지만, 여전히 명절은 농사짓던 시절에 중요했던 날짜들이다. 마찬가지로 영국 사회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전통에 기반해 있다. 현대 영국 사회는 다종교·다문화를 표방하고 충분히 세속적이지만, 여전히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이 가장 중요한 명절이다. 한국의 명절 음식처럼 영국 역시 절기에 맞춰 먹는 음식이 달라진다.

크리스마스와 달리 부활절은 매년 날짜가 바뀐다. 부활절은 예수가 ‘못 박혀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신’ 날이다. 서방 교회의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다음 보름달이 뜨고 나서 첫 일요일이다. 2023년의 경우 4월9일이다.

그런데 부활절 이야기를 하려면 카니발 및 사순절(렌트·Lent)부터 따지는 것이 시간 순서에 맞는다. 사순절은 부활절로부터 거꾸로 세어 40일의 기간이다. 이때에는 육류나 달걀, 유제품 등을 먹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부활절이라는 종교적으로 큰 행사 전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정화시키는 시기인 셈이다. 이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껏 즐기려는 것이 사육제, 즉 카니발로 발전되었다. 베니스나 리우데자네이루의 카니발도 사실 종교 행사인 셈이다.

유럽 대륙보다 산업화 및 세속화가 빨랐다고 할 수 있는 영국에는 카니발 대신 종교 색채가 없는 팬케이크 데이가 있다. 사순절이 시작되기 전 찬장의 달걀·우유 등을 소비하기 위해 생긴 전통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도톰한 팬케이크는 미국식이고, 영국은 오히려 프랑스의 크레페에 가깝다. 남아 있는 13세기의 팬케이크 레시피에 따르면 밀가루·달걀에 맥주 혹은 와인을 넣어 반죽을 만들고 버터에 얇게 구워서 설탕을 뿌려 먹었다고 하니 현대와 별 차이가 없다. 금욕의 시기를 맞기 전 마지막 식사라고 하기에는 소박하기 짝이 없는 것이 참으로 영국스럽다.

팬케이크 데이에는 파티를 하기도 한다. 얇게 부친 팬케이크를 기본으로 하고 거기에 곁들일 요리를 준비한다. 스튜를 만들 수도 있고, 채식주의자를 위해서라면 라타투이가 등장한다. 요리에 자신이 없다면 여러 종류의 치즈를 준비하면 된다. 디저트 역시 설탕과 레몬을 곁들인 팬케이크다. 아이스크림이나 초콜릿, 잼을 같이 먹어도 된다.

팬케이크 데이를 지나면 사순절에 접어든다. 현대 영국인들은 육류 등을 포기하는 대신 무언가를 절제하겠다는 선언을 한다. 보통은 초콜릿이나 과자 등 좋아하는 간식을 먹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루에 한 가지 선한 일을 하겠다든가 매일 운동을 하겠다든가 하는 각오도 해볼 수 있다. 평소에 남용했다 싶은 것들을 하지 않고, 해야 하지만 안 했던 일들을 하면서 좋은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는 셈이다.

마더링 선데이를 기념하는 음식 심널 케이크. 케이크에 올린 달걀 모양 장식 11개는 예수의 열한 제자를 의미한다. ⓒEllie Ribeiro Beaman 제공

사순절 기간의 중간 정도에 마더링 선데이(Mothering Sunday)가 있다. 올해는 3월19일이었다. 자기가 세례를 받은 ‘모교회’를 방문하는 날이다. 출신지를 떠나 멀리 살던 사람들이 일 년에 한 번 고향 교회를 방문하여 신앙과 삶을 재충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이때의 절기 음식에 해당하는 것이 심널(Simnel) 케이크다. 마지팬(아몬드·설탕·달걀을 섞어 만든 말랑말랑한 반죽)과 밀가루·설탕·버터·달걀 반죽에 각종 향신료와 말린 과일들을 넣은 묵직한 케이크인데, 맨 위에 마지팬을 달걀 모양으로 11개 만들어 올리는 게 특징이다. 예수를 배신한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한 제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지금은 이날을 어머니날로도 기념한다.

유럽에서 부활절이 지닌 중요한 의미

보통 식빵보다 설탕·우유·버터·건포도 등이 더 들어가 달큰한 번은 홍차와 더불어 출출한 오후의 든든한 간식이 된다. 굿 프라이데이는 기독교도들에게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인류 구원 프로젝트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날이니 이날에 만든 핫 크로스 번은 이듬해까지도 상하지 않는다거나 치료의 효과가 있다는 말이 있다. 물론 실제로 그렇지는 않다.

이제 드디어 부활절이다. 겨울과 여름 일광 시간의 차이가 큰 유럽에서 부활절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영국에서 비교적 남쪽에 위치한 런던이지만 크리스마스 날 낮의 길이는 7시간50분으로 하루의 3분의 1이 안 된다. 같은 날 서울의 낮 길이가 9시간34분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짧다. 그러다가 춘분이 되어 낮이 12시간 이상 된다는 것은 너무나 기쁜 일이다. 해가 점점 길어지고, 스노드롭(설강화)이나 크로커스가 고개를 내밀고 수선화가 피어나면 이번 겨울도 다 지나갔구나 느끼기도 할 터이다. 조용한 동네 길에선 아기 토끼들이 뛰어다니는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부활절의 상징인 달걀 장식과 핫 크로스 번. ⓒMilla Preece 제공

고대로부터 알은 생명의 상징이었다. 게다가 사순절 동안 달걀을 먹지 못했으니 부활절에 달걀이 등장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다. 교회에서는 달걀에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나눠주기도 한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는 달걀과 병아리로 장식한 모자 만들기 경연 대회를 연다. 초콜릿 소비량도 부활한다. 교회, 학교, 공원이나 궁전 등지에서는 달걀 모양의 초콜릿을 여기저기 숨겨놓고 찾는 이벤트를 벌인다. 조부모들도 집에 올 손자들을 위해 마당 곳곳에 초콜릿 달걀들을 숨겨놓는다. 달걀이나 토끼 모양의 초콜릿을 선물로 주고받기도 한다.

크리스마스 정도의 규모는 아니지만, 평소보다 많은 수의 가족들이 만나서 식사를 하고 안부를 나누는 날이기도 하다. 부활절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메뉴는 어린 양 구이다. 유월절에 양을 잡아 제사를 지내고 고기를 구워 먹던 유대교 풍습의 영향, 예수를 제물이 되는 어린 양에 비유하는 기독교의 영향, 이 시기의 들판에서 새끼 양들을 흔히 볼 수 있다는 점 중 어느 것이 가장 큰 이유인지는 확신할 수 없다. 양을 많이 키우는 잉글랜드에서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양들을 볼 수 있다. 새끼 양이 많이 태어나는 봄에는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깡총깡총 뛰어다니는 새끼 양에게 직접 젖병을 물려주는 체험을 할 수도 있다. 그러다가 '부활'의 일요일에 식탁에 누운 양을 만나게 되면 내가 살기 위해 다른 무언가를 죽이고 먹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생존의 무게를 생각해보는 것이다.

영국의 겨울은 한국에 비해 혹독하게 춥지는 않다. 다만 비가 많이 오고 해가 짧으니 우울하기 짝이 없다. 부활절을 기점으로 날씨가 좋아져서 푸르고 찬란한 봄과 여름으로 접어드는 것이 보통인데, 그렇지 않은 경우 기대를 배신당한 사람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게 된다. 전쟁과 기후변화로 올해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그야말로 만물이 부활하기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이다.

기자명 김세정 (변호사)·최은주 (이학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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