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생활력이 강했다. 홀몸으로 자식 둘을 키운 엄마에게 도움이 되겠다며 학비가 무료인 부산해사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열여덟 살 이후로는 방학이나 돼야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고향인 경남 창원 집에 오더라도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밖으로 쏘다니기 일쑤였다. 목포해양대에 진학한 후에도 동생은 엄마에게 손 한번 내밀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로 조선소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쳤을 때에도,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학교를 1년 유급해야 했을 때에도 엄마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사이 누나 구설희씨(27)는 부산에서 대학을 마치고 서울에서 직장을 구했다.

“이 일 하면 군대 안 가도 돼. 군대 대신 배 타면서 돈도 모을 수 있어.” 동생 구민회씨(25)는 대학을 졸업하고 승선근무예비역으로 대체 복무를 시작했다. 어디서 났는지 알 수 없는 보라색 구권 1000원짜리를 책상 유리에 끼워두더니, 틈만 나면 돈 벌어 창원에서 가장 좋은 아파트를 사겠다고 했다. “돈 벌면 새 아파트 사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기가 없으면 집에 물 사올 사람도 없을 거라며, 홀로 남은 엄마를 위해 엘리베이터 없는 5층 아파트에 생수 정기 배달을 미리 주문해놓았다. 지난해 11월, 동생은 울산항에서 첫 배에 올랐다. 8개월 뒤에 첫 휴가 나오면 가족여행을 가자고 약속했다.

ⓒ시사IN 이명익구민회씨가 입었던 군복과 목포해양대 제복.
약속은 영영 지킬 수 없게 됐다. 3월16일, 구민회씨는 승선하고 있던 배에서 목을 맨 채 발견됐다. 구씨가 남긴 A4 한 장짜리 유서에는 “버티고, 버티고, 버티자. 이 생각으로 하루하루 지냈는데 2기사랑은 도저히 이제 더 이상은 안 될 것 같아. 어제도 오늘도 엄마 생각하면서 버티려 했지만, 더 이상 이 이상의 괴롭힘은 참지 못하겠다”라고 적혀 있었다.

누나 구설희씨는 동생의 사망 소식을 이틀 뒤에야 알게 됐다. 시신이 가족에게 인도되기까지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구씨가 사망할 당시 타고 있던 배는 페르시아만을 항해하고 있었다. 사망한 지 37일 만인 4월22일, 구씨의 시신이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운구 차량에 탄 어머니는 끝내 무너졌다. “그날 본 민회의 모습이 지금도 종일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아요.”

구민회씨는 선원 관리 회사 IMS코리아 소속 승선근무예비역이었다. 구씨는 IMS코리아의 본사인 일본 이노해운 소속 화학물질 운반선(케미컬 선) ‘캠로드저니호’에서 3등 기관사(3기사)로 일했다. 구씨는 평소 주변 지인들에게 카카오톡(카톡)으로 자신의 상관이자 대학 선배인 2등 기관사(2기사) 최 아무개씨로부터 지속적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고 토로하곤 했다. 구씨가 남긴 유서 뒷면에는 “최○○(2기사 이름) 개××야. 잘 먹고 잘 살아라”라고 적혀 있다. 〈시사IN〉은 구씨가 친구들과 나눈 카톡 메시지를 유가족한테 받았다. 카톡 내용을 날것 그대로 공개한다(파란색 글씨). 생활력이 강한 구씨가 승선근무예비역이 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유가족, 회사, 친구들에 대한 취재를 통해 재구성했다.



ⓒ시사IN 이명익승선근무예비역은 항해사·기관사 면허 소지자가 해운·수산업체에서 36개월간 승선·근무로 군 복무를 대신하는 제도다. 아래는 부산 강서구 신항만 전경.
“부당한 거 말해봤자… 이미 기관장이나 윗사람들한테 말해봤는데, 씨알도 안 먹힘. 오히려 역정 냄.”

“직접 말해봤고 윗사람들한테도 해봤지만 답이 없다. 갈 때까지 버티는 수밖에.”


그는 죽기 전 주변에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다. 선내 상관과 회사(IMS코리아) 측은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유가족의 법률 대리를 맡은 ‘직장갑질 119’ 소속 정소연 변호사(법률사무소 보다)는 “구민회씨가 올해 2월, 같은 배에서 일한 실습기관사 박○○씨에게 2기사가 괴롭힌다고 전했고, 박씨가 귀국 후 회사 측에 이를 알렸지만, 사측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김태성 IMS코리아 인사부장은 “박○○ 실습기관사와 귀국 후 디브리핑(하선한 선원에게 배 상황을 묻는 공식적인 면담)을 했지만, 2기사 최씨가 구민회씨를 괴롭혔다는 설명은 듣지 못했다. 사내 공식 고충처리 시스템에도 구씨가 최씨의 괴롭힘을 전한 기록이 없다. 기관장도 구씨로부터 괴롭힘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다고 하더라”고 주장했다.

“이런 얘기 들어줄 사람이 이제 너밖에 없다. 해양대 아는 사람들한테 얘기하다가 돌고 돌아서 2기사한테 들어가고. 담배도 다시 피우고 있다.”

“인권위나 그런 곳에 신고할까 봐.”

ⓒ시사IN 이명익구민회씨는 첫 휴가에 가족여행을 가자고 약속했지만 지킬 수 없게 됐다. 위는 구씨의 어머니.
구씨의 지인과 업계 상황을 잘 아는 사람들은 구씨가 승선근무예비역이라 부당한 처사에 적극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거나, 공식적인 요청도 접수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한다. 승선근무예비역이 회사에서 해고되면 다시 현역으로 입대해야 하기 때문이다.

승선근무예비역의 복무 기간은 총 36개월이다. 산업기능요원(최대 34개월)보다 길다. 문제는 이 36개월이 ‘순수하게 회사에 소속돼 배를 탄 기간 및 유급휴가일’이라는 점이다. 배를 타기 위해 육지에서 기다리는 기간은 복무 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마냥 기다리는 것도 불가능하다. 각 승선근무예비역은 5년 이내에 승선 기간 36개월을 채워야 한다. 만약 중간 대기 기간이 총 24개월을 넘을 경우, 군대에 가야 한다. 승선 여부는 회사 인사 부서의 결정에 달려 있다. 회사 결정에 따라, 병역을 정상적으로 이행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부당노동 지시가 가능한 구조다(배 떠나는 해기사, 씨 마르는 해운 인력 기사 참조).

그래서 승선근무예비역을 위해 회사나 선내에 마련된 고충처리 시스템은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나도 매일 유서를 썼다”라는 또 다른 승선근무예비역 출신 기관사는 “1기사가 매일 개인 선실을 찾아와 기합을 주고, 뺨을 때렸다. 옆차기를 하고, 얼굴에 침을 뱉었다. 술에 만취해 내 방에 소변을 누었다. 성매매하기 싫다는 내게 억지로 술을 먹이며 여성과 키스를 하게 하고, 그 영상을 SNS에 올리며 비웃었다. 고발하고 싶었지만, 선내 고충처리 담당인 2등 항해사(2항사)도 1기사와 함께 나를 구타했기 때문에 어디에도 도움을 청할 수 없었다”라고 토로했다.

“카톡 검열도 했다.”

“사소한 거 하나 가지고 월급 다른 사람 주라고, 서류에서 숫자 하나 잘못 타이핑한 거 가지고 지랄한다. 그냥 숫자 하나 다시 치라 하면 될걸. ‘죄송합니다, 다시 하겠습니다. 몇 번을 주의하겠습니다’ 해도 ‘넌 개선될 가망이 없어, 월급 실기사 줘라’ 등등 인격모독 당한다.”

구민회씨의 해사고 선배이자, 같은 회사에서 항해사로 근무한 조원철씨(26·가명)는 ‘복무 기간’ 조건 때문에 고통받은 대표적인 케이스다. 해사고를 졸업한 후 2011년 8월 승선근무예비역에 편입된 조씨는 첫 배를 타기까지 9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그사이 ‘5년 이내’라는 조건은 이미 시작됐지만, 회사는 “자리가 없다. 기다려라”는 말을 반복했다.

첫 배에서 8개월 동안 3등 항해사(3항사)로 일한 조원철씨는 같은 배에 탄 1등 항해사(1항사)로부터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했다. 조씨가 개인 침실의 방문을 잠그면 욕을 했고, 술에 만취한 채 조씨의 방에 침입하기도 했다. 1항사의 횡포에 함께 괴로워하던 2항사와 조씨는 당시 선장에게 1항사의 실태를 보고했다. 상황이 심각하다고 느낀 선장은 조씨와 2항사에게 본사인 일본 이노해운에 보고서를 작성해 보내라고 지시했다. 본사 감독관이 파견됐고, 얼마 뒤 문제를 일으킨 1항사는 하선했다. 조씨는 선내 문제가 선장의 지시로 잘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육지에 하선한 뒤, IMS코리아 사무실에 들른 조씨는 회사로부터 “왜 그런 보고서를 만들었냐” “왜 문제를 일으켰냐”는 추궁을 당했다. IMS코리아 측은 조씨의 보고서 작성 경위와 의도를 물었다. 선장 지시를 받아 보고서를 썼다고 항변했지만, 회사 측에서는 조씨의 잘못을 따졌다.

‘이러다 회사에서 잘리겠다’고 생각한 조씨는 그 자리에서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 측은 “6개월간 쉬고 있어라”며 조씨를 돌려보냈지만, 정작 조씨가 다음 배에 오른 건 13개월 후였다. 휴가 기간인 2개월을 제외하면, 나머지 11개월은 승선근무예비역으로 인정되지 않는 ‘막연한 대기 기간’이었다.

가까스로 승선근무예비역을 마쳤지만, 조씨가 병역을 모두 끝내는 데에는 총 4년8개월이 걸렸다. 당시 회사 측의 조치를 보복으로 느꼈다는 조씨는 “내부고발을 하거나, 회사에 찍히면 다음 배를 타는 데 손해를 입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파일 하나하나 연 거 추적해서 나한테 지랄한다. 진정 미친 XX가 따로 없다고 느껴졌다.”

“새벽 2시에 가서 무릎 꿇고 죄송하다 했다. 진짜, 서럽더라.”

“힘들다… 차라리 때렸으면 좋겠다.”


승선 기간과 승선 간격 역시 승선근무예비역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구민회씨가 탄 화학물질 운반선은 특히 평균 승선 기간이 길다. 구씨가 사망한 배에서 승선근무예비역으로 근무한 적이 있는 한 제보자는 “평균 8개월을 기준으로 계약서를 작성한다. 계약서에는 분명 6개월 후 본인이 원하면 배에서 내릴 수 있다고 되어 있지만, 승선근무예비역일 경우 함부로 배에서 내리겠다고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승선근무예비역으로 한 배에서 11개월 이상 승선했다는 다른 해기사(항해사와 기관사 등을 통칭해 부르는 말)는 “해외 해기사에게 한국 해기사 얘기를 들려주면 깜짝 놀란다. 싱가포르나 벨기에 같은 나라는 평균 4개월 승선이 원칙이지만 한국에서는, 특히 승선근무예비역에게는 꿈같은 얘기다. 아무리 정상적인 사람이라 해도 6개월 이상 배를 타면 미치기 직전까지 간다”라고 말했다.



“2기사 3월22일에 간다니까 조금만 더 버티자.”

“이제 본격적으로 괴롭힌다. 쉬지도 못한다. 진짜 미쳐야 하나 보다. 목매달고 죽는 척이라도 하든가 뛰어내리든가.”

“맨 오버보드(바다에 뛰어든다는 뜻) 생각이 간절하다.”

구씨를 괴롭힌 최 아무개 2기사는 원래 올해 2월 복무가 끝나기로 예정된 승선근무예비역이었다. 구씨는 주변 지인에게 여러 차례 “2기사가 2월에 끝나니까 그때는 괜찮아지겠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회사 측은 최 아무개 2기사에게 승선근무예비역이 끝난 후에도 한동안 배에 탈 것을 요청했고, 3월에도 구씨는 최씨와 같은 배에서 함께 있어야 했다. 구민회씨의 선배 기관사이자, 지금은 업계를 떠나 서울에 자리 잡은 장경섭씨(26·가명)는 “회사나 선내 책임자들이 승선근무예비역 말년이었던 최씨를 적극적으로 컨트롤할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장씨는 “승선근무예비역 말년에는 갑과 을이 바뀐다. 회사 측에서는 승선근무예비역이 끝난 후에도 2기사가 계속 배에 남아 있는 게 이익이기 때문에 2기사를 건드리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방 와서 울면서 잠들었다. 엄마 보고 싶더라.”

“멘탈이 도저히 못 버틴다. 멘탈이 산산조각 나서 가루 되어 바람에 흩날린 지 오래됐다.”

“일부러 넘어져서 팔이나 다리 하나 분질러서 집에 가고 싶단 생각도 한다.”


무엇보다 승선근무예비역을 힘들게 하는 것은 국가 관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병역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배에 올랐지만, 국방부·지방병무청·해양수산부·지방해양청 모두 이들이 어떤 상황에 처했는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망망대해에서 그는 홀로 방치되었다. 구민회씨의 누나 구설희씨는 “상식적으로 나라에서 군대 대신 배를 타게 한 것인데, 아무런 관리감독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라며 전면적인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 승선근무예비역 출신 항해사도 “승선근무예비역으로 편성된 이후부터 단 한 번도 병무청에서 연락을 받아본 적이 없다. 승선근무예비역 기간이 끝났을 때에도 ‘끝난 게 맞느냐’고 내가 따로 연락해서 답변을 받을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구민회씨의 죽음을 내사 중인 부산해양경찰서는 5월23일 〈시사IN〉과의 통화에서 “(구씨와 함께 배를 탄) 전 선원을 대상으로 조사 중이며, 가해자로 지목된 2기사에 대해서는 거짓말 탐지기를 동원해 추가 조사할 예정이다”라고 설명했다. 구씨의 유가족은 해경 내사와는 별도로 가해자인 최 아무개 2기사와 선내 책임자인 선장과 기관장, 그리고 회사 인사노무책임자를 상대로 5월31일 형사 고소했다.

기자명 김동인 기자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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