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언제 갑자기 추워질지 몰라서 바질을 밖에 내놓질 못해. 잠깐 방심하면 애들이 훅 가버리잖아. 저번에 몬스테라 때 진짜 놀랐다고.”
며칠 전, 식물들이 있는 곳에 햇빛이 가득 들어오던 짧은 아침에 아버지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다행히 몬스테라는 지금까지 살아서 새 이파리를 틔웠다. 하지만 그때는 물을 특별히 많이 준 것도 아닌데 갑자기 잎과 가지 대부분이 급격하게 물렁물렁해지면서 죽기 직전까지 갔다.
아버지는 그때를 떠올리며 바질을 돌보고 있다. 이번 바질은 유독 각별한데, 우리 집에서 처음으로 겨울을 넘긴 녀석이기 때문이다. 꾸준하게 자리를 옮겨주고 자주 식물등을 켜준 것이 효과가 있었다고 추측한다. 한 번씩 잎을 뜯어 토마토와 함께 먹고 있는데도 잎이 무성해서 근처에만 가도 바질 향이 콧속을 가득 채운다.
날씨가 많이 따뜻해졌지만, 갑자기 0℃ 근처로 내려가는 날도 있다. 단 하룻밤 방심했다가 베란다 밖에 걸린 화분걸이에서 죽어버린 식물들을 떠올리며, 우리는 바질을 창문 안쪽에 두고 열심히 보호하고 있다. 자연광과 바람을 더 많이 쐬게 해주고 싶지만 일단은 방법이 없다. 한 번 겨울을 넘긴 바질인데, 두 번째 겨울을 못 넘기면 너무 아쉬울 것 같다. 우린 내년 봄에도 이 바질과 함께할 계획이다.
“엄마가 잠깐만 마음을 놓으면 희제가 아팠어. 그래서 방심을 못했지. 희제가 아프면 방심한 엄마 탓인가 싶어서 죄책감도 들고.”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듣다 보면 꼭 나오는 이야기다. 분명 평소에는 건강한데 한 번씩 크게 아프곤 하던 나를 키울 때 어머니는 방심하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한다. 물론 사람은 특별한 이유 없이도 아플 수 있다는 것을 만성질환자가 된 지금은 잘 알지만, 아픈 사람 곁에 있는 이는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다. 내가 좀 더 잘했으면 안 아프지 않았을까? 내가 좀 더 잘하면 빨리 낫지 않을까? 특히 아픈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든 의존적인 경우라면 더욱 그런 책임감이 들 것이다. 그렇게 누구의 잘못이 아닐 수 있는데도 누군가의 책임이 되어버리는 것이 돌봄인가 싶다.
이 이야기는 어느 날 갑자기 이파리를 우수수 떨어뜨리거나 죽어버린 식물을 볼 때마다 떠오르곤 한다. 물론 식물도 사람처럼 특별한 이유 없이 아프고 죽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식물과 함께 사는 사람은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사람이 살기 편하게 맞춰놓은 환경에다 식물을 데려다놓은 것이고, 구름 대신 내가 물을 줘야 하며, 깊은 토양 대신 작은 화분에 담긴 한 줌의 흙이 물을 간신히 저장하고 있으니까.
원래 나에게 의존적이지 않을 수 있는 존재를 내게 의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든 환경에서 나에게는 그를 잘 돌봐야 할 책임이 생긴다. 페미니스트 철학자 도나 해러웨이는 ‘책임(responsibility)’을 ‘응답 능력(response-ability)’으로 이야기한다. 서로 다른 종들 사이의 공존에는 서로의 신호에 예민하게 반응하고 응답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식물들을 집에 들이고 산 지 만 3년이 넘었는데도 나는 여전히 식물들이 보내는 신호에 잘 응답하지 못하는 것 같다. 참, 쉽게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어쩌면 돌봄이란 방심하지 않고 응답하는 법을 매일 새롭게 익혀나가는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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