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몇 걸음 떼기도 전에 아이들이 또다시 인사를 했다. 제주 신성여자중학교 학생들이었다. 교문에서 정문까지 수차례 인사를 받는 ‘외부인’ 중에 머리가 희끗한 70대 어르신도 있었다. 3월24일,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로 학교를 찾은 참이었다. 제주도는 4·3의 진실을 알리고 사건을 잊지 않기 위해 ‘4·3평화·인권교육주간’을 운영하고 있다. 이번 수업은 그 일환이다. 4·3을 겪은 이들이 학생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었다.

명예교사 7명이 수업을 앞두고 긴장했다. 경험 있는 이들이 수업 노하우를 나눴다. 관건은 ‘시간 엄수’다. 일찍 시작해서도, 무엇보다 늦게 끝나서도 안 된다. 그래야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한다. 양성홍씨는 다른 학교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가족 이야기를 한참 들려줬더니 한 학생이 물었다. 4·3이 왜 일어났습니까? 그것부터 이야기를 해줘야 하겠더라고.” 연좌제로 마음고생을 한 그는 재심을 통해 아버지의 명예회복을 이룬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3월24일,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로 제주 신성여자중학교를 찾은 강상옥씨. ⓒ시사IN 이명익
3월24일, 4·3평화인권교육 명예교사로 제주 신성여자중학교를 찾은 강상옥씨. ⓒ시사IN 이명익

1949년생 강상옥씨는 이번이 첫 수업이다. 그의 아버지도 지난해 재심에서 무죄를 받았다. 강씨가 1학년 4반 강단에 섰다. 가족사를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건 처음이다. 무죄를 받고 난 다음에야 결심이 섰다. 길고 긴 이야기를 40여 분 안에 하느라 마음이 급했다. 4·3 당시 제주시 월평동에서 살던 그의 부모는 집이 불타자 산으로 올라갔다. 귀순을 권유받고 내려온 뒤 군사재판에 회부되었다.

그의 부모처럼 4·3 당시 한라산 기슭에 피신했다가 1949년 봄, 소위 귀순공작 때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주정공장 창고에 수용되었다. 노인, 어린이, 여성도 있었다. 그중에는 그의 어머니처럼 임신부도 있었다. 이들은 군법회의에 회부되었지만 법이 정한 절차나 판결문이 없었다. 내란죄, 국방경비법 위반죄 등 혐의 대부분은 증거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주정공장이나 부두에 선 채로 경찰이나 군인으로부터 형기를 통보받았다. 1~2차 군법회의로 다른 지역 형무소에서 수감 생활을 한 제주도민이 알려진 것만 2500여 명이다. 4·3 수형인이라 부른다. 이들 대부분은 고향에 돌아오지 못했다.

강씨는 75년 전 주정공장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그 아기가 접니다”라고 말하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26세인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무기형을 받았다. 그는 어머니, 누나와 함께 석방되었다. 아버지는 배를 타고 목포로 가 열차를 갈아탄 뒤 마포형무소에 수감된 뒤 무기수 생할을 했다. 끝이 아니었다. 수감 생활 중 인민군이 들이닥쳤다. 한국전쟁이었다. 이들은 조국 통일을 위해 싸워야 한다면서 군복을 입혔다. 북한군이 된 것이다. 전선에서 싸우며 낙동강까지 내려왔는데 보급이 끊겼다. 지리산으로 도망쳐 땅굴 생활을 하다가 귀순하라는 삐라를 보고 자수하기로 결심한다. 두 번째 귀순이었다. 머슴살이를 하다 훗날 국군을 모집한다는 말에 육군에 입대해 3년 만에 제대했다. 제주도 출신 청년이 무기수가 되어 서울에 갔다가 하루아침에 인민군이, 그다음엔 국군이 된 사연이다.

“이런 얘기를 처음 여러분 앞에서 했다”

아버지는 제대한 뒤에도 한참 동안 제주에 오지 못했다. 강상옥씨는 7세 즈음 아버지와 만났다. 단칸방에 사는데 어떤 군인 아저씨가 20여 일 동안 창문을 닫은 채 집에만 있다 떠났다. 아버지는 다시 돌아왔지만 2년 만에 세상을 떠났다. 41세의 나이였다. 생전 아버지는 관공서를 피해 다니고 경찰만 보이면 돌아서 갔다. 4·3에서 시작된 기구한 운명이 짧은 생애, 아버지를 떠돌이로 만들었다.

아버지의 삶을 간략하게 요약한 그가 학생들을 보며 말했다. “이런 얘기를 처음 여러분 앞에서 했다. 평생 오늘을 잊지 못할 것이다.” 이날 명예교사의 수업을 들은 1학년 이지유양은 “외할아버지가 4·3을 겪었다고 들었는데 평소 관련된 이야기를 하지 않아서 잘 몰랐다. 고생한 이야기를 들으니 안타깝고 미안하다”라고 말했다.

강상옥씨가 태어났던 주정공장 수용소 옛터가 지난 3월13일 4·3역사관으로 바뀌어 문을 열었다. ⓒ시사IN 이명익
강상옥씨가 태어났던 주정공장 수용소 옛터가 지난 3월13일 4·3역사관으로 바뀌어 문을 열었다. ⓒ시사IN 이명익

강상옥씨가 태어난 주정공장 수용소 옛터가 지난 3월13일 4·3역사관으로 바뀌어 문을 열었다. 일제 말기 산업시설로 만들어졌다가 4·3 때 민간인을 가두는 최대 수용소로 이용되었다. 수용소 바깥 조형물은 어디론가 끌려가는 사람들의 형상이다. 건물 안에는 수형인 명부가 보관되어 있다. 강씨 아버지의 이름이 있을지도 모른다. 수형인들의 편지도 보관되어 있다. 그중 한 대목이다. ‘당신에게 가족을 맡기게 되어 미안하오.’

기자명 제주 / 글 임지영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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