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민회씨가 입었던 군복과 목포해양대 제복.ⓒ시사IN 이명익

살아 있었다면 올해로 서른 살이었을 것이다. 2018년 3월16일, 페르시아만을 항해 중이던 화학물질 운반선(케미컬 선) ‘캠로드저니호’ 한편에서 스물다섯 살 구민회씨가 사망한 채 발견됐다.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병역을 치르던 구씨는 이 배에서 3등 기관사로 일하고 있었다.

구씨가 남긴 유서에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과 함께 자신을 괴롭혀오던 상관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폐쇄적인 배 안에서, 구씨는 수차례 가족과 지인들에게 괴롭힘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다. 사망 전 구씨가 친구들과 나눈 카카오톡 메신저 기록에는 당시 구씨의 막막한 심경이 담겨 있다. “부당한 걸 말해봤자… 이미 기관장이나 윗사람들한테 말해봤는데, 씨알도 안 먹힌다.” 경남 창원시에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도 구씨는 선내 괴롭힘을 호소했다. “인권위나, 그런 곳에 신고할까 봐.” 어머니는 그런 구씨에게 “민회야 좀만 참아보자. 잘 챙겨 먹고 힘들어하지 마. 다 지나갈 거야”라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배에 오를 때만 해도 홀로 두 자녀를 키워온 어머니에게 언젠가 새 아파트를 마련해주겠다고 약속하던 구씨였다. 그러나 고립된 환경에서 지속된 괴롭힘은 그 약속을 영영 지킬 수 없게 했다. “쉬고 있어? 많이 아프지?”라고 보낸 어머니의 마지막 메시지는 숫자 1이 사라지지 않았다(〈시사IN〉 제560호 ‘군대 대신 탄 배에서 스스로 목 맨 까닭’ https://www.sisain.co.kr/32023 기사 참조).

구민회씨 가족들은 구씨의 죽음을 쉬이 납득할 수 없었다. 누구보다 생활력이 강한 아들이자 동생이었다. 구씨를 직접적으로 괴롭힌 2등 기관사 최 아무개씨를 비롯해 배를 책임지는 송 아무개 선장, 구씨를 고용한 회사(아이엠에스 코리아, 이이노마린서비스)까지 책임을 회피했다.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 행동에 나서야 했다. 2019년 3월 구씨의 가족들은 가해자 최씨, 선장 송씨 그리고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처음에는 이렇게 긴 싸움이 될 줄 몰랐다. 2년 만에 받아든 1심 판결은 최씨의 괴롭힘 행위와 구씨의 죽음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2021년 5월28일 서울중앙지법 제20민사부는 1심 판결문에서 이렇게 적시한다.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들만으로 피고 최○○의 욕설 등 불법행위와 망인의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음을 인정하기에 부족하다.” 매뉴얼을 수기로 7~8차례 반복해서 쓰게 한 점, 최씨가 구씨에게 수차례 욕설을 하며 모욕을 주었다는 점은 불법행위로 인정됐지만 이 때문에 구씨가 사망에 이르렀다고 보긴 어렵다는 판단이다. 1심 법원은 선장 송씨에 대해서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법원의 이러한 판단을 가족들은 납득할 수 없었고, 곧바로 항소했다.

항소심 결론이 나기까지 다시 2년이 걸렸다. 2월8일, 서울고등법원 제1민사부는 1심 판결을 뒤집고 구씨 가족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구씨가 사망한 지 약 5년 만이었다. 2심 재판부는 구씨의 사망에 2등 기관사 최씨와 선장 송씨 그리고 배를 운영하는 회사 측 모두에게 책임이 있다고 판결했다.

2심 판결, ‘취약한 지위’에 주목

‘인과관계’에 대한 판단이 1심과 달랐다. 1심 재판부는 최씨의 불법행위 일부를 인정하면서도 구씨의 죽음과는 인과관계가 없다고 단정한 반면, 2심 재판부는 구씨가 처한 상황과 유서 내용, 죽기 직전 겪은 괴롭힘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이러한 괴롭힘(불법행위)과 구씨의 사망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있음을 인정할 수 있다”라고 판결했다.

2심 재판부는 대체복무를 수행하기 위해 승선근무예비역 신분으로 배를 탄 구씨의 특수한 상황도 고려했다. 강압적 환경을 억지로 수용해야 했다는 것이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망인은 승선근무예비역 신분으로 군복무를 대체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선하여 근무기간이 부족하게 되면 군복무를 해야 할 지위에 있어서 부당한 일을 당하더라도 쉽사리 이를 문제 삼거나 하선을 결심하기 어려웠다”라고 적시했다.

법원의 이 같은 지적은 승선근무예비역의 특수성이 반영된 것이다. 승선근무예비역은 항해사·기관사 신분으로 배에서 일하며 병역을 대신하는 제도다. 해사고등학교나 해양대학교 출신 20대 남성이 휴가 포함 총 36개월 동안 승선해야 병역을 모두 이행한 것으로 인정된다. 군대 대신 배를 타며 돈을 벌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제도상 허점도 많다. 무엇보다 ‘승선 기간’만 병역 이행 기간으로 인정되기 때문에 회사 측 조치에 따라 병역 기간이 길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사망한 구씨처럼 한 해 1000여 명이 해사고와 해양대를 졸업한 후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병역을 이행한다.ⓒ시사IN 이명익

예를 들어 6개월 승선한 뒤 육지에 돌아온다고 해서 곧바로 다시 배를 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지에서 다음 배에 오르기까지 대기하는 기간이 1년 넘게 이어지더라도 병역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선사 측의 일정에 맞추어 막연하게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선사 측과 갈등을 겪을 경우 육상 대기 기간이 무한정 길어지기도 한다. 육상 대기 기간이 총 24개월을 넘을 경우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복무 중이던 이들은 도로 군대에 가야 한다. 선사 측의 부당한 지시에 항의하기가 어려운 구조다. 2심 재판부는 이 같은 승선근무예비역의 ‘병역 이행 조건’에 주목했다. 근무 기간이 부족하게 되면 군복무를 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며 구씨가 ‘취약한 사정’에 있었다는 점을 사망과 괴롭힘 사이의 ‘인과관계 근거’로 보았다.

2심 재판부는 가해자 최씨뿐만 아니라, 선내 지휘명령권·질서유지권을 갖고 있는 선장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고 했다. 지난 5년간 구씨 가족의 법률 대리를 맡아온 정소연 변호사(법률사무소 보다)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가해자의 책임만큼이나 선장의 책임을 명확히 했다는 점에서 이번 판결의 의미가 크다”라고 설명한다. 판결문에서 재판부는 “망인은 승선근무예비역으로 처음 정식 선원이 된 취약한 지위에 있었으므로 선상 생활 적응 여부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이 필요하다”라고 지적했다. 선내 고충처리 체계가 제대로 작동하지 못했기 때문에 구씨가 죽음에 이르렀고, 그 책임은 선장이 져야 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2심 판결이 이처럼 뒤집힌 것은 재판부가 이번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에 해당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최씨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대해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망인에게 정신적 고통을 주는 이른바 ‘직장 내 괴롭힘’의 불법행위를 하였다고 인정된다”라고 적시했다. 이는 구씨 가족 변호인단이 항소 과정에서 특히 강조한 부분이다. 원고 측 소송대리인(구씨 가족 법률대리인)은 올해 1월 제출한 참고서면에서 직장 내 괴롭힘의 특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원심은 최○○의 각 행위가 행위별로 불법행위를 구성하는지 별도로 판단하였는데, 이는 직장 내 괴롭힘의 특수성을 간과한 판단입니다. (…) 직장 내 괴롭힘은 지위의 우위가 있는 사람에 의해 일방적으로 이루어지며, 근로를 계속하는 한 거부할 수 없고, 일상적으로 계속 이뤄지는 것입니다.” 개별 사건으로 쪼개서 볼 경우 별 문제가 없어 보이는 행위라 하더라도 “지속적이고 반복적인 괴롭힘의 맥락에서 보았을 때 업무상 적정 범위를 넘어 피해자에게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준다면 직장 내 괴롭힘 행위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구씨 사건은 근로기준법이 개정되기 이전에 발생한 ‘직장 내 괴롭힘’도 법원이 인정했다는 의미가 있다. 구씨의 사망 시점(2018년 3월16일)은 직장 내 괴롭힘을 금지하는 근로기준법이 시행된 2019년 7월16일 이전에 발생했다. 1심에서는 최씨의 일부 불법행위에 대해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지칭하지 않았다. 하지만 1심 판결 이후인 2021년 11월25일, 2015년에 발생한 한 사건을 ‘직장 내 괴롭힘’ 행위로 인정해야 한다는 대법원 판례가 등장했다. 이후 2심에서 구체적으로 구씨가 겪은 각종 모욕이 ‘직장 내 괴롭힘’으로 인정받았다.

‘사용자’ 회사의 책임, 폭넓게 인정

사용자로서 회사 측의 책임 역시 2심에서 보다 넓게 인정됐다. 구씨 가족이 손해배상을 청구한 회사는 모두 두 곳이다. 사망 전 구씨를 관리하고 직접 근로계약을 맺은 선박관리 회사 아이엠에스 코리아, 그리고 선주인 일본 회사 이이노마린서비스이다. 아이엠에스 코리아 측은 재판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피하려 했다. 자신들은 이이노마린서비스의 선박을 관리하고 선주와 선원들 사이에 가교 역할만 하기 때문에 ‘사용자 책임’을 부담하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승선근무예비역은 승선 기간만 병역 이행 기간으로 인정돼 부당노동 지시에 항의하기 어려운 구조다. 위는 부산 강서구 신항만 전경.ⓒ시사IN 이명익

그러나 재판부는 아이엠에스 코리아 측의 사용자성을 인정하면서 “선내 고충처리에 관한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피고 회사들의 잘못”이라고 지적했다. 선내에서 발생하는 괴롭힘과 고립에 대해 회사 측에서 적극적으로 조치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직장갑질119’ 박점규 운영위원은 이번 판결에 대해 “1심에서도 회사 측의 책임이 (일부) 인정되긴 했지만, 2심 판결에서는 회사의 책임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직무상 괴롭힘을 인정한 것이기 때문에 산업재해를 인정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라고 평가했다.

이번 판결은 승선근무예비역을 고용한 다른 회사에도 경각심을 갖게 할 것으로 보인다. 2심 재판부는 승선근무예비역이라는 신분상 불리함과 선박이라는 고립된 환경이 구씨의 죽음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했다. 가해자뿐 아니라 선박 책임자와 선박 소유주, 선원 관리를 맡은 회사 모두에게 ‘직장 내 괴롭힘’의 책임이 있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구씨의 죽음 이후 승선근무예비역 제도의 보완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일면서 권익교육 의무화, 승선근무예비역 인권침해 실태조사 등이 실시됐다. 그러나 이 같은 예방조치가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위법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묻는 실제 판결이 절실했다. 2심 재판부의 이번 판결은 승선근무예비역뿐 아니라 고립된 환경에서 ‘직장 내 괴롭힘’을 겪는 많은 노동자들에게 의미가 크리라 보인다.

기자명 글 김동인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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