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2월24일 프랑스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쿠르드족 수백 명이 총격 사건의 희생자를 기리고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AP Photo

지난해 12월23일 파리 10구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해 3명이 죽고 3명이 다쳤다. 피해자 6명 중 5명은 쿠르드족이었다. 사건은 정오쯤 앙기앵 거리의 식당, 미용실, 아흐메트-카야 쿠르드 문화센터에서 벌어졌다. 체포된 용의자는 윌리암 M.이라 불리는 69세의 프랑스 남성이다.

프랑스 검찰에 따르면, 용의자는 고의적 살인 및 폭력, 무기법 위반 혐의를 받는다. 현장을 찾은 제랄드 다르마냉 내무장관은 “(범인이) 외국인을 표적으로 삼은 것은 확실하지만 특별히 쿠르드족을 겨냥했는지는 아직 알 수 없다”라고 밝혔다. 내무부는 튀르키예 출신과 쿠르드족 밀집지역에 24시간 경찰을 배치했다. 쿠르드족은 독립국가를 갖지 못하고 튀르키예·이라크·시리아·이란 등지에 퍼져 있는 유랑 민족이다. 총 4000만여 명으로 추산되는데 약 1700만명이 튀르키예에 거주하며, 정치·사회적 탄압을 받고 있다. 전 세계 각지에서 쿠르드족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다. 프랑스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약 24만명에 이른다.

수사 당국에 따르면, 범인은 프랑스철도공사(SNCF)에서 은퇴한 기관사로, 스스로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칭했다. 수사 당국은 지난해 12월24일 용의자가 심문을 이어갈 수 없는 수준이라고 판단해 경찰청 병원에 정신감정을 요청했다. 범인은 외국인을 상대로 두 차례 폭력범죄 경력이 있었다. 12월25일 그의 진술에 따르면, 2016년 집에 든 강도를 무기로 해친 일이 있다. 그는 “이후 외국인을 향한 혐오가 완전히 병적으로 변했다. 자살하기 전에 이주민과 외국인을 살해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 2021년 12월8일에는 파리 12구 베르시 공원 근처에 있는 이주민 캠프에서 펜싱용 칼로 이주민들을 다치게 한 혐의로 체포됐다. 유치장에 구금된 뒤 최대 구금 기간인 1년이 지날 때까지 재판이 끝나지 않자 지난해 12월12일 사법 감시하에 풀려난 상태였다. 그 후 2주가 채 되지 않아 이번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원래 범인은 이민자 밀집지역인 센생드니에서 외국인들을 살해하려 했으나 인적이 드물어 계획을 접었다. 대신 앙기앵 거리로 걸어가 범행을 저질렀다. 범행에 사용한 총은 4년 전 사격클럽 회원에게 받았다. 왜 쿠르드족이었을까? 담당 검사 로르 베쿠오는 범인이 “(프랑스 테러 사건을 일으킨) 다에시(Daesh, IS의 아랍권 표현)를 곧바로 살해하지 않고 포로로 만들어서 쿠르드족이 혐오스러웠다”라고 진술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쿠르드족 관련 단체는 사건을 ‘외국인 혐오 범죄’로 보지 않는다. 쿠르드족을 노린 정치적 테러라고 주장한다. 사망자 3명 가운데 한 명은 프랑스의 쿠르드 여성운동 지도자 에미네 카라였다. 튀르키예 출신 쿠르드족 자치 운동가인 그는 프랑스 정부에 망명을 신청했다가 거부당해 항소한 상태였다. 라디오 프랑스앵포에 출연한 프랑스 쿠르드 민주평의회(CDKF) 대변인 아지 폴라는 “현 상황을 프랑스 극우 성향의 한 인물이 저지른 단순한 공격이라고만 평할 수 없다. 40년 동안 프랑스에 정착한 단체로 지내면서, 그 어떤 순간에도 ‘프랑스 극우’와 문제가 있었던 적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CDKF는 사건 당일 성명을 내고 총기 난사 사건을 규탄했다. 이들은 프랑스 정부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집회를 열었다. 지난해 12월24일 레퓌블리크 광장에서 열린 집회는 폭력적으로 변해, 시위대와 경찰 간 무력충돌로 부상자 30여 명이 발생했다.

10년 전에도 쿠르드족 세 여성 살해당해

쿠르드족은 프랑스 정부에 해당 사건을 정치적 테러 사건으로 간주하고 수사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프랑스 당국은 용의자 심문과 자택 압수수색에서 극우세력이나 테러단체와의 연계가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대테러검찰청(PNAT)이 아닌 파리 검찰에 사건 수사를 맡겼다. 12월24일 일간지 〈르파리지앵〉에서 형법 전문 변호사 윌리암 쥘리에는 “범인이 (임의의) 외국인을 표적으로 한 인종차별적 정신이상자인 경우에는 테러 혐의가 인정되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쿠르드족을 겨냥했거나 터키 정부와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이 발견될 경우 테러 혐의가 인정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에서 쿠르드족이 살해된 사건은 처음이 아니다. 2013년 1월9일 쿠르드노동자당(PKK)에 속한 세 여성이 파리 10구에서 살해당했다. 이때도 비슷한 논란이 벌어졌다. 체포된 용의자는 2016년 재판을 앞두고 뇌종양으로 사망했다. 범인이 사망한 뒤에도 유족들은 범인이 튀르키예 정부와 연관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하며, 공범을 수사하라고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내무부와 국방부는 ‘국가안보 기밀’을 이유로 관련 정보를 제공하지 않았다.

이번 사건이 벌어진 지난해 12월23일, 2013년 사건의 10주기를 대비하는 회의가 열렸다. 12월24일 프랑스 3TV 채널에 출연한 쿠르드족 망명 정치인 엘렌 데르심은 “이 시기에 공격이 일어났다는 건 우연이 아니다. 정치적 행위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테러 혐의 적용에 신중한 입장이다. 12월24일 법무장관 에리크 뒤퐁모레티는 “추악한 본성에서 나온 인종차별 범죄와 테러 행위의 차이는 정치사상에 대한 찬동 여부에 있다”라고 말했다. 프랑스 정부로서는 사건을 섣불리 정치적 테러라고 규정하기 어렵다. 외교 분쟁으로 번질 위험이 있어서다. 2013년 살인사건 발생 당시에도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프랑수아 올랑드 당시 프랑스 대통령에게 ‘쿠르드노동자당 당원들과 프랑스 정부의 관계를 설명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자리에서 에르도안 대통령은 쿠르드노동자당을 ‘테러리스트’라고 지칭했다.

지난해 12월26일 범인은 살인 혐의로 기소되어 예심 재판에 참석했다. 프랑스 쿠르드 민주평의회는 같은 날 이번 총기 난사가 벌어진 거리에서부터 10년 전 살인사건이 일어난 라파예트 거리까지 침묵시위를 했다. 시위대는 튀르키예 정부를 규탄하는 팻말과 쿠르드노동자당 깃발을 들고 행진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사건 당일 트위터에 “프랑스에 있는 쿠르드족이 파리 중심에서 끔찍한 공격의 대상이 됐다. 희생자들과 살아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들, 유족들을 생각한다”라며 추모 글을 올렸다. 2019년 마크롱 대통령은 영국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와의 인터뷰에서 쿠르드족에 대한 튀르키예의 공격을 비판한 바 있으나 이번 사건을 두고는 추가 언급을 하지 않았다. AFP 통신은 12월26일 튀르키예 외교부가 튀르키예 주재 프랑스 대사 에르베 마그로를 초치해 “튀르키예에 반대하는 선동이 쿠르드노동자당을 통해 퍼지고 있는 점에 대해 불만을 표했다”라고 보도했다.

기자명 파리·이유경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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