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당역 역무원 살인사건을 접했을 때 마침 나는 신당역에서 전철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플랫폼에 서서 뉴스들을 스크롤하다가 신당역 살인사건을 다룬 기사의 제목을 발견한 순간, 말 그대로 몸이 얼어붙었다. 피해자는 지하철 역사 내 여성 화장실을 순찰하던 중 전 직장 동료였던 가해자의 칼에 찔려 죽었다. 그가 사망한 화장실은 내가 서 있는 곳에서 고작 50m 남짓 떨어진 장소였고, 사건이 일어난 지 열두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때였다. 화장실이라는 표지판이 낯설고 무섭게 보였다. 덜덜 떨며 활자를 읽어 내려가는데, 몸이 저리듯 아프고 속이 울렁거렸다.
가장 처음 보도된 단신도 끔찍했지만, 잇달아 올라오는 후속 보도의 내용은 더욱 잔인했다. 가해자는 같은 직장에 소속된 이였고, 피해자는 이미 그를 스토킹 범죄로 신고해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피해자에게 수백 차례의 문자와 전화를 보내며 협박을 일삼던 그는 고소 이후에도 구속되지 않았다. 태연히 도심을 활보할 수 있었기에 피해자를 쫓아가 살해했던 것이다.
김현숙 여성가족부 장관은 사건 현장에까지 찾아와 이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 주장에 근거는 없었다. 그러나 이 사건 뒤에 놓인 ‘젠더 데이터 공백’을 보면, 이 사건이 여성혐오에 근거한 젠더 기반 폭력이 아니라고 결코 단언할 수 없다.
‘젠더 데이터 공백’은 여성의 데이터가 제대로 수집되지 않는 현상을 일컫는다.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에서는 편향된 데이터 수집이 여성의 실생활을 얼마나 악화시키는지 자세히 다룬다. 이 책에는 화장실, 교통과 이동, 자동차 안전 문제 등에 이르기까지 사회 각 영역에서 여성의 데이터가 제대로 수집되지 않아 전 지구적으로 여성들이 실질적 위험에 처한 사례가 빼곡히 실려 있다.
젠더 데이터 공백의 문제는 신당역 살인사건과도 관련이 있다. 법원이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무시한 채, 가해자를 구속하지 않고 내버려두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법원의 판단에는 젠더에 관한 사회문화적 편견도 개입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여성 대상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을 가늠할 데이터가 사실상 공백에 가깝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존재한다. 스토킹 범죄가 어떻게 살인으로 이어지는지,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성에 따른 특수성이 무엇인지 실질적인 범죄 현황 데이터가 부족한 것이다.
신당역 살인사건과 관련해 각종 언론 보도에 자주 언급된 건 2021년 국회 여성가족위원회에 제출된 ‘스토킹 방지 입법정책 연구 최종보고서’와 2022년 8월 발표된 ‘친밀한 파트너 살인의 특성에 관한 연구:헤어진 파트너 대상 스토킹을 중심으로’이다. 전자의 연구 보고서는 스토킹 범죄로 인해 신체적 폭력을 당한 피해자가 응답자 중 42.6%에 달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스토킹 범죄가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주는 통계자료다. 그러나 이 데이터는 어디까지나 설문조사 결과로 실제 경찰청에서 일괄적으로 수집하는 범죄 통계가 아니라는 한계점이 있다.
그런가 하면 후자의 연구는 친밀한 파트너 관계에서 일어나는 여성 살인을 다룬다. 신당역 역무원 살인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가 친밀한 관계였던 건 아니지만, 스토킹 범죄 특성상 교차점이 있는 지점이 많다. 이 연구 결과는 스토킹 범죄의 특수성과 관계성을 명료히 드러낸다. 특히 이 논문의 서두에는 국내에서 친밀한 파트너 관계의 남성으로부터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한 여성이 지난 13년간 총 2298명이라는 수치를 밝히는데, 이는 국내 여성단체 ‘한국여성의전화’가 매년 수집해 발표하는 ‘분노의 게이지’ 통계 결과다.
‘분노의 게이지’는 전·현 배우자·애인·동료 등 피해자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남성 가해자가 여성을 살해하거나 살해할 뻔한 사건들을 집계한 통계다. 언론에 보도된 뉴스를 활동가와 자원봉사자들이 일일이 확인해서 수집하는 자료이므로 보도되지 않은 범죄는 통계에 반영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가시화된 사건만 포함한, 최소한의 데이터인 셈이다. ‘최소치’임에도 불구하고 결과값은 어마어마하다. 2022년 3월 발표된 ‘2021 분노의 게이지’에 따르면 여성 피해자는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1.4일에 한 명꼴로 살해되거나 살해될 뻔했다. 참고로 ‘이별을 요구하거나 만남을 거부해서’ 범행을 저질렀다는 가해자의 비율이 26.7%로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다.
경찰청도 아닌 시민단체가 데이터 수집
지난 13년 동안 이어져온 ‘분노의 게이지’ 통계 작업은 손이 굉장히 많이 가는 프로젝트다. 이 통계자료를 만들기 위해 활동가·자원봉사자 수십 명이 몇 시간씩 컴퓨터 앞에 앉아 뉴스를 검색한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피해자와 어떤 관계였는지, 왜 그랬는지 뉴스를 하나하나 살펴보고 숫자를 더하는 것이다. 그나마 지난해부터는 개발자가 참여하여(이 역시 자원봉사) 이 작업을 일부 자동화할 수 있는 뉴스 크롤러 프로그램을 개발했다. 여전히 눈으로 검토하고 데이터를 입력해야 하지만, 그래도 작업 단계가 줄었다는 점에서 큰 변화다.
그런데 왜 경찰청도 아닌 민간 시민단체가 매년 이렇게 데이터를 수집해야 하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경찰청이 이 데이터를 달리 분류하거나 공개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 데이터는 여성 피해자의 죽음을 막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때로 재판부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아는 사이라는 이유로, 혹은 과거에 친밀한 관계였다는 걸 구실 삼아 구속영장을 발부하지 않거나 감형하기 때문이다. ‘분노의 게이지’는 이러한 법원의 안일한 태도가 피해자 여성을 위험으로 내몬다는 사실을 정량적으로 밝혀낸다. 스토킹을 그저 실패한 짝사랑의 문제로 치부해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한 탓에 피해자들은 신고하고 나서도 가해자에게 살해당한다. 그래서 여성들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데이터를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말 그대로 ‘분노’를 담아서.
신당역 살인사건이 일어난 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았는데 얼마 전엔 아내가 남편에게 살해되었다는 뉴스가 보도됐다. 이 사건의 피해자 역시 이미 네 차례나 경찰에 가정폭력을 신고한 바 있다. 신당역 살해 피해자는 가해자를 두 번이나 고소했고, 습격당했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화장실의 비상벨을 눌렀다. 신고해도, 고소해도, 벨을 눌러도 여자들은 죽었다. 심지어 당국은 이를 기록하지도 않는다. 이것이 왜 젠더 폭력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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