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 초대 재무장관(가운데)은 독립전쟁 이후 중앙은행 설립을 추진했다. ⓒU.S. Senate Collection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 의장은 아서 번스(10대 의장)가 될 것인가, 폴 볼커(12대 의장)가 될 것인가? 번스는 역대 연준 의장 가운데 최악의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다음은 랜들 퀄스 전 연준 이사가 미국 일간지 〈데저렛 뉴스(Deseret News)〉에 쓴 기고문(2022년 12월1일)의 일부다.

“파월 의장에서부터 매주 금요일 사무실의 식물에 물을 주는 직원에 이르기까지 연준과 관련된 모든 사람은 ‘대악마(Great Satan)’ 한 사람을 알고 있다. 아서 번스다. 혹시 연준 빌딩에 갈 일이 있다면 당신의 가방을 엑스레이로 촬영하는 입구의 보안검색 요원에게 ‘누가 으뜸가는 악당이지요?’라고 물어보라. 주저 없이 ‘아서 번스’라고 대답할 것이다.”

각각 10대•12대 미국 연준 의장을 지낸 아서 번스(왼쪽)와 폴 볼커.

번스는 인플레이션 기미가 역력하던 1970년 1월에 연준 의장으로 취임했다. 경기 활황을 원하던 당시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금리인상을 꺼렸다. 번스는 굴복했다. 취임 당시 8%대였던 기준금리를 그해 연말까지 3.0%로 떨어뜨렸다. 1973~1974년, 오일쇼크에 따른 유가 급등으로 물가가 치솟자 기준금리를 13.6%(1974년 7월)까지 인상했는데, 경기침체가 닥치자, 고작 10개월 만에 5.24%(1975년 5월)까지 끌어내렸다. 이로 인해 미국의 인플레이션율이 두 자릿수를 향해 가파르게 치솟던 1978년 1월, 번스는 퇴임했다. 1979년과 1980년 미국의 인플레율은 각각 11.25%, 13.55%에 이른다. 물가인상은 활황의 ‘증상’ 중 하나다. 기이하게도 번스 재임기엔 인플레이션이 극심한 경기침체를 동반했다. 이른바 스태그플레이션. 연준에게 번스는 정치권 등 외부의 압력에 끌려다니다 미국 경제를 망친, 역사적 반면교사다.

연준은 자신이 다시 물가를 통제할 수 있게 만든 인물로 폴 볼커 12대 의장을 꼽았다. 1979년 8월 취임한 볼커는 1982년까지 3년 동안 초고금리 충격요법을 폈다. 1981년 5월엔 기준금리를 19.29%까지 올렸다. 이로 인해 볼커 취임 당시 6%이던 실업률이 1982~1983년엔 10%를 훌쩍 넘기게 된다. 국민적 혐오의 대상으로 떠오른 볼커는 권총을 차고 다녀야 했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율은 1983년에 3.21%까지 떨어지고, 이후 미국과 세계경제는 이른바 ‘대중용(中庸)의 시대(The Great Moderation, 연준이 명명)’로 접어들게 된다(지금까지의 통계 수치는 미국의 경제 연구기관인 ‘매크로트렌드’에서 참조).

파월 의장은 ‘기준금리 인상 속도’ 부문에서 볼커에 버금가는 기록을 갖고 있다. 권총을 갖고 다니지는 않지만, 파월이 연설에서 가장 자주 거론하는 인물이 볼커다. 그가 볼커의 이름을 꺼낼 때마다 청중은 번스를 떠올린다. 파월은 ‘제2의 볼커’로 남기를 바란다. 아무리 세상이 파월을 욕해도 그가 섣불리 금리인상 기조를 포기하진 않을 것이다. 파월은 미국(나아가 세계)의 물가와 경기를 통제하지만, 연준의 역사로부터 통제받는다. 2023년 연준이 세계경제를 어디로 끌고 갈지 짐작하려면 이 중앙은행이 걸어온 길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 연준 이전의 중앙은행들

연준은 1913년 ‘연방준비제도설립법’ 제정에 따라 출범했다. 다만 연준 이전에도 미국엔 ‘중앙은행 비슷한’ 기관이 존재했다.

연준 홈페이지의 ‘연준 역사(Federal Reserve History)’에 따르면, 미국에서 중앙은행의 필요성이 제기된 시기는 독립전쟁(1775~1783년) 전후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사람인 알렉산더 해밀턴(초대 재무장관)의 아이디어로, 그는 신생국 미국이 유럽 강대국들과 맞서려면 중앙은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 중앙은행은 영국의 잉글랜드 은행처럼 미국 연방정부(1789년 헌법 비준으로 성립)의 재정(전비 등) 조달을 지원할 것이었다. 또한 당시 미국인들은 주로 금과 은, 영국 화폐 등으로 거래하고 있었다. 거래 규모에 비해 돈이 부족했다. 잉글랜드 은행을 열심히 공부했던 해밀턴은 국가를 배후에 둔 중앙은행이 금을 바탕으로 국가 통화(national currency)를 발행하면 널리 유통시킬 수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다.

해밀턴의 생각은 1791년 (1차) 미국은행(The Bank of the United States) 설립으로 실현되었다. 연방정부로부터 영업을 허가받은 ‘국법은행’인 미국은행은 탄생부터 논란에 휩싸였다. ‘연방(federal)정부와 주(state)정부 가운데 어느 쪽이 더 큰 권한을 가져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자(연방주의)의 대표 주자가 해밀턴이라면, 후자(반연방주의)는 토머스 제퍼슨(3대 대통령)이 대표 인물이다. 미국은행 출범 이전, 일부 주에서는 이미 ‘주법은행(주정부가 허가한 은행)’이 영업 중이었다. 제각기 종이돈(주법은행권)을 발행하고 예금과 대출 업무도 수행했다. 제퍼슨은 연방정부를 업은 미국은행이 주정부 및 주법은행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더욱이 미국은행의 소유·지배권은 거의 민간의 부자들(연방정부의 지분은 20% 내외에 불과)에게 있었다. 반연방주의자들 시각에서 미국은행은 연방정부와 부유층에게 금융 권력을 몰아주는 ‘괴물’이 될 수 있었다. 결국 미국은행 설립을 허용하되 영업 기간은 20년으로 제한해서 1811년에 폐쇄했다. 그러나 다음 해인 1812년 영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중앙은행이 있다면 전비를 좀 더 용이하게 조달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여론이 다시 확산되었다. 1816년, 2차 미국은행이 설립된다.

에이브러햄 링컨(가운데) 정부는 1863~1864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국법은행법을 제정했다. ⓒAP Photo

사실 미국은행들은 제퍼슨이 우려할 만한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예컨대 미국은행이 발행한 지폐(미국은행권)는 당시 미국에서 유통되던 지폐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세금은 미국은행권으로 납부하도록 법제화되어 있었다. 따라서 어느 주에 살든 미국 시민이라면 미국은행권이 필요했다. 미국은행권이 주의 경계를 넘어 전국적으로 유통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더욱이 미국은행은 국고(세금)를 ‘정부 예치금’으로 받아 운용하는 ‘정부의 은행’이었다. 그만큼 영업에 활용할 수 있는 자본이 많았다(미국은행은 요즘의 중앙은행들과 달리 가계와 기업에 대해서도 예금·대출 업무를 수행했다).

미국은행은 금과 은도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사실 지폐는 숫자가 새겨진 종이일 뿐이다. 발행 은행에 가져갔을 때 금(그 자체로 가치를 지니는, 숭배의 대상)으로 바꿀 수 있다는 것(태환)이 보장될 때 비로소, 그 지폐는 욕망의 대상으로 떠오른다. 그러려면 해당 은행의 금 보유 규모가 커야 한다. 작은 주법은행들은 금을 많이 보유하기 어려운 데다 발행 지폐 역시 다른 주에서 사용할 수 없었고, 운용할 자본도 넉넉히 가지지 못했다. 경쟁력 측면에서 미국은행은 주법은행들과 비교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덕분에 2차 미국은행은 미국의 통화량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심지어 과세권을 가진 정부보다 강한 조직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그러나 독재와 경제력 집중을 견제하는 측에서 볼 때 미국은행은 연방정부와 부자들을 대변하는 민중의 적일 수 있었다. 1829년에 집권한 앤드루 잭슨 대통령(7대)은 그렇게 생각했다. 잭슨 대통령이, 의회에서 통과된 2차 미국은행의 영업 기한(20년) 연장안에 거부권을 행사하면서 미국은행의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1836년). 당시 잭슨 대통령과 2차 미국은행이 벌인 힘겨루기는 ‘은행 전쟁(Bank War)’으로 명명되어 있다.

■ ‘자유 은행’ 시대에서 국법은행 시대로

이후 30여 년 동안 미국 금융 시스템은 극심한 불안정기를 거쳤다. 2차 미국은행이 폐쇄된 1836년부터 남북전쟁(1861~1865년) 시기에 작은 주법은행들이 수없이 설립되었다. 연준의 역사 자료에 따르면, 남북전쟁이 시작될 당시 미국의 주법은행은 무려 1600여 개에 이르렀다. 수천 가지 은행권이 유통되면서 위조지폐까지 만연했다. 지폐들의 가치 자체가 불확실했다. 발행 은행이 망하면 그 지폐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민간기업들은 거래에 극심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른바 자유 은행 시대(Free Banking era)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연방 대통령으로 당선(1860년)된 이듬해, 남북전쟁이 발발한다. 링컨 정부 역시 막대한 전비를 조달해야 했는데, 금이 없었다. 장기적으로는 미국의 통화 및 은행 시스템을 안정시킬 필요도 있었다. 링컨 정부는 1863~1864년 여러 차례 개정을 거쳐 국법은행법(National Banking Act)을 제정한다. 미국 통화감독청(OCC) 자료에 따르면, 당시 신설된 정부기구인 OCC에 사업계획서를 제출해 승인받으면 국법은행(연방정부의 인가를 받은 상업은행)을 설립할 수 있었다. 창업자들은 국법은행 자본금 중 3분의 1로 국채(재무부 발행)를 사야 했다. 자본금 100만 달러로 국법은행을 설립한다면 그중 33만3000달러로 국채를 매입한다. 해당 국법은행의 자본금은 33만3000달러어치의 국채와 66만9000달러어치의 금·은으로 구성되는 셈이다. 링컨 정부가 판 국채는 물론 남북전쟁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

대신 국법은행은 해당 국채를 담보로 ‘국가 통화(national currency)’를 발행하는 특권을 누렸다. 어느 지역의 국법은행이든 디자인, 크기, 색채가 동일한 국법은행권을 발행했다. 각 지폐의 구석에 발행 국법은행과 임원들의 이름이 적혀 있는 것만 달랐다. 이 지폐는 발행 은행에 가져가면 금화나 은화로 바꿀 수 있었다. 해당 은행이 태환하지 못하면 정부가 책임졌다. 수많은 주법은행권에 비할 때 국법은행권은 가치가 보장되는 대단히 힘센 돈이었다. 국법은행들은 가계와 기업에 대한 예금·대출 업무로 수익을 얻는다는 점에서 일반 은행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영업의 주재료가 ‘국가 통화’라는 점에서 엄청난 경쟁 우위를 누렸다. 연준 역사 자료에 따르면,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사용되던 대부분의 돈이 국법은행권이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의 문제점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나게 된다. 남북전쟁 종료부터 20세기 초반에 이르는 대호황 시대(Gilded Age)에 미국은 산업혁명으로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루고 있었다. 거래가 늘어나는 만큼 ‘유동성(누구나 기꺼이 받는 돈의 양)’도 많이 필요했다. 국법은행권은 ‘누구나 기꺼이 받을’ 만큼의 신뢰(금보다는 못하지만)를 획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양적으로는 언제나 부족했다. 국법은행들은 법률에 따라 자행 보유의 미국 국채만큼만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국가경제 규모가 커진다고 해서 국법은행권이 늘어나지는 않았다(비탄력적 통화).

대호황 시대의 미국에서는 철도 부문에서 대규모 주식회사들이 설립되고 이런 주식들을 중개하는 증권거래소와 브로커 업종이 활성화되고 있었다. 자본가와 투기꾼들이 은행에서 빌린 돈으로 주식과 금을 대상으로 위험한 투기와 인수합병 전쟁을 벌이던 시대였다. 투기가 실패하면 일단 해당 투기꾼의 거래 은행에 대해 벌어진 ‘뱅크런’이 다른 수많은 은행으로 확산되는 ‘은행 패닉(Bank panics)’이 주기적으로 터졌다. 만약 그 은행들이 고객과 채권자에게 내줄 금이나 국법은행권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다면 패닉의 조기 차단이 가능했을 터이다. 그러나 수량이 원천적으로 제한된 금은 차치하고 국법은행권 자체가 넉넉지 않았다.

이런 와중인 1907년 10월 드러난 구리 시장에서의 투기 실패가 미국 전역에서 수많은 은행들을 파산시키는 금융공황이 터진다. 그러나 당시 미국엔 최종 대부자 노릇을 할 기관이 없었다. 결국 악명 높은 독점자본가이자 금융가로 경제계에서 절대적 영향력을 가졌던 JP모건이 은행장들을 조직해서 취약한 금융기관에 자금을 무제한 몰아주는 식으로 사태를 해결했다. 일개 자본가가 중앙은행의 기능 중 하나인 최종 대부자 역할을 해낸 것이다. 이후 ‘미국에도 중앙은행을 설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정치권과 금융권을 중심으로 형성된다. 1907년 금융공황이 연준의 산파 노릇을 한 셈이다.

1929년 10월24일 주식시장이 폭락한 ‘검은 목요일’에 투자자들이 뉴욕 페더럴 홀 앞에 모였다. ⓒAP Photo

■ 연준 설립과 대공황

1913년 12월23일 미국 연방준비제도설립법(연준법)이 제정되었다. 연준의 시대적 과제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경제활동의 규모에 맞춰 탄력적으로 늘거나 줄어들 수 있는 ‘탄력적 통화(elastic currency)’의 창출이었다. 은행이 금과 국채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느냐에 따라 유동성 규모가 결정된다면, 미국이 산업국가로 발전하는 데 필요한 통화의 안정적 공급은 불가능하다. 다른 하나는 금융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최종 대부자 기능이었다.

그렇다면 이 연방준비제도에서 발행하는 은행권(연방준비은행권=달러)은 어떻게 탄력성을 갖추게 되었을까? 당시 우드로 윌슨 정부는 미국을 12개 구간으로 나눈 뒤 지역별로 준비은행(Reserve Bank)을 조직했다. 해당 지역 소재 민간은행들이 준비은행(그 지역 중앙은행)의 자본금을 나눠 납입했다. 준비은행의 주주이자 회원인 민간은행들은 자본금을 납입한 대가로 필요할 때 준비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이른바 할인창구 대출(discount window lending)이다. 물론 할인창구 대출을 받으려면 준비은행에 담보를 제공해야 한다. 그 담보는, 회원 은행이 민간기업이나 농가에 돈을 빌려주면서 갖게 된 ‘대출채권(채무자로부터 상환받을 수 있는 권리)’이다. 그런데 회원 은행이 준비은행에 대출채권을 담보로 제공하고 돈을 빌리는 것만으로 유동성이 늘어난다. 예컨대 회원 은행이 1만 달러를 3년 만기로 민간기업에 빌려줬다면 상환이 끝날 때까지 그 돈은 묶이게 된다. 그러나 회원 은행이 1만 달러의 대출채권을 준비은행에 맡기고 9000달러를 빌린다면 그 돈을 다시 민간에 대출할 수 있다. 그만큼의 돈이 추가로 풀린다. 국법은행법 시절의 민간은행들이 국채를 보유한 만큼만 유동성을 가질 수 있었다면, 연준법 이후의 은행들은 ‘국가 통화’를 더 빌려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통화 공급이 늘어나고, 달러는 더욱 탄력적으로 발전했다.

달러를 탄력적으로 만드는 12개 준비은행은 해당 지역 민간은행들의 소유인 ‘순수’ 민간기업이다. 할인창구 대출의 이자로 수익을 얻으면 주주(회원은행)들에게 배당했다. 다만 연준법은 수도 워싱턴에 설치한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중앙 관제탑’으로 준비은행들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도록 규정했다. 그 이사들은 대통령이 임명한다. 연준은 당초부터 민과 관, 사익과 공익, 지역과 중앙의 조화 혹은 절충을 목표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연준 설립 초기엔 연방정부와 공익의 대변자로 설정된 중앙 관제탑(FRB)의 권한이 너무 약했다. 이 문제점이 드러난 사건이 바로 1929년 8월에 터진 대공황이다.

금융위기의 전조가 나타나던 1920년대 후반, 연준은 이런 상황에 대응하는 국가 차원의 통화정책을 수립하기는커녕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지역 준비은행마다 견해가 달랐으며, 중앙의 FRB는 무력했다. 연준 자료(The Great Depression)는 당시의 이론적 대세가 ‘진성어음주의(real bills doctrine)’였다고 술회한다. 이에 따르면, 중앙은행은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많아지는 호황기에만 일반은행들에 추가 자금을 공급해야 한다. 생산과 통화량이 함께 늘어나니 인플레는 발생하지 않는다. 기업들의 자금 수요가 적은 불경기엔 통화량을 줄여야 한다. 불황으로 생산량이 줄어드는데 돈만 풀린다면 엄청난 인플레가 발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금융위기는 불경기의 증상이며, 통화량을 줄여서 부실 금융기관들을 망하게 만들어야 전체 경제 시스템이 개선된다’는 주장까지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연준은 활황(주식시장 붐)이 불황으로 전환되던 1920년대 말에 오히려 금리를 올렸다. 1930년부터 은행들의 파산이 시작되었지만, 진성어음주의에 따라 최종 대부자 노릇 따위는 포기했다. 결국 1933년에는 미국의 은행 시스템이 총체적으로 붕괴하는 사태로 치달았다. 연준 자료에 따르면, 1930년 가을에서 1933년 겨울 사이 미국의 통화 공급과 가격수준이 거의 30%나 떨어졌다. 실업률은 25%로 치솟았다. 미국과 세계는 10여 년에 걸친 불황을 겪었다.

벤 버냉키(14대 연준 의장)는 연준 이사였던 2002년 연설에서, 연준의 실수가 “미국 역사에서 최악의 경제적 재난에 기여했다”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연준)가 굉장히 잘못했다. 다시는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겠다.”

1948년 4월16일 토머스 매케이브(왼쪽)가 8대 연준 의장으로 취임했다. ⓒThe Harry S. Truman Library

■ 연준법 개정과 정치적 독립

대공황기인 1933년 3월에 집권한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그가 의장으로 지명한 매리너 에클스의 요청에 따라 연준 시스템을 대대적으로 개혁했다. 그 결과인 1935년 개정 연준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최고 의결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연준 산하에 설치한 것이었다. 또한 연준의 무게중심을 12개 준비은행들에서 FRB와 의장에게로 옮겼다. 각자 비교적 자율적으로 통화정책을 수립·집행하던 준비은행들은 FOMC 결정을 무조건 받아들이도록 의무화되었다. 에클스는 ‘현대 연준의 아버지’로 불린다.

한편 ‘연준의 정치적 독립성’이 의제로 떠올랐다. 이토록 강화된 조직이 행정부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통화량을 마구 조정하면 국가경제에 큰 해악을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재무장관 등 당연직 위원이 연준의 의사결정 기구에서 배제되기도 했으나,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이란 비상 상황은 연준을 그냥 놔두지 않았다. 행정부의 전비 조달에 중앙은행의 협력이 절실히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한 연준과 재무부 사이의 갈등은 한국전쟁 발발 직후인 1951년 초에 절정으로 치닫게 된다.

당시 해리 트루먼 정부는 국채를 통해 전비를 조달하기 위해 국채 가격을 높게 유지할 필요가 있었다. 가격이 하락할 것으로 예측되는 금융상품(국채)을 매입할 투자자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준금리를 인상하지 말라고 연준을 압박했다. 국채 가격과 금리는 반비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연준은 금리인상을 미룰 수 없는 처지였다. 전비로 인한 재정지출 때문에 인플레 압력이 심각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양측의 갈등이 격화되고 있던 1951년 1월29일, 트루먼 대통령이 FOMC 위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국채 가격 유지를 설득한다. 이 자리는 양측의 거리를 확인하는 정도에 그쳤다. 토머스 매케이브 당시 연준 의장(8대) 등은 트루먼의 요구를 정중하게 경청한 뒤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백악관은 이튿날 낸 성명서에서 ‘FOMC가 현재 금리 수준의 유지로 국채 가격을 안정시키기로 약속했다’고 발표해버린다. 이에 연준은 〈뉴욕타임스〉에 백악관 모임 회의록을 공개하며 ‘그런 약속을 한 적이 없다’고 폭로했다. 대통령을 공개적으로 거짓말쟁이라고 부른 것이다.

결국 재무부와 연준은 그해 3월4일, ‘1951년 재무부-연준 협정(Treasury Fed Accord of 1951)’으로 알려진 합의에 도달한다. 상대 기관의 독립성을 존중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로써 연준은 적어도 공식적으론 정부의 개입을 배제하고 통화정책을 자유롭게 구사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받았다.

2020년 6월29일 미국 워싱턴 DC에 위치한 연방준비제도 청사 전경. ⓒXinhua

■ ‘결계’를 넘어선 연준의 과제

2차 세계대전을 분기점으로 선진국 통화정책 당국의 고민은 180° 바뀌었다. 이전엔 디플레이션이 문제였지만(통화량을 늘리지 못했기 때문), 이후엔 인플레이션과 싸웠다. 기사 도입부에 등장한 1970년대의 번스 전 의장은 인플레 대응 때문에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 욕을 먹고 있다. 연준 측은 볼커 전 의장의 성공적인 대처로 인플레를 잡았으며, 그 덕분에 인플레율을 비교적 낮게 유지하면서 괜찮은 경제성장률까지 동반한 ‘대중용 시대’를 세계 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까지 유지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 이에 더해, 대중용 시대의 핵심적 요인 중 하나는 ‘좋은 통화정책’이었다며 연준의 자부심을 서슴지 않고 노출한다.

이후 연준은 세계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팬데믹이란 ‘비상 시기’를 맞아 세계 중앙은행들 가운데서 가장 선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최종 대부자 기능을 작동시켰다. 그중엔 17세기 말 이후 형성된 ‘중앙은행의 개념’을 바꿔놓을 만한 정책도 있었다. 가계와 기업, 정부에 중앙은행인 연준이 시중은행처럼 직접 천문학적 규모의 자금을 대출해버린 것이다. 중앙은행의 최종 대부자 기능은 금융시스템(주로 시중은행)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것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연준은 ‘결계’를 넘어섰다.

그러나 선험적으로 정해진 규칙 따위는 없다. 중앙은행 자체가 인류의 고안이다. 인류는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을 축적하면서 이를 기반으로 인간의 삶을 개선할 수 있는 지혜를 발전시켜왔다. 자연과학이 그렇다. 중앙은행과 통화정책 역시 자본주의 시장경제라는, 인간들이 집합적으로 만들지만 정작 그것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물가는 왜 오르내리고, 고용과 경제성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는 잘 모르는, ‘제2의 자연현상’에 대한 지식 축적과 지혜 발전의 소산이다. 그래서 비상 시기에 푼 돈으로 발생한 문제(인플레)를 해결하기 위한 연준의 최근 시도들은 꼼꼼하게 관찰할 가치가 있다.

기자명 이종태 선임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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