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1월27일 중국 베이징에서 우루무치 화재 희생자를 추모하고 제로 코로나 방역에 항의하는 백지 시위가 열렸다. ⓒREUTERS

중국인에게 2022년은 어떤 해로 기억될까. 밖으로는 베이징 동계올림픽을 통해 국력을 과시했고, 안으로는 시진핑 주석의 장기 독주 체제를 구축했다. 덩샤오핑 이래 견지해왔던 집단지도체제가 무너지고 ‘시진핑 1인 천하’가 열렸다.

‘균열’이 생긴 건 시진핑의 집권 3기가 출범한 지 겨우 한 달 만이었다. 중국 전역에서 ‘제로 코로나’ 방역 정책에 항의하는 시위가 벌어졌다. 방역 당국의 봉쇄조치로 우루무치에서 아파트 화재 참사가 난 것 아니냐는 분노가 삽시간에 번졌다.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에서는 ‘시진핑 하야하라’ ‘공산당 물러나라’는 충격적 구호가 울려 퍼졌다.

외신과 국내 언론은 ‘제2의 톈안먼(천안문) 항쟁’ 가능성을 점치는 기사를 썼다. 방역 조치에 대한 저항을 넘어 시진핑 정권에 커다란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1월30일 1990년대 중국의 도약을 이끈 장쩌민 전 국가주석이 사망했다. 외신과 일부 국내 언론은 제2의 톈안먼 사태를 일으키는 도화선이 될 수 있다고 했다. “시위대가 장쩌민 치하에서 가능했던 정치적 자유의 길로 돌아가자고 요구하고 있다”라는 〈뉴욕타임스〉 기사가 대표적이다.

과연 그럴까. 장쩌민이 사망하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 중화인민공화국 상무위원회 등 중국의 지도부는 ‘전당과 전군, 전국 여러 민족 인민에게 고하는 글’을 발표했다. 200자 원고지 42장에 달하는 이 글은 장쩌민의 업적을 기리는 중국 정부의 조문(弔文)이다. 특히 주목할 대목은 이것이다.

‘1989년 늦봄에서 초여름 사이 중국에서 엄중한 정치 풍파가 발생했을 때 장쩌민 동지는 기치 선명하게 동란을 반대하고 사회주의 국가 정권을 고수하며 인민의 근본 이익을 수호한다는 당 중앙의 정확한 결정을 옹호하고 집행했으며 광범위한 당원·간부·대중을 긴밀히 단합시켜 안정을 유력하게 수호했다.’

2022년 12월5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장쩌민 전 주석의 유해를 바라보고 있다. ⓒAP Photo

몰라서 순응한 것 아니다

이 글에서 말하는 ‘엄중한 정치 풍파’가 바로 톈안먼 항쟁이다. 톈안먼 항쟁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누적된 사회 모순 속에서 터져 나온 시민 저항을 1989년 6월4일 군대가 무자비하게 진압한 사건이다. 이때 장쩌민은 조문 내용처럼 ‘동란을 반대’했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장쩌민은 당시 민주개혁 성향인 〈세계경제도보〉의 발행을 중단시키고 편집인을 해임하는 등 언론 탄압을 자행했다. 그가 당서기로 있던 상하이에서 학생 수천 명이 ‘장쩌민을 감옥으로’라는 깃발을 들었을 정도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을 인용해 ‘인민의, 인민을 위한, 인민을 위한 정부’를 요구하는 학생들 앞에서 장쩌민이 연설 전문을 영어로 암송하며 “미국식 민주주의가 중국에 얼마나 위험한지 너희들은 모른다”라고 일갈했던 일화도 유명하다(〈중국을 변화시킨 거인 장쩌민〉 로버트 로런스 쿤 지음).

장쩌민이 높이 평가받는 부분은 유혈 진압을 벌였던 베이징과 달리 상하이에서는 계엄령을 선포하거나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항쟁’의 도화선이 되기에는 약점이 적지 않은 인물이고, 중국공산당은 그 점을 포착해 시위를 달래는 추모사를 발표한 셈이다. 12월6일 장쩌민 추도식에서 시진핑은 이 조문을 재차 낭독했다.

장쩌민 사망 이후 잠잠해졌지만 이번 시위의 의의는 분명하다. 시위 참가자가 느낀 ‘타격감’이 확실했다. 중국 정부가 결국 민심에 ‘반응’했다. 장쩌민 추도식 이튿날인 12월7일 코로나19 확진자에 대해 시설격리가 아닌 자가격리를 허용하는 등 방역 완화 조치를 발표했다. 대중교통 이용 시 PCR 검사 폐지 등 시위 이후 단행된 몇몇 조치에 이은 대대적인 완화 조치다. 사실상 ‘제로 코로나 폐기’ 순서를 밟고 있다는 해석이 나온다.

눈여겨봐야 할 것은 중국인들이 당장 전면적인 방역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위챗(한국의 카카오톡 같은 메신저)으로 운영되는 중국 현지의 아파트 단체 대화방에서는 중국 정부의 과도한 통제 정책에 대한 비판과 함께 급속한 방역 완화가 가져올 부작용에 대한 걱정도 만만치 않게 나온다. 이는 중국 정부가 그동안 코로나19의 위험성을 거듭 경고해온 탓도 있지만, 급격한 완화 이후 닥칠 의료시스템 붕괴를 걱정하는 ‘시민적 상식’에 따른 염려이기도 하다. 중국 시위를 지지하는 한국 내 중국 유학생이 모인 단톡방에서도 방역 완화 이후 노약자의 안위를 염려하는 글이 올라오고 있다.

12월7일 방역 완화 이후 중국의 관영매체는 코로나19의 위험성이 독감 수준이라는 전문가의 의견을 내보내고 있다. 과거 감염병의 위험성을 강조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태도다. 그런데 광저우에 거주하는 문화교류 활동가 김유익씨에 따르면 중국인 가운데에도 코로나19가 (중국 정부의 발표와는 달리) 그렇게까지 위험하지 않다는 점을 진작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꽤 있었다. 중국인 대다수가 그동안 뭘 몰라서 당국의 방역 조치에 순응한 것이 아니었다는 이야기다. 알고도 인내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저항하는 소수와 인내하는 대다수. 이 또한 중국의 현실이다.

이번 시위를 주도한 이들은 ‘주링허우(1990년대 출생)’ ‘링링허우(2000년대 출생)’로 불리는 중국의 1020 세대다. 시진핑 시대에 이른바 ‘애국주의’ 교육을 받고 성장하면서 조국에 대한 자긍심이 누구보다 높은 세대다. 게임, 유튜브 등 온라인상에서 한국, 일본 등 외국의 젊은이와 부딪치며 반중 정서를 키우는 데 한몫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시진핑이 키운 애국 청년들이 ‘양날의 검’이 되어 돌아온 셈이다.

방역조치 완화와 함께 이들이 요구한 것은 ‘언론의 자유’다. 중국 정부는 그동안 방역조치에 저항하는 온라인 게시물을 삭제했다. 우루무치 화재 참사를 비판하는 게시물도 마찬가지였다. 추모마저 검열하는 공산당과 시진핑에 대한 분노가 폭발하면서 이번 시위는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로 확대됐다. 빈 종이를 들어 저항하는 ‘백지 시위’는 천 마디 말보다 더 강력한 상징이었다. 중국 헌법 제35조는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은 언론·출판·집회·결사·여행·시위의 자유를 가진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언론 자유를 요구하는 중국 청년들이 호명한 사람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시진핑의 아버지 시중쉰이다. 중국에서 존경받는 ‘혁명 원로’인 그는 인민의 자유를 중시하는 발언을 많이 남겼는데, 백지 시위 이후 중국 온라인에는 시중쉰의 어록이 퍼졌다. “인민이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고, 국가 대사에 관심을 갖도록 장려해야 한다.” “혁명 정당은 인민의 목소리를 듣지 못할까 봐 걱정해야 한다.” “가장 무서운 것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한 것이다.” 어록은 곧 온라인에서 사라졌지만, 청년들은 독재자의 아버지를 불러내는 방식으로 중국 사회를 비판했다.

요즘 중국 청년의 삶을 설명하는 단어가 있다. 첫째가 ‘탕핑(躺平)’이다. 그냥 누워 있는다는 의미다. 아무리 노력해도 집을 못 사고 결혼도 힘들다면 차라리 집에 누워 숨만 쉬고 살겠다는 뜻이다. ‘바이란(擺爛)’이라는 말도 있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세상에 관심을 끊겠다는 냉소를 담고 있다. 한국의 ‘N포 세대’ ‘헬조선’ 같은 말을 떠올리게 한다.

1989년 6월 톈안먼 항쟁 무력 진압이 끝난 후 광장을 정리하는 중국 군인들. ⓒXinhua

청년세대 분노는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네이쥐안(內卷)’은 더 심각하다. 본래 이 말은 중국의 경제가 양적으로만 성장하고 질적으로는 문제가 있음을 가리키는 학술용어였는데 온라인상에서는 중국 청년이 무한경쟁 상황에 놓였음을 표현하는 말로 바뀌었다. 나라는 발전했지만, 자신들의 삶은 벼랑 끝에 몰려 있다는 한탄이다. 중국 정부의 공식 자료에도 이미 청년 실업률은 20%에 근접한다. 폭등하는 부동산값과 물가 속에 빈부격차도 날로 심해지고 있다. 2020년 리커창 총리는 “월수입이 1000위안(약 19만원)도 되지 않는 사람이 중국에 6억명이나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시위는 그래서 중요하다. 성장가도를 달리던 중국 사회에 누적된 피로와 절망이 봉쇄조치를 계기로 분출했다고 봐야 한다. 톈안먼 항쟁 역시 개혁개방 이후 심화된 실업과 물가 인상, 빈부격차에 대한 분노가 바탕에 깔려 있었다. 언론 자유에 대한 요구도 톈안먼 항쟁과 이번 시위의 공통점이다.

톈안먼 항쟁은 사실 중국인에게 ‘잊혀진 반란’이다. 당국의 역사 검열 교육을 받아온 젊은 세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톈안먼 항쟁 사진을 본 중국 학생이 “이거 한국의 5·18 사진이죠?” 하며 물었다는 일화도 있다. 동시에 ‘실패한 반란’이기도 하다. 톈안먼 항쟁을 연구해온 서울시립대 하남석 교수(중국어문화학)는 “1978년 베이징 시민들이 민주와 인권을 요구하며 벽에 대자보를 붙인 ‘민주의 벽’ 사건 이후 축적된 중국 시민사회의 동력이 톈안먼 무력 진압 이후 사라졌다. 톈안먼 항쟁이 오히려 중국이 신자유주의로 나아가는 계기가 됐다는 평가도 있다”라고 말했다. 중국의 비판적 지식인 첸리췬 전 베이징대학 교수는 톈안먼 항쟁 이후 중국 사회가 ‘가장 나쁜 사회주의와 가장 나쁜 자본주의의 결합’이 되었다고 비판했다.

남는 질문은 이것이다. 이번 백지 시위가 중국 사회에 어떤 기억으로 남을 것인가. 일단은 방역 완화 조치를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톈안먼 항쟁처럼 실패한 반란으로 잊히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이미 시작된 시위 참가자 색출 작업을 통해 저항세력을 ‘외부의 적’으로 몰아세우며 고립시킬 공산이 크다. 국내 중국 연구자들은 조만간 대대적인 피바람이 불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중국의 현대사상을 연구해온 조경란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는 “시진핑 퇴진 구호가 베이징 중심가에서 터져 나왔다는 건 분명 중요한 민심의 변화다. 그러나 규모가 크고 사람이 많은 중국은 변화가 늦다. 시간이 오래 걸릴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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