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7월 개막하는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대회를 준비 중인 국가대표팀 박은선 선수. ⓒ시사IN 조남진
오는 7월 개막하는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대회를 준비 중인 국가대표팀 박은선 선수. ⓒ시사IN 조남진

박은선 선수(서울시청)는 인터뷰 내내 “운이 좋았다”와 “재미있다”는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베테랑 공격수 박은선의 현재를 설명해주는 말이었다. 지난해 콜린 벨 감독의 호출로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에 7년 만에 합류했다. 그의 ‘등판’에 관심이 쏟아진 건 당연했다. 열일곱 살에 대표팀에 발탁돼 ‘천재 스트라이커’로 기대를 모았지만 제 기량을 선보이지 못하고 방황했던 시간도 길었다. 2015년 이후 대표팀과 인연이 없었다.

하지만 지난 4월, 잠비아와 두 차례 치른 평가전에서 182㎝의 큰 키와 스피드로 상대 감독도 감탄한 포스트 플레이를 선보였다. 뛰어난 볼 경합력과 파워로 경기 흐름을 바꾸며 공을 몰아갔다. 김혜리(현대제철), 이금민(브라이턴)과의 안정적인 호흡은 득점으로 이어졌다. 축구장 위의 거포, 박은선이 날아다녔다. 그동안의 대표팀 공백이 무색해지는 현재진행형 스트라이커의 활약에 축구팬들이 환호했다. 그는 두 경기에 걸쳐 130분 넘게 뛰며 3골 2도움을 기록했다. 두 번의 평가전 성적은 5-2, 5-0. 대승이었다. 콜린 벨 감독은 “온실 속 화초처럼 아끼다가 월드컵에 데려가고 싶다”라며 ‘비장의 카드’ 박은선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여자축구 WK리그가 한창 진행 중이던 5월13일, 박은선 선수를 서울 은평구 서울시청팀 숙소 근처 공원에서 만났다. 평가전 이후 언론 인터뷰가 늘었지만 그의 답은 느리고 신중했다. 오래 곱씹고 말하는 것은 습관이었다. “조심스럽다. 늘 그런 것 같다. 이왕이면 좋은 답을 하고 싶기 때문이도 하다.” 박은선의 뛰어난 기량에 견제가 많았다. 몸에 밴 조심스러움이었다. 최근엔 주변인들을 통해 말 한마디의 고마움을 부쩍 느끼고 있다며 ‘더 잘 대답하고 싶다’는 말의 의미를 설명했다.

올해 37세, ‘대표팀 노장’이라 불리는 게 어색하지 않으냐는 질문에 나온 말이다. “우리 팀(서울시청) 유영실 감독님과 코치님들은 노장이란 말을 안 좋아한다. 대신 나를 두고 ‘베테랑’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는 나도, 옆에서 함께 듣는 동료들도 단어의 차이와 의미를 느끼게 되더라. 감독님이 세심한 것들을 늘 신경 써주신다.”

서울시청 유영실 감독과는 2003년 미국 여자월드컵 대회 때 주장과 막내로 처음 인연을 맺었다. 그때부터 ‘힘들 때 말 한마디 건네주는’ 기댈 수 있는 언니였다. 서울시청 코치였던 안태화 현 창녕 WFC 감독도 그의 든든한 조력자다. “대표팀에 선발됐을 때도, 골을 넣었을 때도 나보다 더 좋아하고 칭찬해주신 분들이다. 2020년 서울시청에 오기 전에 은퇴를 하려 했다. 주변에서 말들도 많았고 지쳐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이 ‘좋아질 거다’ ‘할 수 있다’고 하면서 나를 지켜봐줬다. 그 덕분에 대표팀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거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

서울시청 '베테랑' 박은선 선수.ⓒ시사IN 조남진

그의 과거에는 영광과 환희가 있다. 동시에 방황과 불안도 있다. 모두 지금의 박은선을 만든 ‘자기 몫의’ 시간들이다. 2003년 6월, 박은선은 17세에 남녀 축구 통틀어 역대 최연소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미국 월드컵 출전권을 건 AFC(아시아축구연맹) 여자 아시안컵 홍콩전이었다. 그 경기에서 박은선 선수는 4골을 터트리며 8-0 승리를 이끌었다. 같은 해에 미국 여자월드컵 대회를 치르고, 이듬해 2004년엔 그리스 아테네올림픽에 출전했다. 특히 아시아 여자청소년 선수권대회에서 중국을 헤트트릭으로 격파하며 우승을 견인했는데, 이 대회에서 최우수 선수와 득점왕(8골)에 선정됐다. 2005년에는 동아시안컵에 출전해 한국에 초대 우승 트로피를 안겼다.

하지만 국제 무대에서 한국 여자축구의 위상을 높여나가던 2005년은 그에게 시련을 남긴 해이기도 하다.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실업팀과 대학에서 입단 제의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박은선은 고등학교 은사가 있는 신생 구단 서울시청을 선택했다. 그런데 누군가 ‘고교 졸업 후 대학 2년을 거쳐야 실업팀에 갈 수 있다’는 여자축구연맹 세칙을 어겼다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에게 입단 제의를 했던 지도자들도 기억하지 못할 만큼 먼지 덮인 세칙이었다. 결국 박은선은 2년간 연맹 주최의 대회에 출전하지 못하는 중징계를 받았다. 잘 뛸 수 있다는 확신이 있을 때 경기장을 뺏겼다. 억울한 마음에 팀을 이탈했다가 징계도 받았다. 아무 팀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경기장을 떠난 시간도 있었다. 그러다 2013년, ‘풍운아 골잡이’로 서울시청에 돌아온 그는 WK리그 22경기 출전에 19골을 터트리며 득점왕에 올랐다. 챔피언 결정전에서 팀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역시 박은선’임을 증명했다.

돋보이자 다시 공격을 받았다. 그해 11월, 서울시청을 제외한 WK리그 감독들이 한국여자축구연맹에 박은선의 성별 진단을 요구하며 “성별 판정을 받지 않으면 내년 시즌을 보이콧하겠다”라고 나섰다. 국가대표팀으로 국제 대회까지 출전한 선수를 향한 이들의 ‘집단 결의’는 축구팬들과 여론의 거센 비난을 받았다. 이들은 “사적인 자리에서 한 말”이라는 변명으로 사안을 면피하려 했지만 박은선을 향한 인권침해를 덮을 순 없었다. 무엇보다 ‘웃으며 잘해주던 지도자분들이 죽이려고 드는 게’ 힘들었다(당시 SNS에 박은선 선수가 쓴 글). 국가인권위원회는 감독들의 행동을 성희롱으로 판단하고, 여자축구연맹과 축구협회에 징계하도록 권고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후 박은선은 시즌 도중 러시아 로시얀카 WFC로 이적하는 드문 행보를 보였다. 더 큰 무대에 도전하고자 내린 결정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겐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을 남긴 이적이기도 했다.

베테랑의 축구 잘하는 법

그런 시절을 지나면서도 박은선은 축구를 놓지 않았다. 중2 때 축구를 시작한 이후 그때도, 지금도 축구를 하는 이유는 같다. 재미있기 때문이다. “20년 넘게 축구를 했지만 여전히 나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낄 만큼 해도 해도 어렵다. 그런데 그게 재미다. 아직도 해볼 수 있는 게 있다는 것, 아직도 배울 게 있다는 것이 여전히 축구를 하는 이유다.”

4월11일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과 잠비아의 평가전에서 박은선 선수와 김혜리 선수가 포옹하고 있다.ⓒ연합뉴스
4월11일 한국 여자축구 대표팀과 잠비아의 평가전에서 박은선 선수와 김혜리 선수가 포옹하고 있다.ⓒ연합뉴스

운동선수로서 몸으로 배워온 것들은 박은선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되어 있었다. “노력한 만큼 안 된다고 좌절감을 느낄 것도 없다. 안 되면 계속 하면 된다. 어릴 때는 기본기 훈련으로 같은 운동을 1000개씩 반복하는 걸 많이 한다. 처음엔 너무 하기 힘들다. 그런데 1000개를 할 수 있게 되면 어느새 1만 개도 할 수 있게 된다. 어릴 때 그런 걸 배워서 그런지 나이가 들어서도, ‘하면 된다’ 하는 게 있다. 그래서 무언가를 오래 고민하거나 지난 일에 매이지 않는다. 현재, 그리고 내일의 목표가 중요하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도, 그 한 고비를 넘기면 숨통이 트이는 때가 온다는 것을 그는 의심 없이 믿었다.

소속 팀 경기를 뛰면서도 7월20일에 열릴 호주·뉴질랜드 여자월드컵 대회 준비에 한창인 박은선 선수는 최근 WK리그를 찾는 여성 관객들이 늘어나는 걸 느낀다며 관심이 느는 만큼 더 책임감을 가지게 된다고 말했다. 운동장을 자신의 공간으로 만들고 몸의 기동력을 높이며 ‘골맛’을 알아가는 여성 풋살(간이 축구)인들이 늘고 있다. 오래전부터 차고, 달리며 몸을 숙련해온 ‘여성’ ‘운동선수’ 박은선은 그 변화가 반갑다고 말했다. 응원의 말은 담백했다. “처음부터 잘하지 못한다고 주눅 들 것 없다. 한 번에 잘하는 거면 우리 같은 사람이 왜 있겠나(웃음). 발에 공이 붙기 시작하면 점점 재미있어진다. 여전히 나에게도 축구는 어렵지만, 힘든 것보다 재미가 더 크다. 도전하시라. 그리고 계속하시길 바란다.”

올여름, 박은선은 생애 처음으로 월드컵 골을 넣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할 것이다. “계속 하면 결국 된다.” 베테랑의 정답이다.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