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권위주의자의 실패는 힘을 잘못 사용한 것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대조되는 문장으로 이어진다. ‘민주주의자의 실패는 말을 잘못 사용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왜? ‘민주주의는 말의 힘과 설득의 방법이 우선인 체제’이고 ‘시민의 적극적 동의’를 기반으로 삼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책은 확고하게 정의 내린다. ‘정치가는 말하는 사람’이다. ‘말밖에 가진 게 없지만, 말로 변화를 일궈가는 사람’이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정치학 박사)은 부단히 시민들과의 접점을 모색해온 정치학자이다. 선거나 인물, 전망 등을 다룬 ‘정치’ 도서는 많지만 그처럼 대중을 상대로 ‘정치학’ 책을 꾸준히 쓰는 저자는 흔치 않다. 지난해 11월 출간된 〈정치적 말의 힘〉은 4년 만에 내놓은 신간이다. 2011년 대표작으로 통하는 〈정치의 발견〉 이후 〈정당의 발견〉 〈민주주의의 시간〉 〈청와대 정부〉 등에 뒤이어 출판한 책이라, 정치 분야에서 ‘정치인의 말’이 차지하는 중요도를 이 정도 순서로 판단하나 보다, 저자를 만나기 전에 막연히 짐작했다.

틀린 짐작이었다. 박상훈 박사는 ‘10년 전부터 쓰고 싶었던 책이 이제야 나왔다’고 말했다. “정치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분야가 수사학이다. 수사학은 곧 정치의 실천론이고, 정치학의 분석론이다. ‘누구를 위해, 무엇을, 왜 하지’라는 질문이 정치의 본질인데 그걸 전달하는 수단은 말이다. 정치가 기능하는지 못하는지는 말이 결정한다.” 여기서 수사학은 웅변이나 미사여구 같은 화술을 뜻하지 않는다. 정치인의 말이 갖춰야 할 품격을 넘어 태도와 가치, 그리고 지도자로서의 탁월함까지 포괄하는 개념이다.

책은 정치, 특히 민주주의에서 정치인의 말이 왜 중요한지를 살펴보는 1부와 수사학의 힘을 갖춘 정치 연설들을 뜯어보는 2·3부로 구성돼 있다. 3부 전체를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에 할애했다. 2008년 대선부터 2017년 1월 대통령 고별 연설까지 오바마의 연설에는 정당 간, 인종 간, 계급 간 이견과 차이에 눈감지 않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기반을 찾으려 노력하고 협력의 기초를 모색하는 민주주의자의 면모가 흐른다.

이 책이 2022년에 나왔다는 사실이 공교롭다. 지난해, 출근길 약식문답에서 대통령이 내뱉은 말들이 공론장을 소모적으로 채웠고, 여야 정치인들의 센 발언이 양극단의 반응을 불러왔다.

박상훈 박사는 2019년부터 국회미래연구원 초빙연구위원으로 의회 생활을 하고 있다. 1월10일 그를 만나 〈정치적 말의 힘〉을 렌즈로 오늘날 한국 정치를 돌아봤다. 이 책에 따르면, 의회(국회)는 ‘현대 민주주의자들이 발견한 최고의 평화 기획이다. 그 비밀은 사회적 적대를 정치적 말싸움으로 바꿔낸 데 있다’.

정치를 구성하는 여러 요소 중에 ‘정치가의 말’에 주목하는 책을 펴냈다.

정치에서 말은 무서운 것이다. 강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정치는 여야, 시민 모두에게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도출하는 과정이다. 법안을 하나 만들 때 취지 설명부터 심사까지 쭉 말로 이루어지지 않나. 그 끝에 결론이 나면 강제력을 가진, 누군가를 처벌하고 인신을 구속할 수도 있는 법이 된다. 그때에는 무지(無知)도 용서받지 못한다. 대통령의 말을 두고 우리가 만날 이렇게 싸우는 건 그 말이 갖는 힘 때문이다. 말이 뱉어지면 정부 부처의 정책, 제도, 규칙, 재정으로 나타난다. 그게 국회로 오면 치열한 논쟁이 벌어진다. 이 과정에서 공동체가 서로 존중하는 분위기를 만들 수도 있고, 못 만들 수도 있다. 정치가의 말은 단순히 겉치레가 아니라 그 역할의 본질을 보여주는 핵심이다. 정치인의 말에 따라 우리가 조금 기 펴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안 되고가 결정된다는 생각에서 말을 통해 정치의 실천론을 얘기하려고 이 책을 썼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출근길 약식 회견에서 답변하고 있다. ⓒ연합뉴스

‘정치 실패 이전에 말의 실패가 선행하는 게 민주주의다’라고 썼다. 2022년은 정치인들의 언어가 후퇴했다는 인상을 받는 한 해였다.

민주화 이후 36년을 돌아보면 오르락내리락은 있지만 2004년까지 전체적으로는 정치가 꾸준히 좋아졌다고 생각한다. 그다음부터는 계속 나빠지고 있다. 지금 와서는 아예 정치가 없어졌다 싶을 정도다. 사회문제가 있으면 어젠다가 되어야 한다. 어젠다가 정치권, 의회로 오면 의제·의안이라고 불린다. 사회적 갈등이 의안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민주주의의 수준이다.

예를 들어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가 저렇게 오랫동안 지하철에서 시위를 하는데 국회에서 의안이 되지 않는다. 화물연대 파업도 마찬가지다. 야당은 대통령 욕하는 것, 여당은 노동자 공격하는 것만 달랑 있다. 지금 국회는 사람들을 싸우게만 만들지, 의제를 만들지 않는다. 나는 사실 이러다가 사고라도 날까 봐 너무 걱정이 된다. 삼각지역뿐만 아니라 국회 어딘가에서는 장애인들의 이동권 요구를 다루고 있어야 하는데 그게 보이질 않는다.

우리 정치에서 ‘정치’가 없어진 것은 몇 가지 징후로 설명할 수 있다. 대통령을 위한,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의 게임이 정치를 다 먹어버렸다. 여야 지도부는 대선에 나갈 사람들이거나, 대통령의 정당을 만들려는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이건 보통 문제가 아니다. 미국이 아무리 대통령의 힘이 센 나라라고 해도 의제로 치면 의회에서 논의되는 의제가 가장 많다. 정치가 몰락하면서 정치인들의 말이 나빠지고, 말의 수준이 낮아지면서 나쁜 정치를 증폭시켰다. 여야 의원 가운데 귀 기울일 만한 말을 하는 사람을 찾기가 점점 어려워진다.

그런데 ‘말 잘하는 정치인’이라는 표현은 ‘말만 번지르르하다’는 부정적 맥락에서 주로 쓰여왔다. 정치인의 입만 보고 쓴 기사들이 넘쳐나는 것도 문제로 지적되는데.

책에 쓴 것처럼 정치인의 말을 구성하는 수사학적 요소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로고스(logos). ‘우리 사회는 무엇이 필요합니다’ 또는 ‘이 사안과 관련해서는 이런 변화가 필요합니다’를 말하는 신념·가치·이상·이념을 일컫는다. 두 번째는 에토스(ethos). ‘그것 제가 한번 해보겠습니다’ ‘제가 그 일을 잘할 자신이 있습니다’ ‘제가 책임을 가져보겠습니다’. 세 번째가 파토스(pathos). 공감. 고통에 공감하는 것. 우리 정치는 지금 언론이나 여론에 대고 말장난하는 건 잘한다. 그건 정치 전체의 말에서 지극히 표피적인 것이다. 원래 말이 채워야 할 것 중에 알맹이, 중심부는 없다. 비어 있다.

책에서는 ‘일종의 제도 중심주의가 국회를 지배하고 있다’며 제도를 바꿔 정치를 변화시키려는 접근을 비판적으로 바라본다. 그동안 한국 정치에서는 선거제도, 대통령단임제 등 시스템을 고쳐서 항구적인 개선을 이루어내는 것이 곧 정치개혁으로 통했는데.

제도는 두 가지가 있다. 권위주의에서는 제도를 정해 그냥 집행하면 된다. 지금도 그 방법을 쓸 수 있는 곳이 관료제이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는 건 그렇게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는 뜻이다. 어떤 결정이든 이해당사자들 사이에서 누구는 손해를 보고 누구는 이득을 본다. 갈등을 동반한다. 민주화는 갈등 대상자를 배제하고 일방적으로 밀어붙이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치의 시작은 문제가 생기면 논의하는 것이다.

‘여기 제도가 있으니 지켜.’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건 민주주의 정치에서 별로 없다. 예를 들어서 다른 건 몰라도 선거라는 게임의 룰을 야당과 합의 없이 처리하는 건 있을 수 없다. 아무리 상대 당이 미워도 합의해야 한다. 그걸 안 하니까 2020년 총선 때 위성정당처럼 새 제도를 무력화시키는 시도가 나오고, 막을 수도 없다.

합의를 통해 작동 가능하게 만드는 것을 정치학에서는 ‘갈등 비용을 내부화한다’고 부른다. 그게 민주주의의 제도론이다. 이해당사자들의 요구가 제도를 만드는 논의 과정에 안착돼 있어야 한다. 그게 없이 결정되면 (서울) 강서구 특수학교 설립 과정에서 생긴 일들이 벌어진다. 특수학교가 있어야 하지만 갑자기 거기로 결정되고 나니까. 인근 아파트 주민들의 집값에 대한 걸 무시할 수는 없는 건데. 그 사람들이 악마는 아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주민들이 장애 아이를 둔 부모들에게 악마 역할을 해버렸다. 할 일을 하되 시민을 악마로 만들어버리는 방식으로 추진하면 안 된다.

우리는 제도를 바꿔서 세상을 좋게 만들려는 욕구가 너무 크다. 전 세계에서 법을 최고로 많이 바꾸는 게 대한민국이다. 계산해보면 영국보다 거의 170배 더 많이 법을 개정하고 제정한다. 그러니 반대로 법이 우스워지고 제도가 우스워진다. 헌법 개정도 자주 거론되는데 글쎄. 헌법이 아름다운 나라로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최고다. 최근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고칠 부분들이 있지만 우리 정치제도도 꽤 괜찮은 편이다.

나름 괜찮은 제도인데 한국 정치와 정치인의 말은 왜 점점 더 나빠지나?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방식이 ‘시민 직접 정치’와 ‘공개’를 강조하는 쪽으로 흘러왔다. 권력을 통제하는 방법으로서 투명성과 공개가 있고, 신자유주의 핵심 이데올로기로서 투명성과 공개가 있다. 후자는 정치의 힘을 빼는 수단이다. 정치가에게 권위를 맡겨서 정해진 임기 동안 그 일을 하도록 자율성을 주는 것, 이런 ‘책임정치’가 정치의 본질이다. 논의 과정이 여론에 직접 노출되면 정치인들은 연기를 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국제정치를 배우다 보면, 여론 외교는 전쟁을 가져온다는 굉장히 단순한 이론이 있다.

개방·참여·소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요즘 상식에 반하는 얘기다.

정치인과 정당의 책임성을 우선 가치에 두고 그다음에 개방을 다뤄야 한다. 우리는 이미 개방은 최고로 잘돼 있다. 전 세계 정치학자들은 의회 정보를 접근하는 데 한국이 가장 좋은 편이라고 평가한다. ‘책임정치’ 아래에서 대책을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의원들이 하는 모든 것이 노출돼 있다. 국회 회의에 카메라가 몇 대씩 들어오고 생중계되고 회의록도 온라인에 즉각즉각 올라간다. 실제 국회 상임위원회 보면 가관도 아니지 않나. 온통 카메라에 대고 발언한다. 회의를 위한 발언이 아니라 지지자들에게 주목받을 말을 쏟아낸다. 이걸 보고 정치철학에서는 ‘아첨(flattery)’이라고 한다. 보티첼리가 그린 ‘아펠레스의 중상모략’이라는 그림이 있다. 통치자 옆에서 아첨하는 사람이 바짝 붙어 있고, 진실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모습으로, 정의는 고개를 숙인 형상으로 그려진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다름 아닌 시민이다.

지지자들의 열광을 이끌어내는 발언들, 이른바 ‘팬덤 정치’는 민심에 부응하는 게 아니라 사실 주권자인 시민의 눈을 가리는 일이다?

그게 핵심이다. 그런 말을 해주는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후원금 1등이 되는데 그러면 안 된다. 정치만 나빠지는 게 아니라 시민과 사회가 고통을 받는다.

‘법정이 과거에 행해진 일을 다루는 데 반해 의회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다룬다.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진실 공방의 언어와 의회에서 심의 조정의 언어는 다르다’라는 구절이 책에 나온다. 윤석열 대통령이 국회의원은 아니지만 정치인이 된 이후에도 검사처럼 말한다는 지적이 종종 나온다.

맞다. 법률가 출신들이 그런 잘못을 저지를 때가 많은데 말의 시점이 과거로 간다. 사인들의 세계에서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정치 영역에서 시선이 과거에 머물고 정치인이 사법적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하면 복수의 정치를 피할 길이 없다. 그 대상은 직전 정부일 때가 많다. 본인이 주목받고 권력을 더 부각하려면 직전과 경쟁해야 하니까. 그런 언어는 정치의 미래를 망치는 길이 된다. (금지조항은 없지만) 사실 검찰총장은 정치를 하지 못하는 게 그 직의 규범이다. 예를 들어 현직 기자가 청와대 대변인으로 가는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긴 하지만 결코 옳다고 할 수는 없지 않나. 같은 이치다. 이분이 대통령이 된 유일한 이유는 이전 정부와 각을 세웠던 검찰총장이라는 이유로밖에 설명이 안 된다. 한국 정치의 비극적 단면이다.

물론 존중한다. 정당 후보로 경선을 마쳤고 시민의 선택을 받았기 때문에 인정한다. 인정하지만 본인을 향한 우려를 개선하려면 정치의 규범을 존중하고, 정치에 맞는 말을 쓰고, 진짜 정치를 해야 한다.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고 결기만 보이고 선언하고. 이것은 정치가 아니다. 우리 정치는 혼자 하지 못하게 하려고 여러 규칙을 뒀다. 여야를 둬야 야당을 지지하는 시민들도 동의할 만한 공적 결정을 만들 수 있다.

지난해 12월 최고위원회의에서 발언하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 ⓒ연합뉴스

정치인으로서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말은 어떻게 보나?

이런 개인사를 가진 사람이 입지전적 인물이 되는 건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을 보면 이견과 다양성을 품고 이끌어갈 거라는 믿음은 잘 안 생긴다. 국회에 와서도 동료 의원들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정치가의 면모보다는 폐쇄적인 느낌을 받는다. 유머라고 보기 어려운 야유조의 언어들도 많이 사용하고.

이재명 대표나 윤석열 대통령이나 내가 하나 딱 질색인 건 둘 다 공통적으로 반문투의 말이 많다는 것이다. “전 정권에 지명된 장관 중에 이렇게 훌륭한 사람 봤어요?” 이런 식의 발언들. 정치가는 공직을 받은 대신 성실하게 설명할 책임을 가진 사람들이다. 질문과 반문은 정치인이 아니라 시민들이 하는 거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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