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22일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대회의실에서 이태원 참사 유가족 입장 발표 기자회견이 열렸다. ⓒ시사IN 신선영

11월22일 이태원 참사 유족의 기자회견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두고두고 새겨야 할 엄중한 질문이 나왔다.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국가가 어디 있었는지, 국가가 뭘 했는지, 이제 국가가 답을 해달라.” 세월호 참사 이후 겨우 8년 만에 이런 물음을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국가는 어디 있었나.’ 이것은 그 자체로 비극적 질문이다.

국가는 선택적으로 존재한다. 11월29일 윤석열 대통령은 화물연대 파업에 대해 사상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내리면서 ‘국가’를 호명했다.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국민의 삶과 국가경제를 볼모로 삼는 것은 어떠한 명분도 정당성도 없다. 불법행위 책임은 끝까지 엄정하게 물을 것이다.”

정부는 ‘중대본’까지 꾸렸다. ‘화물연대 집단운송 거부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다. 자연재해 등이 아닌 노동계 파업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가 중대본을 꾸린 것도 처음이다. 주무 부처인 국토교통부 외에도 행정안전부와 경찰청까지 포함시켰다. 공권력 투입을 염두에 둔 구성이다.

11월28일 중대본 회의를 주재한 건 이태원 참사 핵심 책임자인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이었다. 이 장관은 “(화물연대 파업을) 코로나19, 이태원 참사와 똑같이 사회적 재난으로 분류한다”라고 말했다. 참사 대응에 실패한 책임자가 화물연대의 집단행동을 재난이자 참사로 규정하는 심판자가 되었다.

업무개시명령은 2004년 처음 도입됐으나 지금까지 단 한 차례도 발동한 적이 없다. 근원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화물연대 소속 화물차주들은 정부가 개인사업자로 분류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다. 최저임금도 노동시간 제한도 적용받지 않는다. 개인사업자의 업무 거부를 ‘범죄’로 볼 수 있느냐를 두고 명령이 발동되자마자 위헌 논란이 불거졌다.

화물연대 파업에 대한 이 정부의 대응은 뚜렷이 ‘박제’할 필요가 있다. 시간을 화물연대의 첫 번째 파업이 있던 지난 6월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6월14일 화물연대는 국토교통부와 이렇게 합의하고 파업을 종료했다. ‘화물자동차 안전운임제 연장 등 지속 추진, 안전운임제의 품목 확대 등과 관련해 논의.’

정부는 당시 8일간의 화물연대 파업으로 2조원 이상 경제손실이 발생했다고 추산했다. 이수진 민주당 원내대변인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안전운임제와 관련해서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품목 확대를 논의하겠다는 국토부의 전향적 입장을 환영한다”라고 밝혔다. 국정 운영의 파트너인 야당은 당시 합의를 ‘안전운임제 지속 추진’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합의 며칠 뒤인 6월17일 원희룡 국토교통부 장관은 긴급 브리핑을 열고 합의 내용을 부정한다. 원 장관은 “화물연대 파업의 사례를 살펴볼 때 모든 원인은 ‘유가 급등’에 있다. 안전운임제 자체가 아니라 더욱 근본적인 대책 마련이 필요하다”라고 입장을 바꾼다.

여기서 드러나는 건 ‘정치의 실종’이다. 어떤 운임제가 더 바람직한지는 얼마든지 다퉈볼 수 있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한쪽은 (야당까지 포함해서) 합의라고 받아들였고, 다른 쪽은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 상태로 5개월 넘게 대화는 지지부진했다. 화물연대가 합의 이후 추가 논의가 두 번밖에 없었다고 주장할 정도로 협상 노력이 부족했다.

11월30일 민주노총이 ‘윤석열 정부 반헌법적 업무개시명령 철회 촉구’ 기자회견을 열었다.ⓒ연합뉴스

‘선택할 자유’로 깬 정치의 금도

화물연대 파업의 쟁점은 ‘안전’운임제다. 과로로 인한 화물차 기사의 안전사고를 줄이기 위해 적정한 운임을 책정해달라는 요구다. 화물차의 안전은 곧 모든 시민의 안전이다. 이태원 참사 이후 정상적인 정부라면 안전문제는 거스르기 어려운, 아니 거스를 수 없는 이슈다. 그러나 정부는 내내 강 대 강으로 맞섰다. 11월30일에는 안전운임제 자체를 폐지할 수 있다며 초강수를 뒀다. 사태를 수습해도 모자랄 정부가 ‘안전 시계’를 6월 이전으로 되돌리려는 셈이다.

대통령은 이런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취임 100일을 맞은 8월17일 노사 문제를 ‘법과 원칙에 따라’ 처리했다면서 ‘화물연대의 운송 거부 문제를 해결했다’라는 점을 성과로 내세웠다. 현재는 물론 당시에도 사실이 아니었다. 해결은커녕 불씨를 키우는 중이었다.

9월29일에는 대통령이 경제사회노동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한 김문수씨가 화물연대 투쟁에 대해 “아직 (안전운임제 일몰) 시한이 다 되지 않았는데 미리 파업을 하고 난리를 쳐서 윤석열 정부 초기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노동계가 반발했다. 국정 최고책임자가 인사권 행사를 통해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윤석열 대통령에게는 지적 스승이 한 명 있다.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다. 그는 2019년 검찰총장 청문회 때 자신의 가치관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으로 밀턴 프리드먼의 〈선택할 자유〉를 꼽았다. 프리드먼은 ‘국가의 역할’을 최소화해야 한다며 ‘작은 정부’를 강조하는 학자다. 자동차의 ‘안전벨트’를 의무화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까지 했을 정도다. 윤 대통령은 대선주자 시절 프리드먼을 거론하며 “없는 사람은 부정식품이라도 먹어야 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난 6월 윤석열 대통령이 경남 창원의 원전업체를 방문해 “지금 원전업계는 탈원전이라는 폭탄이 터진 전쟁터다. 전시에는 안전을 중시하는 관료적 사고를 버려라”고 한 것은 정확히 프리드먼식 주장이다. “안전을 중시하는 사고를 버려라”는 발언은 정부 관료를 향한 것이었다. 이태원 참사 이후 이 말을 다시 곱씹으면 아찔하기까지 하다.

이상민 장관은 이태원 참사 직후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으로 파악한다”라고 말했다. 이 역시 국가의 역할을 부정하는 발언이다. 참사 당일 경찰청장이 캠핑을 떠나고 경찰 상황관리관이 자리를 비운 일이 주무 장관의 인식과 무관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상민 장관은 유족들이 만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요구에 대해서도 “연락처가 없다”라며 사실과 다른 답변을 해 거짓 논란을 일으켰다. 국가가 유족에게 다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마저 저버린 언행이었다.

이상민 장관은 존재 자체로 현 정부의 리스크다. 그럼에도 이상민 장관을 지키려는 대통령의 대응은 국정 전반을 마비시키고 있다. 야당의 이상민 장관 해임 움직임에 대통령실은 “그러면 국정조사는 끝이다. 대통령이 굉장히 불쾌해한다”라고 반응했다. 민주당으로서는 차라리 반가운 호재다. ‘윤석열 정부의 뻔뻔한 버티기’를 더욱 부각시킬 수 있다. “대통령이 해임안을 거부하면 부담은 결국 여권이 지게 된다”라는 말도 나온다. 대통령은 현 정국을 풀 생각이 없어 보인다.

윤석열 대통령의 정치는, 우리가 아는 정치의 금도를 모두 깨버린다. 자기편을 만들고, 반대편을 설득하는 정치의 기본 중 기본이 없다시피 하다. 그는 역대 최소 표 차이(24만여 표)로 대통령이 됐다. 야당과 협치가 필수적이지만 야당과의 만남조차 외면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9일 만에, 박근혜 대통령도 취임 한 달 반 만에 야당과 만났다. 그러나 취임한 지 6개월이 지난 윤석열 대통령과 야당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은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최대 명분과 다름없던 도어스테핑을 중단했다. ⓒ대통령실통신사진기자단

확장 대신 고립

대통령실에서는 “야당이 노골적으로 정권 퇴진 운동을 지원하고 있는데 먼저 손을 내밀 수 있는 상황인가”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나온다. 그러나 미국 순방 중 비속어 논란 때 그 대상이 한국 국회였다며 야당을 모욕하는 해명을 내놓고도 대통령은 별다른 사과가 없었다. 대통령실은 사실무근이라고 했지만, 윤 대통령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두고 “인간 자체가 싫다”라고 했다는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의 말도 세간에 오르내린다.

여권과의 관계에서도 ‘확장의 정치’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근 여당 지도부와 첫 관저 회동을 가지기 전 윤 대통령이 이른바 ‘윤핵관’으로 불리는 권성동·장제원·윤한홍·이철규 의원과 먼저 비밀리에 만났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의도가 시끌벅적했다. 윤 대통령은 자신과 껄끄러운 관계에 있던 이준석 전 국민의힘 대표를 향해 ‘내부 총질이나 하던 당대표’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확장 대신 고립의 정치를 택하고 있다.

언론과의 관계는 적대로 흐른다. 입맛에 맞지 않는 언론은 언제든 내칠 수 있다는 신호를 노골적으로 내보냈다. 미국 순방 중 비속어 논란을 자막으로 방송한 MBC를 두고 대통령이 직접 “가짜뉴스로 이간질하려는 악의적인 행태”라고 표현했다. 동시에 대통령실 용산 이전의 최대 명분이나 다름없던 도어스테핑까지 중단해버렸다.

언론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동남아 순방 때 MBC 기자의 대통령 전용기 탑승을 배제하자 〈한겨레〉와 〈경향신문〉도 탑승을 거부했다. 언론노조, 언론정보학회 등 국내는 물론 국제기자연맹, 국경없는 기자회 등 해외에서도 윤 대통령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학계에서도 윤석열 정부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이 나왔다. 11월18일 ‘다른 미래 네트워크 포럼’에서 지주형 경남대 교수(사회학)는 윤석열 정부가 ‘통치의 위기’에 빠져 있다고 지적했다. 지주형 교수는 “윤석열 정부가 개입할 곳과 그러지 않을 곳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저성장과 인플레이션 속에 복지예산은 삭감하고, 이태원 참사 때처럼 질서와 안전을 위한 경찰력 투입에는 소극적이었다. 국가 장치의 효과적인 작동을 가져오는 통치 프로젝트도, 분열된 정치세력을 통합할 수 있는 리더십도 없다”라고 말했다.

일부 보수언론은 윤 대통령이 2024년 총선을 앞두고 ‘자기 정치’를 시작했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야당·언론·노동계에 대한 강공 모드로 보수층에 어필함으로써 독자적 지지기반을 세우려 한다는 것이다. 통치자로서 실패한 정치인이 의미 있는 지지기반을 구축할 수 있을까. 이태원 참사와 화물연대 파업에서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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